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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Oct 26. 2021

12살 아들이 편의점에서 와인을 사는 방법

"엄마 먹고 싶은 과자가 있어서 편의점에 갔다 올게요."

아들이 옷을 주섬주섬 입으면서 말했다. 나는 설거지를 하면서 그러라고 말했다. 마스크까지 야무지게 하고 아들은 현관을 나섰다. 나는 고무장갑을 잽싸게 벗고 넷플릭스를 켰다. 드디어 뒷이야기가 궁금했던 미드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미드는 다 좋은데 너무 길어서 이렇게 짬날 때 감질나게 보다가는 1년이 걸릴 것 같다. 그래도 빠져드는 스토리에 몰입해 있는데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현관문이 열렸다. 아들이 나간 지 10여 분 만에 돌아왔다. 나는 더 보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텔레비전을 껐다.


"엄마!"

아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들은 들어오지 않고 현관에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현관으로 가서 아들에게 말했다.

"아들 왜 안 들어와?"

"엄마 제 저금통에서 오만 원만 꺼내 주세요."

아들은 마치 오백 원만 꺼내 달라고 하는 것처럼 말했다. 오만 원이 얼마나 큰돈인지 모르는 걸까?

"오만 원? 과자 사러 갔던 거 아니야?"

"네 맞는데요. 음.... 사고 싶은 게 있는데 돈이 부족해서 다시 왔어요."

"잉? 무슨 과자가 오만 원이나 하는 거야?"

"아이 그게 아니고요. 과자가 아니고. 그냥 묻지 말고 주시면 안 돼요?"

아들은 마스크도 벗지 않고 초조하게 말했다. 아들 저금통에 있는 돈이니까 아들이 원하면 주는 것이 맞

지만 아무래도 오만 원은 너무 큰돈이다.

"돈을 갖다 줄 수는 있는데 어디에 쓸 건지 알려주면 좋겠는데."

"아 그냥 주세요. 꼭 필요해서 그래요."

"어디에 필요한지 알려주면 줄게."

"아 참! 서프라이즈 하고 싶었는데 엄마가 자꾸 그러니까 할 수 없겠네요. 오늘이 엄마 아빠 결혼기념일이잖아요. 그래서 선물 사려고 갔는데 생각보다 비싸서 돈 더 가지러 온 거예요."


역시 그랬다. 아들이 편의점에 가기 전에 오늘이 결혼기념일이죠?라고 물었던 것이 생각났다. 평소에 과자를 사겠다고 나간 적이 거의 없는 아들이 수상하기도 했다.

"아들 선물 안 해줘도 돼? 선물 사주고 싶은 마음으로도 엄마는 행복하다."

"아 엄마 그냥 주세요. 선물해주고 싶은 것도 내 마음이잖아요. 사실은 서프라이즈 하고 싶었는데 엄마가 계속 물어보고 돈 안 줘서 서프라이즈 못한 거니까 돈이라도 주세요."

"그래. 알았어. 그런데 도대체 무슨 선물이기에 그렇게 비싸?"

"엄마 제발 이렇게 됐지만 선물 종류까지는 서프라이즈 할 수 있게 해 주면 안 돼요?"

"그래도 너무 비싼데. 너 사고 싶은 거 있어도 잘 안 사면서 이렇게 돈 많이 써도 돼?"

"엄마 이럴 때 돈 안 쓰면 언제 써요? 이럴 때 쓰라고 아끼는 거죠."

엄마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선물은 아들이 쓴 편지라고 하면 예전에 아들은 손편지를 써줬다. 그런데 요즘 아들은 손편지는 뭔가 성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얼마 전 할머니 생신 때도 편지만으로는 부족하다고 기어이 선물을 샀다. 이제는 아들이 꼬꼬마가 아니구나. 엄마 아빠 말을 전부 그대로 믿는 나이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서운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다.


선물은 필요 없다고 무슨 선물인지 알려라도 달라고 내가 집요하게 물어보자 아들은 선물은 비밀이라고 그냥 모른 척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아들이 엉뚱한 물건에 돈을 쓰게 될까 봐 걱정이 돼서 계속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아들이 고른 선물은 뜻밖에도 와인이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결혼기념일은 와인이 중요하다고 했단다. 순간 웃음이 나왔다.

"아들 엄마 아빠는 와인 필요 없어. 그리고 너는 미성년자라 돈이 있어도 와인을 살 수가 없어."

