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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껍데기 속에는 뭘 채워야

한나 / Cocoon

by 글방구리

작가님은 [글루미 릴레이]를 어느 분께 증정하셨나요? 저는 책이 나오고 난 뒤 잠깐 고민을 했답니다. '내 이름 걸고 낸 단독 저서도 아닌데 이걸 굳이 지인들에게 보내야 할까? 내가 책을 냈다고 해서 누가 관심이나 갖겠어. 책을 안 읽는 사람한테는 책 선물이 고문이라고 하던데.'


고민 끝에 단독 저서가 아니어도 함께 기뻐해 줄 친구 한둘, 평소 책 읽는 것을 부담스러워하지 않았던 동료 몇 명에게 보내줬어요. 출판비를 댄 작가님은 "책이 안 팔려도 상관없다. 나에겐 보석 같던 이들 무명의 작가들의 글들이 활자화되어 세상에 나오게 된 것만으로도 내겐 충분한 의미이다."(13쪽)라고 쓰셨지만, 그래도 책이 잘 팔렸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여기저기 홍보도 했지요.


반응은 다양했습니다. 출간 소식을 올리자마자 만만치 않은 가격의 책을 선뜻 주문하고 축하의 메시지를 보내준 글쓰기 교실 엄마들. "저 읽으면서 엉엉 울었잖아요."라고 소감을 이야기해 준 어느 방과 후 부모. 제가 보내 준 책을 읽고 온라인 서점에 리뷰를 남겨 준 어느 동료는 책값이라며 코바늘로 뜬 하얀 십자가를 선물로 주고 가기도 했어요. 예상치 못한 분들의 축하와 넘치는 응원은 제가 마치 꽤나 유명한 작가가 된 것마냥 어깨춤을 추게 했지요.

반면, 책을 보내줬어도 아무런 피드백이 없는 지인들도 있었어요. 글에는 생각이, 삶이 담겨 있는데 그들은 제 삶과 생각이 별로 궁금하지 않은가 봅니다. 그러니 저 역시 그들을 향해 열려 있던 마음의 문을 살그머니 닫습니다.


한동안 글을 읽지도 쓰지도 않고 지내는 중에 브런치 알림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글을 발행한 지 보름 정도가 되면 자동적으로 보내지는 알림 같아요.

근력이 바닥을 쳤으니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하나 막막합니다. '아니, 글쓰기 근력을 꼭 키워야 하나? 내 글이 세상에 뭔 도움이 된다고, 가뜩이나 말 많고 시끄러운 세상에 정화되지 않은 잡음을 더하는 것 외에 무슨 가치가 있다고.'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슬럼프마다 마주 대하게 되는 본질적인 회의감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그렇게 헤매며 지내는 중, 오래전에 출간했던 책이 생각났어요. 초판도 다 팔지 못하고 절판된 책. 혹시나 하고 온라인 서점에 중고판매가 올라와 있는지 검색해 보았습니다. 1998년에 발행되었던 책이 딱 한 권 남아 있네요. [글루미 릴레이]에는 쓰지 않은 제 이름 석자가 박힌 책이라 왠지 안쓰러운 마음도 들고, 마지막 한 권은 저자인 제가 거두어야 할 것 같은 책임감에 책을 주문했지요.


누렇게 색이 바랜 표지가 지나간 세월을 말해 줍니다. 한 장을 넘깁니다. 면지에 구매했던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을까, 아니면 제가 누군가에게 증정했던 책이 돌아온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어요. 본문을 휘리릭 넘겨 봅니다. 여기저기에 줄을 그어 놓은 게 보입니다. 줄 그은 부분을 찾아 읽습니다. 남의 글 같습니다.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삼십 년쯤 전, 어느 누군가 한 사람은 줄을 그으며 이 책을 읽었구나. 어쩌면 그 사람은 이 글을 읽으며 자기 신앙을 다졌을지도 모른다. 일개 무명 저자의 책을 이렇게 오랫동안 버리지 않고 간직했다니. 내 손을 통해 새로 쓰신 하느님의 말씀이 그분의 인도대로 어느 누군가의 마음에 뿌려졌으니, 그 씨앗이 부디 위로였기를, 부디 힘이었기를, 부디 희망이었기를.


"유충이 성체가 되기 전에

고치 속에서 자신의 몸을 전부 녹여버리듯,

너는 지금 녹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본래의 네가 누군지를 잊어가며.

화려한 고치는 썩 나쁘지 않았다."(94쪽)


"그저 네가 너이기를 바랐을 뿐이다.

성충이 되겠다고 번데기가 되기를 자처한

너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95쪽)


"텅 비어 버린 껍데기를 들여다보면서도,

너의 속은 여전히 가득 차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속이 무엇으로 채워져야 하는지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어쩌면 그 답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는지도 모른다."(98쪽)


"따뜻한 냉소주의에 대해서,

사랑하면 얻는 슬픔에 대해서,

시니컬에 숨겨진 포용에 대해서."(101쪽) 이야기하고 싶다고 하신 한나 작가님.


저는 지금 조금 혼란스럽습니다. 저 스스로 선택한 고치 속에 있는지, 아니면 텅 비어 버린 껍데기를 놓고 망연자실하고 있는 중인지, 제 속을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지 모르겠어서요. 글을 계속 써야 하는지, 이렇게 쥐어짜듯 내놓는 제 글들이 어느 누군가의 마음에 머물 수 있는 유효기간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겠어서요.

그래서 작가님께 여쭙니다. 삼십 년 후, 헌 책방에서 발견된 우리의 [글루미 릴레이]에도 누군가 남겨 놓은 밑줄의 흔적이 있을까요? 우울한 어느 누군가가 번데기를 벗어버리고 성충이 되었다는 희망을 우리 책에서 발견했다고 기대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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