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주부, 그 무게를 견뎌라
전업주부의 전업은 어디까지일까?
아이가 4살 때였다. 신용카드 사용기한이 지나 다른 신용카드를 신청하려고 전화를 했는데 카드사에서 거절당했다. 주부라서 안된다고 했다. 직업이 없어서 상환능력이 안된다나. 당시는 분양받은 집 대출금 때문에 통장에 여유가 없었다. 통장에 돈이 있으면 만들 수 있다는 지인의 말을 들으니 더 슬펐다. 나는 나이는 많은데 돈이 없어서 신용카드 발급을 거절당한 전업주부다.
전업주부
다른 직업에 종사하지 않고 집안일만 전문으로 하는 주부.
그런데 나는 전업주부라는 말을 할 때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서 불편하다. 누군가 내게 직업을 물으면 주부라고 한다. 그러면 상대는 아~전업주부 시구나. 이런다. 내가 주부라고 했는데도 굳이 전업주부라고 불러준다. 아니 그냥 주부라고요 라고 말하고 싶지만 예민해 보일까 봐 참는다. 왜 다들 그렇게 부르는지 생각해봤다. 그냥 주부라고 하면 집에서 놀고 있는 사람처럼 느낄까 봐 나름 존중하는 의미로 전업이라고 붙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는 전업주부가 아니다. 사전에서 찾아보니 전업주부는 다른 직업에 종사하지 않고 집안일만 전문으로 하는 주부를 일컫는 말이다. 내가 다른 직업에 종사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나 집안일을 전문으로 하는 주부는 아닌데 자꾸 전업주부라고 하니 그 말이 목에 턱 걸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 이름에 걸맞게 집안일을 잘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그렇지가 못하다. 나는 항상 최소한의 집안일을 하는 주부라고 말한다. 집안일을 그렇게 잘하는 편이 아니고, 살림에 흥미가 없다. 그런데 가끔 사람들이 나를 오해할 때가 있다. 김장을 하고, 제철김치를 담가 먹기 때문에 내가 살림을 잘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내가 김장을 시작한 것은 아이가 태어난 다음 해부터였다. 아이에게 먹일 김치를 내 손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전까지는 친정과 시댁의 김장에 살짝 발 담그고 훔쳐오는 수준이었다.
16년 전, 신혼 때 나는 반찬가게에서 반찬을 사 본 적이 있었다. 콩자반이었다. 내가 만들기에 시간이 많이 필요해서 귀찮았다. 그래서 사서 밥상에 올렸는데 남편은 한번 먹고 다시 먹지 않았다. 남편은 외식은 가끔 하지만 사 먹는 반찬을 싫어했다. 그 이후로 나는 지금까지 반찬가게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 그냥 무시하고 반찬가게를 이용했다면 지금도 편하게 반찬가게를 드나들었을지도 모르는데 무슨 자존심인지 그날 이후로는 맛없어도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김장은 갖다 먹지만 계절김치가 먹고 싶어 지면 하나씩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남편은 채소와 나물을 워낙 좋아해서 시장 가면 사고 싶은 채소가 많아졌다.
김치를 담가먹는다고 해서 내가 전업주부일까? 아닌 것 같다. 나는 청소를 싫어하고 그래서 잘 못한다. 매일 바닥을 청소하지만 다음날이면 다시 먼지가 한가득이다. 왜 그럴까? 아무리 생각해도 청소가 내 체질이 아니다. 매일 청소해도 그대로인 집이 나를 지치게 한다. 요즘은 코로나로 집에만 있으니 그래도 매일 청소라도 한다. 코로나 전에는 매일 하지 못할 때도 많았다. 며칠 전 남편이 요즘은 집이 깨끗한 것 같다고 했다. 예전에는 먼지가 보일 때도 있었다고. 그래서 한마디 했다.
내가 집에서 노는 사람이야? 밖에서 노는 사람이지^^
그랬다. 나는 주부이지만 밖에서 노는 사람이었다. 두 개의 독서회와 한 개의 영화모임, 그리고 아들의 독서모임까지 일주일이 부족할 때도 있었다. 도서관에서 하는 역사탐방이나 미술인문학 등등의 강좌를 신청하면 아침에 출근해서 놀고 저녁에 퇴근해서 집안일을 해야 했다. 지인들과 커피 약속 잡기가 어려울 때도 많았다. 그렇다 보니 청소나 빨래가 밀려 있을 때도 있었다. 그때는 정말 불량주부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임신으로 일을 그만두기 전까지는 직장 때문에, 아이가 태어난 후에는 육아로 인해 온전히 나로 놀아본 적이 없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후 4년간의 방탕한 시절이었다. 양심상 저녁은 남편이 좋아하는 나물과 직접 담근 김치, 된장국과 김치찌개, 미역국 등등을 돌려 막기 해서 차려냈다. 정말 정신없이 놀던 시절이었다. 이런 나에게 전업주부라는 말은 가당치 않다.
그렇다고 카드를 거절당할 만큼 무시받고 싶은 것은 아니다. 카드회사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돈을 벌어오는 것은 남편일지 몰라도 돈을 더 많이 쓰는 것은 주부라는 사실. 지금도 카드를 만들 때 주부라고 해서 거절당하는지는 모르겠다. 벌써 7년 전의 일이기 때문이다. 주부라는 이름으로 무시당하기도 싫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많은 일을 잘해 낼 것 같다고 부담 주는 것도 싫다니 내 이 기분이 뭔지 나도 모르겠다.
이렇게 불량주부인 나도 하루가 짧을 만큼 할 일이 많고, 하는 일도 의외로 다양하다. 집안일은 아무리 해도 결코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에 해가 지는 것처럼 영원히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이렇듯 지구의 자전과도 같은 집안일을 어떻게 해내야 전업주부가 되는 것일까? 청소나 빨래, 음식과 육아를 모두 전문으로 해야 전업주부일까? 아니면 그중에 하나만 나름 잘해도 전업주부일까? 둘 중 하나라고 해도 나는 전업주부로는 자격미달이다. 청소만 해도 집안을 모델하우스처럼 꾸밀 수 있는 프로페셔널한 주부도 있고, 요리는 테이블 세팅까지 완벽한 5성급 호텔 주방장 같은 주부도 있다. 살림 잘하는 주부들의 완벽한 집을 소개하는 프로를 남편과 같이 볼 때면 그들과 내가 같은 주부로 불리는 것이 남편에게 부끄럽다. 나는 도저히 그런 경지에 오를 수 없을 것 같다. 아무래도 나는 전업주부는 못될 것 같다. 주부라도 되려면 지금부터라도 노트북을 덮고 앞치마를 매야 할 판이다.
전업주부, 그 이름의 무게가 여전히 버거운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