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초보의 김장 도전기
11월은 김장의 계절이다. 가을 단풍에 취해 가을을 보내고 나니 김장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친정어머니께서 정성껏 담아주신 김치를 얻어먹었다. 어머니는 봄에 알싸한 마늘을 골라 사고, 가을이면 마른 고추를 사서 일일이 닦아 빻으셨다. 초겨울 생강 수확철엔 생강도 다듬어 준비했다. 일 년 동안 준비해 놓은 재료로 맛있게 김장을 하셨다. 평생 어머니 김치를 먹고 살아온 나는 어머니의 김치가 최고의 맛이었다. 해마다 엄마가 담아주신 김치는 막 도착했을 때는 곰국을 끓여 죽죽 찢어 걸쳐 먹었다. 맛있게 익으면 속을 탈탈 털어내고 만두를 만들었다. 넉넉히 만들어 냉동실에 쟁여 놓고 출출할 때 간식으로도 먹고, 식사 메뉴가 궁할 때는 떡을 넣어 떡만둣국을 해 먹었다. 여름이 오면 푹 익은 김치를 총총 썰어 넣은 냉국수가 별미였다. 가을에는 저렴한 등뼈를 듬뿍 사서 물에 살짝 씻은 김치를 넣은 등뼈감자탕을 한 솥 끓여 놓으면 고기보다 김치의 인기가 더 많았다.
재작년 겨울, 나의 퇴직을 앞두고 있었다. 이제 퇴직하면 어머니한테 가서 김치 담는 법을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다음 김장 때는 내가 가서 도와주겠다고 큰소리도 쳤다. 해마다 어머니는 기본이 50 포기, 많으면 100포기씩 담으셨다. 힘들다고 조금만 담으시라고 거들면 대답하는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어머니 담고 싶은 대로 하시라고 하면 기운이 살아나셨다. '너희 해줄 때 제일 행복하다'는 말씀도 빼놓지 않으셨다. 어머니가 행복하시다는 말씀에 나는 환갑이 넘도록 김치를 얻어먹었다. 이 말은 부끄럽지만 이 나이 먹도록 김치 담을 줄 모른다는 뜻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김치 만드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고, 나는 지난해 혼자서 김장에 도전했다. 생전 처음 김치를 담는 왕초보가 겁도 없이 마트에서 배추 10 포기를 샀다. 주위에서 비닐에 넣고 돌려주면 세상 편하다길래 커다란 비닐에 넣고 이쪽저쪽으로 돌리다가 비닐이 찢어졌다. 배추는 어느 정도 절여야 알맞은 지 짐작도 못하고 대강 꺼내 씻었다.
김장김치 담는 법을 검색하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홍갓은 짤막한 것이 좋다든지, 쪽파는 어느 정도 넣어야 하는지, 고춧가루는 몇 컵을 넣을지... 인플루언서들의 말을 토대로 나만의 레시피를 만들어 시장으로 갔다.
김장하러 나오신 분들은 모두 고수님들로 보였다. 고수님들이 사는 걸보고 따라 샀다. 친절하게 '이 갓이 좋네, 쪽파를 두 단은 넣어야 해. 많이 넣어야 맛있어' 알려주시는 대로 샀다.
제일 어려운 점은 역시 간을 맞추는 것이었다. 버무려 놓은 배추 속은 더할 나위 없이 맛있었는데, 배추 간이 덜 들었는지 익으면서 점점 더 싱거워져 갔다. 냉장고 없던 시절 간 맞추던 습관이 있어서인지 어머니의 김치는 짠맛이 강한 편이었다. 그럴 땐 어머니는 무를 사서 큼직하게 잘라 구석구석에 넣으라고 하셨다. 맛도 더 좋아지고, 간도 싱거워진다며. 내 입맛이 어머니에게 맞춰져서 그런 걸까?? 인플루언서들의 김치 레시피는 내겐 싱거웠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나는 올 김장은 더 잘할 자신이 있었다. 작년보다 새우젓과 소금을 더 넣고, 고춧가루도 더 넣을 계획을 세웠다. 작년 생배추 10 포기에서 올해는 절인 배추 40kg를 하기로 했다. 그 대신 두 번에 나누어서 하려고 따로따로 배달을 시켰다. 한꺼번에 40kg는 신체적 조건과 물리적 조건, 모두 무리였다.
미리 준비할 수 있는 김장 재료들은 미리미리 준비해서 냉동실에 넣었다. 전날 육수도 끓여 놓고, 홍갓과 쪽파, 다발무를 사러 재래시장으로 갔다. 올해 퇴직한 남편과 함께 시장을 보다가 충동구매로 총각무도 사버렸다. 오자마자 총각무로 김치를 담았다. 총각무는 작년에 몇 번 담았더니 이젠 제법 담는다.
절임 배추가 물이 빠지는 동안 양념을 만들었다. 미리 채를 치면 물이 나오니 다발무는 직전에 채를 쳐라는 조언도 있지 않았다. 빠진 재료가 있는지 여러 번 확인하고 내년을 위해서 레시피도 성실하게 적었다. 작년엔 무가 그렇게 빨리 숨이 죽는 줄 모르고 너무 수북하길래 준비해 놓은 무를 남겼었다. 작년을 경험 삼아 많다 싶어도 다 넣었더니 역시 그 많던 무가 빠르게 숨이 죽었다.
배추에 켜켜이 양념 속을 넣을 때는 식탁에 서서 했더니 한결 수월했다. 작년엔 어머니가 했던 모습을 상상하며 방바닥에 철퍼덕 앉아서 버무리고는 한동안 허리 통증으로 고생했는데, 올핸 허리 아프기도 전에 끝났다.
이제 한 번 더 김장이 남아있다. 절반이 끝났을 분이지만, 겨울이 오기 전 내 손으로 담은 김치를 보니 부자가 된 듯 뿌듯해졌다. 솔직히 내 김치의 맛은 사 먹는 김치보다 덜 맛있다. 그러나 세월의 힘을 믿는다. 이 한 걸음이 발판이 되어 내년에 더 나은 김치를 담을 수 있을 것이다. 조금씩 나아지리라는 믿음, 그리하여 어머니의 김치맛에 가까워지리라는 기대가 있기에 나는 김장이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