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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Mar 02. 2021

남편의 딸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

아이의 어린이집 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아파트 뒤에 아이들과 오르기 좋은 산이 있어서 주말에 가족이 함께 산에 오르는 행사를 어린이집에서 열었다. 5월, 가정의 달과도 맞는 행사였다. 남편은 당연히 환영했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처음 간 것은 6살이었다. 남편은 어린이집 일에 적극적이었다. 전화 공포가 있고, 낯을 가리는 내가 아닌 남편이 학부모 운영위원회를 맡았다. 남편은 몇 달에 한번 어린이집에서 열리는 학부모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좋아했다. 일단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낼 수 있는 '부모'라는 이름을 가진 것부터 뿌듯한 모양이었다. 회의에 다녀오면 회의에서 오간 이야기를 나한테 먼저 톡으로 알려주고, 저녁 먹으면서 자세히 다시 설명해주기도 했다. 아이가 낮시간을 보내는 어린이집의 모든 것이 궁금하고 모든 것이 신기한 우리는 새내기 부모였다. 


하루는 학보모 회의에서 남편이 원장님을 식겁하게 하는 건의를 했다. 아이가 다닌 어린이집은 시에서 운영하는 어린이집이었는데 선생님들이 매일 교실과 화장실을 청소한다는 말을 들은 남편과 나는 충격을 받았다. 어린이집 선생님의 업무가 많을 텐데 어떻게 그 일을 다하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그래서 남편은 회의시간에 일주일에 한 번은 자기가 화장실 청소를 해줄 수 있냐고 건의했다는 것이다. 원장님은 단칼에 안된다고 했지만 다른 선생님들이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환하게 웃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원장님 못지않게 기함했다. 내가 만삭일 때도 화장실 청소 한번 안 해주던 남편이 다른 여자(물론 어린이집 선생님이지만)를 위해 화장실 청소를 그것도 일주일에 한 번씩이나 해주겠다니 어이가 없었다. 


남편은 그런 사람이었다. 남편의 눈에는 아내보다 아이가 먼저 보이는 것이다.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 선생님이 과도한 업무도 모자라 청소까지 하면 지쳐서 아이들에게 소홀해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자기가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도 과도한 육아에 지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조금 놀랍기는 하지만 남편이 그만큼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을 나는 항상 느끼고 있다. 


다른 학부모들과 함께 산을 오르는데 남편은 아이가 다칠까 봐 뒤에서 붙어서 아이를 따라갔다. 아이는 이것저것 만져도 보고 나뭇가지를 주워서 땅을 치면서 걷고 있었다. 잘 정리된 산책로를 따라 오르는 산길은 사실 많이 위험하지는 않았다. 남편은 중간중간 아이가 목마를까 물도 챙겨주면서 탑스타 모시는 매니저같이 굴었다. 나는 이런 모습이 익숙하기도 하고 남편이 평일에는 아이와 보내지 못하는 시간을 보상받고 싶어 하는 것을 알기에 조금 뒤에서 얼굴을 터고 지내던 엄마와 걷고 있었다. 한참을 남편의 밀착 케어를 지켜보던 그 엄마가 말했다. 

"남편이 엄청 자상하시네요. 좋겠어요."

"네! 남편이 내 아빠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많아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겠어요. 저렇게 챙겨주는데."

"아이에게 자상한 남편이 엄마에게는 조금 피곤할 때가 있거든요. 그래도 아이는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남편은 아이에게 귀찮다는 내색을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새벽에 일하고 와서도 거의 매일 놀이터에서 놀아주고 집에 와서 목욕도 같이 했다. 아이의 머리를 말려주는 일도 행복하게 생각했다. 아이가 9살이 될 때까지는 매일 남편과 내가 아이에게 책을 읽어줬는데 남편은 매일 혼자 그 시간을 독차지하고 싶어 했다. 지금도 아이가 원하면 읽어줄 텐데 아이는 이제 혼자 읽어도 된다고 해서 남편을 서운하게 했다.


