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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

환갑반지와 결혼반지

by 아침엽서


환갑을 맞아 친구들과 요즘 유행하는 디자인의 반지를 맞췄다. 우린 만날 때 그 반지를 끼고 만나기로 했다. 매끈한 새 반지가 손가락에서 반짝였다. 오랜만에 반지를 끼어보니 오래 잊고 살아온 결혼반지가 불쑥 떠올랐다. 서랍 깊은 곳에서 꺼내 든 반지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세월의 색을 입고 있었다.


나는 원래 꾸미는 데 서툴고 액세서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귀를 뚫은 것도 늦었고, 유행을 좇아 장식을 더 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일할 때는 꾸밈보다 이른 출근이 더 즐거웠다.


결혼 때 받은 예물들도 그랬다. 결혼식 때쯤 몇 번 끼었을 뿐, 육아가 시작되자 자연스럽게 서랍으로 들어갔다. 특히 다이아몬드 반지는 봉긋 솟아오른 높이가 불편해서 더더욱 손이 가지 않았다. 그러다 친구들과의 기념 반지를 끼고 보니, 오래 묵힌 것들을 한 번 정리하고 싶어졌다. 짝을 잃은 귀걸이, 끊어진 목걸이, 유행 지나버린 결혼반지까지. 반지를 최신 디자인으로 바꾸면 다시 잘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금은방에서 새로운 반지 디자인을 고르며 결혼반지의 새로운 모습을 기대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자 묘하게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장롱에만 둘 바엔 잘 쓰는 게 낫지 않나.‘ '팔아버리는 것도 아니고 단지 디자인만 바꾸는 건데 뭐 어때?' 이리저리 설득해도 이상하게 가라앉지 않았다. 정말로 바꾸기 싫은 무언가가, 설명할 수 없는 무게로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며칠을 잠 못 이루며 망설이다 결국 다시 금은방으로 갔다. "반지를…, 녹일 수가 없어요. 취소할게요." 내 말을 들은 안주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어요. 가끔 그런 분들이 계세요." 그 말에 마음이 풀렸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에 위로도 되었다.


반지를 다시 손에 받는 순간, 오래된 금속 온도가 손끝에 선명하게 전해졌다. 촌스러운 모양 그대로인데도 이상하게 든든했다. 이건 단순한 반지가 아니었다. 의식하지 못했으나 결혼의 의식을 공유한 물성이었다.


다자인보다 더 중요한 세월이 쌓여있고 내가 부대끼며 지내온 시간이 은근히 스며든 작은 흔적이었다. 어쩌면 반지를 바꾸려던 마음은, 지나온 나를 지우고 새로 꾸며보고 싶은 충동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촌스러움 속에 내가 있었다. 지워지지 않는 시간과 오래된 약속 같은 것들과 함께.


나는 이제 이 반지를 녹이지 않을 것이다. 반지 안에 묻혀 있는 나의 시간을 그대로 간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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