"아~~"

아들은 깊은 탄식소리를 냈다. 미성년자는 술을 살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들이 아직 어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어린이는 술이나 담배를 살 수 없다는 것을 학교에서도 엄마 아빠한테도 배웠는데 그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자신이 마시려고 사는 것만 안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부족한 돈을 가져가도 와인을 살 수 없다는 사실에 마스크를 쓴 아들의 얼굴은 심각했다. 잠시 고민하던 아들이 다시 말했다.

"그럼 엄마가 같이 가서 와인을 사주면 안 돼요?"

"잉? 내가? 난 와인 필요 없는데."

"아 엄마 제발요?"

"정말 선물 안 줘도 돼. 엄마는 네가 그런 생각해준 것 만으로 고마워."

"혹시 엄마 와인이 필요 없어서가 아니라 그냥  밖에 나가기 귀찮은 거 아니에요? 좋아요. 그럼 할 수 없죠 뭐. 와인 대신 사탕 두 개로 결혼선물 받거나 아예 선물 못 받는 거죠 뭐."

아들은 자신의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상황에 화가 나서 두서없이 말했다.


순간 나는 팡 하고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아들이 심각하고 진지할 때, 더구나 이렇게 조금 화까지 나 있을 때 웃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데도 웃음이 자꾸 삐져나왔다.

"엄마 왜 웃어요? 나는 심각한데. 좋아요. 그럼 뭐 할 수 없죠. 엄마가 원해서 선물은 없는 거예요. 그리고 엄마 때문에 아빠도 선물 못 받게 되겠네요."

아들의 얼굴에 속상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아들이 이렇게 심각할수록 나는 더 웃음이 났다. 급기야 나는 자리를 피해야 했다. 일단 터진 웃음부터 진정하고 아들과 얘기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다시 돌아왔을 때 아들의 눈에 눈물이 글썽했다.

"아들 혹시 울어? 엄마 때문에 화나서 그래?"

"안 우는데요. 그냥 엄마가 조금 귀찮다고 내 부탁 안 들어주고 나는 심각한데 엄마는 웃으니까 화가 난 거예요. 우는 거 아니에요. 좋아요. 엄마는 내 선물도 싫고, 선물 사러 밖에 나가기도 싫다는 거네요. 알겠어요. 선물을 못 받는 건 엄마 탓이에요."

아들은 울먹울먹 터지는 울음을 꾹꾹 누르면서 말했다. 이렇게 심각한 아들 앞에서 나는 도저히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이건 뭐 내 결혼기념일 선물을 내 손으로 사러 가야 하는데 안 사러 간다고 아들이 화내고 협박까지 하다니. 이 와중에 아들은 12살임에도 지나치게 귀여웠다. 아들은 울음을, 나는 웃음을 참으면서 우리는 몇 초간 서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선물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아들이 이렇게까지 사주고 싶어 하는데 가서 손수 사서 받아야 할 것 같았다. 게다가 무슨 와인이 그렇게 비싼지 와인 값이 아깝다는 생각 때문에 가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는 아들과 편의점으로 갔다. 아들이 고른 와인은 선물세트로 포장된 것이었다. 두 개가 묶음으로 포장까지 된 것이었다. 포장지로 싸 있어서 무슨 와인인지 알기 어려웠다.

"아들 왜 이 와인을 사려고 했어?"

"비싸서 좋아 보이기도 하고 일단 포장이 돼 있어서 따로 포장 안 해도 될 것 같아서요."

"그렇구나. 그런데 아들! 아빠가 일 년에 술을 마시는 양이 한 컵이 안 되는 거 알지? 와인을 두병이나 살 필요가 없을 것 같아. 그리고 와인은 선물할 때 따로 포장 안 해도 괜찮은 몇 안 되는 선물이야."

나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 아들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병의 와인을 사는 것을 막기 위해 애썼다. 포장이 된 와인의 이름은 있었지만 맛이 어떤지 자세한 정보가 없었다. 게다가 남편은 정말 술을 거의 안 마시기 때문에 작년 겨울에 딴 스파클링 와인이 포도 주스가 되고 있었다.


"그래도 이걸로 사고 싶어요. 비싸면 더 좋겠죠."