남편은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자다가 깨면 엄청 짜증을 냈는데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는 울거나 불편해하는 소리가 들리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아이를 안아주거나 어디 불편한지 챙겼다. 그 모습을 보고 정말 남편의 아들 사랑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 욱 하는 성질도 아들 앞에서는 사라졌다. 아이가 잘못을 하더라도 아주 짧고 진지하게 타이르고 다시 그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사람이 이렇게 달라져도 되나 싶을 만큼 아이는 남편을 바꿔놓았다. 


남편이 아이에게 심하게 화를 내는 일도 있었다. 아이 친구와 아빠들만 외출한 적이 있었는데 아이가 장난으로 친구에게 흙을 던진 모양이었다. 아이가 8살 때였는데 남편은 아이가 평소 하지 않던 장난을 하는 것에 놀랐고 상대 아빠에게 민망했는지 아이에게 언성을 높이면서 화를 냈다고 한다. 아이가 잘못했으니 당연히 훈육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나중에 남편은 아이에게 네가 잘못했지만 아빠가 너무 심하게 화내서 미안하다고 아이에게 사과를 했다. 


아이 앞에서는 말도 행동도 조심조심하다 보니 우리 부부 역시 심한 말을 서로에게 하지 않게 되었다. 싸울 일이 있으면 카톡을 하거나 아이가 없을 때 했다. 그러다 보니 열기가 한 김 식어버려서 싸움이 미지근하게 끝날 때가 많다.  남편은 원래 화가 나면 버럭하고 끝나는 스타일인데 버럭까지 참아내다니 남편의 아이 사랑의 힘이 놀라울 정도다.


아이가 코로나로 집에만 있으면서 짜증이 늘었다. 그래서 내가 권투 글로브를 아빠와 아들에게 사주었다. 남편은 아들에게 거의 일방적으로 맞는 수준이다. 남편이 아들을 공격하기도 하지만 누가 봐도 봐주고 있다. 하지만 아들은 아빠를 봐주지 않는다. 한번 두 사람의 권투 장면을 보고 놀랐다.

"여보 무섭겠다."

라고 내가 물으니까 남편이 말했다.

"무서운 게 아니라 진짜 아파."

그러면서도 남편은 아들의 지친 집콕 생활을 풀어주려고 거의 매일 글로브를 든다. 


요리를 좋아하는 아이가 만들어 보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남편은 항상 함께 요리하는 시간을 갖는다. 나는 새로울 것 없는 반찬을 돌려 막기 하고 있지만 남편은 아이가 원하는 음식을 함께 만들어주려고 노력한다. 식빵도 처음 만들어봤다. 맛은 사 먹는 게 나았다. 만두를 만들겠다고 부엌을 초토화시켰다. 마카롱을 만들겠다고 하루를 다 썼다. 만두도 마카롱도 사 먹는 것이 정답이다. 사 먹는 것이 다 맛있지만 만드는 시간이 주는 행복만큼은 돈으로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설거지는 항상 내 몫이다. 남편이 설거지까지 해야 한대도 이렇게 다 해줄까 싶다. 역시 남편에게는 아내보다 아이가 먼저다.


나에게 남편 같은 아빠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할 때가 정말 많다. 매일 지루한 부루마블을 함께 해주고, 아픈 주먹질도 참아주는 아빠, 아이가 원하면  뭐든 함께 해주는 아빠가 있었다면 나는 어땠을까. 돈은 많지 않지만 아이에게 자신의 남은 시간과 마음을 다 주는 아빠가 내게도 있었다면 나는 조금 더 밝았을지도 모르겠다. 전화가 울리면 무서워서 전화를 이불로 덮는 사람이 안 됐을지도 모른다. 사람을 만나서 인사를 하기가 두려워서 골목길로 숨는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 얼굴이 싫어서 거울을 보지 않았던 사람이 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들은 지금의 엄마 아빠를, 지금의 자신을 다른 누구와도 바꾸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지금의 자기가 제일 좋다고 말하는 아들처럼 좋은 아빠가 나도 있었으면, 그래서 나도 그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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