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실존 인물이었던 당나라 장수 장인원을 모델로 하여 그가 아들에게 쓴 편지로 구상한 허구의 글입니다.
*실존 인물 장인원은 당나라 측전무후와 현종 사이, 돌궐의 침략을 막기 위해 임명된 삭방도대행총사령관으로, 삼수항성을 건축하여 돌궐의 공세를 막아낸 명장입니다. 당나라 역사를 기록한 <신당서> “열전”에 그의 일대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개원 원년: 712년, 당 현종 1년.
아들아 보거라.
하늘이 은혜를 내리사 무후의 손(遜)이시며 선왕(先王)의 적자이신 천자께서 새로 보위에 오르신지 이미 한 해가 다 되어가는구나. 이제 당의 모든 백성들은 새가 둥지를 얻고 물고기가 물을 얻은 것과 같이 되었으니, 늙은 고목같은 내 몸에도 새 잎이 나는 것만 같다. 또한 새 천자께서 백성의 고통을 헤아리사 저 어둡고 음습한 곳에 숨어 약탈의 때를 노리는 추한 것들을 멸하려 하시니 아아, 내 평생의 소원이 이제야 이루어질 것이냐. 허나 아직은 부족한 약관(弱冠)의 네가 감히 부총관이 되어 이곳에 부임한다하니, 아비로서의 사사로운 정을 떠나 간곡히 일러 두고 싶은 말이 많다. 너는 숲에서 홀로 짐승의 무리를 만난 사냥꾼같은 마음으로 내 말을 새겨 나라의 방위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
돌궐이 부흥했을 당시(제2차 돌궐제국) 당과 돌궐 주변의 세력도
오랜 옛날부터 우리 중원 땅은 기름지고 생산이 많아 주변의 야만스런 것들이 침 흘리며 탐내어 노략질이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더럽고 황량한 곳에서 나서 맹수처럼 자라 결코 길들일 수 없고 아무리 없애고 쳐내도 장마 뒤의 잡초처럼 돋아났다. 돌궐, 그들도 수십 년 전 태종황제께 대패, 무릎을 꿇었지만 어느새 부흥의 깃발을 올리고 지금 우리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지 않느냐. 네가 어릴 때 돌궐은 용병으로 노비로, 때론 아첨밖에 남지 않은 배신자로 벌레처럼 살았으니, 너는 그들의 진정한 본성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푸른 투르크’라는 뜻의 쾩 투르크라 부르고 텡그리라는 하늘의 신, 예르라는 땅의 신을 섬긴다. 또한 그들의 조상은 저 멀리 알타이라 불리는 산속에서 살았다는데, 처음엔 유연이라는 또다른 유목 부족 밑에서 대장장이 노예살이를 했던 것들이다.
그들의 옛 이야기에 의하면, 돌궐은 늑대의 자손이다. 먼 옛날 이웃부족과의 전투에서 패한 돌궐이 몰살당하고 단 한 아이만 살아남았는데, 암 이리가 전투에서 팔다리가 모두 잘린 그 아이를 거두어 먹이고 끝내 교접하며 열 명의 자손을 낳았다 한다. 이 자손 중 가장 큰 부락을 이룬 '아사나'가문이 돌궐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들이 조금씩 힘을 키워 주변 부족을 제압했고 아사나는 스스로를 '초원의 황금 씨족'이라 부르며 가소롭게도 왕이라 칭하니, 이들의 왕은 '카간'이라 부른다.
퀼 테긴의 무덤에서 가져온 두상. 당나라풍으로 봉황이 새겨진 관모를 쓰고 있다.
