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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Sep 28. 2021

이별을 마주할 용기

고양이를 키우지 않아도 키우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루에 대부분을 고양이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수시로 창밖을 내다본다. 우연히 고양이가 지나가는 모습을 볼 때가 있다. 그러면 반가워서 소리치고 싶다. "몽땅아 안녕!"


올초부터 알고 지낸 길고양이 몽땅이를 만나러 자주 산책을 나갔다. 길게는 일주일 동안 만나지 못할 때도 있지만 이삼일에 한번, 운이 좋으면 며칠 동안 계속 만나고 올 때도 있다. 몽땅이를 자주 만날수록 헤어지기가 힘이 든다. 마치 연애 초기에 연인과 헤어지기 싫어서 집 앞을 배회할 때처럼.


아침저녁으로 선선해졌다. 여름부터 나는 몽땅이가 겨울을 밖에서 보낼 생각을 하면서 마음 아팠다. 쌀쌀해진 새벽에 두꺼운 이불을 꺼내면서 몽땅이를 생각했다. 집에서도 추운데 몽땅이는 괜찮은지 걱정이다. 밖에서 고양이가 싸우는 소리가 난 후에 만난 몽땅이의 이마에 발등에 귀에 상처가 생겼다. 자주 싸우는 검은 고양이에게도 몽땅이에게도 제발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부탁하지만 내 말은 귓등으로 듣는 것 같다.


몽땅이는 내 목소리가 들리면 수풀 속에서, 아파트 화단에서 후다닥 나온다. 내 다리에 머리를 비비다가 갑자기 벌러덩 눕는다. 엉덩이를 만져주면 왼쪽으로 뒹굴, 오른쪽으로 뒹굴 기분 좋은지 짧은 꼬리를 흔든다. 이렇게 몽땅이랑 시간을 보내다가 "몽땅아 오늘도 좋은 곳 찾아서 잘 자고 내일 꼭 보자. 빠빠이!"

하고 돌아설 때 몽땅이는 갑자기 공손하게 앉아서 멀어지는 나를 빤히 바라본다. 그 순간을 견디기가 힘들어서 다시 몽땅이에게 돌아가면 몽땅이는 다시 벌러덩 하고 눕는다. 그래도 결국은 다시 빠빠이 하고 돌아서야 하는 순간이 온다. 이 순간이 힘들어서 한동안 몽땅이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어느 날은 다른 사람이 몽땅이에게 관심을 보이고 귀여워하는 순간에 얼른 집으로 왔다. 그것도 안 되면 남편이나 아들이 몽땅이와 놀아줄 때 나는 먼저 집에 와 버렸다. 몽땅이와 매일 하는 이별의 순간을 견디기가 힘이 들어서였다. 이제 제법 쌀쌀한 저녁에 몽땅이를 길에 두고 오는 것이 미안하다. 나는 이별을 마주할 용기가 없다. 45년을 그렇게 살아왔다. 아직도 내 마음에는 보내지 못한 사람들이 얇은 딱지 아래에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있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곳으로 떠난 사람들, 보내기에는 너무 아픈 이별을 하고 떠난 사람들이다.



내가 동물에게 이렇게 깊은 마음을 주는 일은 거의 없는 일이다. 나는 사람에게도 그렇지만 동물에게도 깊은 마음을 주지 않는다. 그런 나에게도 동물과의 특별한 기억이 있다. 어릴 때 시골에서 키우는 소가 있었다. 그 소는 우리 가족이 기른 첫 번째 소였다. 그 소는 다른 소와는 달랐다. 뿔이 온화하고 멋지게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커다란 눈은 온순하고 깊었다. 엄마가 매일 돌본 덕에 털도 고르고 윤기가 났다. 그 소는 나의 친구였다. 대부분의 논밭은 경운기를 이용하지만 아주 높고 길이 좁은 논은 그 소가 경운기의 일을 했다. 일을 하다가 쉴 때 그 소는 풀밭에서 풀을 뜯기도 하고 낮잠을 자기도 했다. 나도 그 옆에 누워서 짤깍짤깍 소리를 내는  미루나무 잎을 올려다 보기도 했다. 나는 그때 우리가 친구라고 생각했다.


