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o / 인형수선사
"어머~ 아이들 예뻐하시나 보다~ 난 우리 애 하나 보는 것도 어렵던데."
글쟁이 때려치우고 보육교사를 한다고 했을 때 많이 듣던 말 중의 하나였어요. 아이들! 예쁘죠, 예쁩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안 예쁜 아이도 있었어요. 아니, 예쁘지 않다기보다는 여럿 중의 하나로 돌보기에 손이 많이 가는(?) 아이들이죠.
그런데 아이의 성향이 어떻든 엄마가 자기 자식을 거부할 수 없듯이, 교사도 자기가 맡은 아이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내 마음에 더 예쁘든, 덜 예쁘든 최대한 겉으로 표시내지 않고, 그 아이 본인은 물론 다른 아이들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잠깐 만나는 게 아니라 하루 종일 같이 밥 먹이고 놀고 씻기고 재우는 '삶'을 함께 해야 하는데, 덜 예쁜 마음이 드러나면 아이도 교사도 하루하루가 말 못하게 괴롭습니다.
저는 이렇게 '교사를 시험에 들게 하는' 아이를 만나면, 아직 내보이지 않은 그 아이의 미래를 상상하곤 했습니다. 그 아이 때문에 힘들겠다고 위로하는 동료들에게는 이렇게 답하곤 했죠.
"그 녀석, 나중에 크~~~게 될 인물이야."
성서에 나오는 비유처럼 지금은 아이가 돌밭으로 보이지만, 그 돌밭 안에는 보물이 숨겨져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고요.
거름 냄새가 진동하는 자갈밭 안에 보물이 묻혀 있다면 그 밭을 쉽사리 팔아 버리지는 못할 거예요. 작가님의 [인형 수선사]에 나오는 구체관절인형처럼 보이지 않는 뱃속에 다이아몬드가 숨겨져 있다고 보거나, 말썽꾸러기로 보이는 아이가 이다음에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인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지금 보이는 겉모습으로 가치 판단을 하지는 않겠지요. 그러니 사람 안에 감추어진 가치를 볼 수 있는 눈이 있는지 그게 가장 중요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사람 안에 감추어진 가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며 온갖 풍파를 겪는다고 해도 결코 훼손되지 않는다고 저는 믿습니다.
Bono작가님의 [인형 수선사]를 읽으면서, 20대 중반 진학과 결혼과 수도원 입회를 저울질하던 때 제 이정표가 되어 주었던 책이 떠올랐습니다. 헨리 나웬의 [상처 입은 치유자]입니다. 그 책의 내용이 다 기억나지는 않습니다만, 상처 입은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그 자신도 치유를 경험한 사람이지 상처 없고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는 주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인형 수선사]의 은영이를 한마디로 말하면 바로 상처 입은 치유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젊은 시절 읽었던 책을 떠올린 김에 당시 제 머릿속에 맴돌았던 질문들도 다시 소환해 봅니다.
'나처럼 죄 많고 나약한 실수투성이의 인간이 감히 타인의 삶에 개입할 수 있는가? 나처럼 믿음이 약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도 남을 도울 수 있는가? 나처럼 불순한 의향과 거짓에 매몰되어 살았던 사람도 치유자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는가?'
얼핏 겸손해 보이는 이런 질문들이 굉장히 교만한 마음이었다는 것은 그 후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차차 알게 되었지요. 하느님은 스스로 죄 없고, 상처 없고, 깨끗하고, 순결하고, 완벽하고, 결점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다가가기를 껄끄러워하신다는 것도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2 코린 12,9)라는 사도 바오로의 고백도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참 잘 나갈 때는 약점을 들킬까 그리 겁이 나더니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약점을 덜 부끄러워하게도 되었네요. 뻔뻔해진 걸까요.
요즘은 아이들을 글쓰기 수업 때만 만납니다. 하루 종일 몸으로 부대끼는 게 아니다 보니 누가 더 예쁘고 덜 예쁠 일도 없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을 만나며 밭에 묻힌 보물이나 다이아몬드를 숨긴 구체관절인형을 떠올릴 필요는 없어요.
여기저기 뜯어지고 고장 난 구체관절인형은 아이들보다 저 자신을 들여다보게 하네요. 누가 제 뱃속에 다이아몬드를 꼭꼭 숨겨 두셨는지, 왜 그런 보물을 숨겨 두셨는지, 제가 평생 그 보물을 잘 품고 살았는지 곰곰 묵상해 보라는 숙제를 받은 것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