무릇, 농사를 짓지 않고 말을 타고 동물을 사냥하며 부족한 물자는 이웃을 약탈하는 것이 이들 야만한 것들의 사는 방식이고, 늑대가 그런 북쪽의 오랑캐들에게 숭배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이런 이야기가 비록 맹랑하긴 하지만, 한편으론 그들이 늑대를 닮아 포악하고 끈질기며 영악한 것도 사실이니라. 그들은 전투에서 죽지 않고 늙어 죽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머리는 길게 땋으며 천막에서 살면서 말과 독수리를 가족처럼 대한다. 사람이 죽으면 가족들은 스스로 이마를 길게 베어 피를 뒤집어 쓰고 눈물로 통곡하며 영혼을 달래니, 보는 이들이 두려워 가까이 하지 않는다. 남자는 걸을 줄만 알면 말을 타고 궁술을 배워 그 솜씨가 신기에 가깝고 여자들도 거칠고 사나워 때로 전투에 나서며 때로는 사냥을 한다. 그러니 백성들 모두가 전사나 다름없어, 초원에 흉년이 들기라도 하면 떼를 지어 죽음을 무릅쓰고 중원을 노린다. 특히 근래 퀼 테긴이라는 자가 중심이 되어 날파리같이 흩어졌던 백성을 모으고 버려졌던 초원으로 복귀하여 나라를 세웠으니, 너는 이자를 특별히 조심하여 한치도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
퀼 테긴은 아사나 일테리쉬 카간의 차남으로 열 여섯부터 전투에 나간 이후, 한 번도 손에서 활을 놓지 않았다 한다. 그는 날래고 용맹하여 감히 대적할 자가 없는 전사로 늑대의 자손이며 무쌍의 전사라 불린다. 이태 전 정주 전투에서 우리는 무려 세 번이나 그의 말을 쏘아 쓰러트렸지만 놈은 귀신처럼 말을 바꾸어 타며 공격을 멈추지 않았으니, 우리의 칼날이 그의 목을 베지 못하고 창은 그의 허리를 뚫지 못했다.
지난 겨울 전투에서 돌궐이 보급이 떨어져 굶주렸을 때, 나는 이제 그들의 몰락을 눈앞에서 볼 생각에 기뻐 날뛰었다. 그런데 테긴은 놀랍게도 말머리를 돌려 먼 크르크스로 행군을 결정, 그곳의 왕을 죽이고 거기서 겨울을 났다. 너도 알다시피, 겨울의 행군은 전군의 몰살을 각오해야 하는 반 미친 짓거리가 아니더냐. 그들은 크르크스까지 눈 덮인 산을 넘으며 말은 물론 인육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는구나. 그 뿐이랴. 그는 권력을 쥐려는 사촌들을 모두 몰살하여 자신의 형을 카간의 자리에, 사돈을 군사(軍師)에 앉혀 병권을 한 손에 쥐고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 한다. 테긴의 결단력이 없었다면, 우리들은 이미 오래전 초원 왕의 수급을 문 앞에 걸었으리라. 아, 이 애비는 지금도 돌궐과 테긴이라는 두 글자를 생각하면 밤에 잠을 잘 수 없고 낮에 자리에 앉을 수가 없다.
올 봄, 우리 군사 200여 명이 테긴이 공격한다는 헛소문에 몸을 떨며 전장을 이탈하였기로, 본보기로 모두 참수하였다. 누군가의 아들이며 누군가의 지아비인 그들의 목을 치는 내 심정은 오죽하였겠느냐. 허나 두려움이란 전염병과도 같은 것. 살아있는 늑대의 신, 테긴이 말(言)이 되고 소문이 되어 성벽을 넘고 조정을 집어 삼킬까 두렵다. 그들이 '영원의 돌'이라 부르는 비문에 테긴의 무훈이 새겨져, 죽어도 죽지 않는 돌궐의 신이 될까 두렵다.
중국대륙은 한족만의 것이 아닌 유목민과 정주민, 한족과 여타 민족들의 터전이었다. 만리장성은 유목부족을 막기 위해 쌓은 것인데, 이후에도 여러 성채가 건립되었다.
아들아 똑똑히 알아라. 그들이 바라는 것, 곡식과 비단, 차와 도자기 그 어떤 것으로도 초원의 욕망을 다 채워 줄 수 없으며 황실의 공주를 모두 그들에게 시집보내도 영구한 화친을 맺을 수 없다. 윗자리를 차고 앉은 한심한 원로들은 돌궐을 위무(慰撫)하라한다. 그러나 화친은 눈속임일 뿐, 초원의 영혼은 피를 마시고 산다. 그러니 간절히 원하건데 아들아, 네가 테긴의 숨통을 조여 저들의 말들이 황허의 물에 발을 적시지 못하게 하고 중원의 풀을 뜯지 못하게 하거라. 천자께 엎드려 주청하여 감히 죽어간 이들의 목숨을 어설픈 평화로 바꾸지 못하게 하여라.
멀리, 빗속에서 늑대의 울음이 들리는구나. 삼가, 옷깃을 여며 천자의 만수무강과 너의 무운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