여름에는 그 소를 풀밭으로 자주 데리고 나갔다. 코뚜레에 맨 줄을 살짝만 당겨도 소는 얌전하게 나를 따랐다. 우리 집에서 소는 사료를 먹은 적이 없다. 여름에는 풀을 베서 먹이거나 풀밭에서 한가하게 풀을 뜯게 했다. 겨울에는 쇠죽을 끓여먹였다. 시골에서는 사람보다 먼저 소가 아침을 먹었다. 추운 겨울 이른 아침에 커다란 가마솥에 짧게 자른 볏짚을 넣고, 늙은 호박이나 고구마, 콩깍지도 함께 푹 끓여서 소에게 떠다 준다. 밤새 춥게 잔 아침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쇠죽을 소는 코를 실룩실룩하면서 먹는다. 밤새 언 몸이 녹는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그다음에 우리도 아침을 먹는다.


그렇게 정다운 소는 몇 년 후에 다른 곳으로 팔려갔다. 몇 년 동안 임신을 시도했지만 새끼를 낳지 못했다. 그래서 이웃마을에 팔기로 한 것이다. 어릴 때라 잘은 모르지만 송아지를 팔면 돈이 될 텐데 그러지 못한 소를 계속 데리고 있기 부담이 됐던 것 같다. 팔려가는 날 소도 이별을 알았던 것 같다. 커다란 두 눈으로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나도 소의 목을 안고 울었다. 울면서도 순한 그 소는 사람들 손에 트럭에 실려 떠났다. 이웃마을에 팔려간 소는 다행히 그다음 해에 새끼를 낳았다고 했다.


그 이후로 나는 동물에게 마음을 준 적이 없다. 텔레비전에서 동물이 나오는 프로를 보기는 하지만 키우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나는 나를 알고 있었다. 나는 동물을 키우기에는 너무 게으르다. 나는 동물을 키우기에는 너무 무책임한 사람이다. 나는 다시 동물과 이별하는 일을 만들고 싶지 않다. 그런 많은 이유로 나는 단 한 번도 반려동물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다.




내가 몽땅이와 살고 싶어 한다고 해서 그 아이를 데리고 올 수는 없을 것이다. 몽땅이는 아마 우리 집보다 밖에서 사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몽땅이는 동네의 핵인싸다. 그 아이가 자기만 따른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다. 이름도 내가 아는 것만도 여러 개다. 몽땅이가 자주 나타나는 곳에는 먹다 남은 캔이나 멸치, 사료가 항상 남아있다. 그런 몽땅이를 나만 소유하고 싶어서 데리고 오는 것은 아마 내 욕심일지도 모른다.


접촉성 알레르기가 있는 아들 때문에 키우다가 못 키우고 다시 밖으로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몽땅이는 얼마나 상처를 받을까? 그런저런 생각으로 몽땅이를 입양하는 것은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도 매일 몽땅이가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안아주고 싶다. 유튜브에 나오는 간식이나 고양이 용품들을 보면 몽땅이에게 다 사주고 싶다.


나는 몽땅이를 만나러 가는 날을 줄이고 있다. 찾아도 못 만나고 돌아오는 날도 있다. 그러다가 만나면 더 애절하다. 무슨 이산가족 상봉한 것 같은 분위기다. 몽땅이는 반갑다는 듯 나를 향해 총. 총. 총총. 총총총. 걸어온다. 점점 빨리 걸어오는 몽땅이도 아마 내가 반가운 것 같다. 그렇게 반가울수록 길에 두고 오는 것이 힘들어서, 아무리 자주 이별해도 익숙해지지 않아서 만남을 피하는 내가 한심하다. 만약 오래 만나지 않으면 몽땅이가 마음에서 사라질까? 그렇다면 몽땅이를 마음에서 지우고 싶다.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 같다. 이렇게 정들지도 모르고 철없이 웃고 놀았던 시간들이 후회가 된다. 나는 이별에 약한 동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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