아들은 엄마 아빠한테 좋은 선물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정말 정체모를 와인 두병이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아빠는 술을 잘 못 마셔서 쓴 와인은 잘 못 마셔. 그래서 와인에 대한 정보가 있는 것을 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여기 봐봐. 이 와인은 드라이하다고 써 있지. 이 와인은 아빠가 마시지 않을 거야. 그리고 이 와인은 스위트하다고 써 있지. 그나마 아빠는 단맛이 있는 와인은 조금 마시거든. 그런데 포장된 와인은 어떤 맛인지 알 수가 없어. 네가 비싸게 샀는데 받는 사람이 잘 못 마시면 아깝잖아. 스위트 중에서 고르자."


그렇게 해서 아들은 만원 조금 넘는 달다란 와인을 골랐다. 아들이 고른 와인을 내가 들고 아들이 자신의 지갑에서 당당하고 뿌듯하게 돈을 꺼내 계산했다. 편의점 사장님은 "오~ 아들이 사주는 거야. 오늘 무슨 날이야?"

라고 아들에게 물었다.

"오늘 엄마 아빠 결혼기념일이에요."

라고 말하는 아들의 목소리가 밝고 경쾌했다.

"와~ 아들 키울 맛 난다. 이렇게 멋진 아들이면 키울 맛 나지. 멋있다 아들!"

편의점 사장님이 나보다 더 감동해주셨다. 덕분에 아들의 기분은 더 좋아 보였고 어깨에 힘이 들어간 것 같았다.


와인 한 병을 품에 안고 편의점을 나온 아들은 기분이 좋아져서 재잘재잘 선물에 얽힌 이야기를 했다.

"사실 처음부터 과자 사러 간 게 아니고 엄마 아빠 선물 사러 간 거예요. 그런데 마땅히 살만한 게 없는 거예요. 미리 준비했다면 인터넷으로 주문했을 텐데. 그래서 급하게 편의점에 갔는데 반지 모양 사탕이 있는 거예요. 결혼기념일이니까 반지 모양 사탕도 괜찮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반지 모양 사탕을 사려고 했는데 천 원짜리라 너무 선물 같지 않아서 와인을 사기로 했어요. 결혼기념일에 와인 마시는 거 맞죠?"

아들이 사탕 어쩌고 하던 것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그런데 엄마는 어쩔 수 없지만 아빠한테는 비밀로 해 주시면 안 돼요? 아빠라도 서프라이즈 해야죠."

"그래. 알았어. 우리 둘이서 아빠를 완벽하게 속여서 두배로 행복하게 해 주자."


아들은 집에 올 때까지 신나서 떠들었다. 집에 도착하자 와인을 김치냉장고에 숨기고 아들은 다시 심각해졌다.

"아 케이크를 안 샀어요. 다시 사러 갈까요?"

"아니 괜찮아."

나는 다시 나가기 귀찮아서 말했다. 아들은 부엌을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했다. 와인에 곁들일 것을 찾는다고 했다. 에고 이번에도 내가 셀프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아들에게 에이스 과자와 키위를 이용해서 카나페를 만들자고 했다. 맛은 어떨지 모르지만 모양은 예뻤다.



아빠가 퇴근하자 아들은 누가 봐도 수상하게 굴었다. 아빠 샤워하고 밥 먹을 거예요? 밥 먹고 샤워할 거예요?라고 물었다. 게다가 샤워를 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냐고 묻기도 했다. 다행히 남편은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집에 오자마자 샤워하는 아빠한테 이렇게 묻는 아들의 티 나는 모습에 나는 웃음이 났다. 이렇게 티 나는 이벤트를 준비한 아들도, 그럼에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둔한 남편도 웃겼다.


아빠가 샤워를 하러 간 사이에 나와 아들은 와인과 카나페로 식탁을 차렸다. 샤워를 끝낸 아빠는 당연히 내가 준비했다고 생각했는지 크게 감동받지 않았다. 내가 와인도 카나페도 아들이 준비했다고 하자 남편은 그제야 진심으로 좋아했다. 아들이 쌈짓돈으로 사준 달다란 와인을 마신 남편은 와인 맛있다고 좋아했다. 처음으로 만든 에이스 키위 카나페도 맛있었다. 키위의 신맛이 에이스 때문에 부드러워졌다. 우리는 와인 한 모금에 카나페 한 조각, 또 와인 한 모금으로 성대한 결혼기념일 파티를 했다. 성공적인 선물에 아들도 만족한 것 같았다. 아들은 식탁에 앉지도 않고 폴짝폴짝 식탁 주변을 웃으면서 돌았다. 요즘 남편이 심란한 일이 많아서 조금은 차분하게 보낼 결혼기념일이 아들의 뜻밖의 선물로 어느 해보다 재미있고 감동적인 기념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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