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으로 이어가는 묘연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시, <꽃>이다. 웬만한 사람들은 이 문구를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한 시다. 이름을 지어주는 데에서 이름을 짓는 이와 이름을 받는 이 사이에 생기는 끈끈함을 포착한 이 구절들을 나는 참 좋아한다.
고양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불렀을 때, 고양이들과 나의 관계가 더 가까워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작명에는 나름의 기준도 있었다. 최소 세 번 이상 마주치고, 그의 영역이 어디인지 알 것 같은 고양이들에게는 이름을 지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산책절이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 동네 공원에서는 세 마리의 고양이에게 이름을 붙여줬다. 산책 첫날 만났던 턱시도냥이, 그의 친구인 치즈냥이, 그리고 가장 최근에 만난 미니 턱시도냥이까지. (턱시도냥이와 신경전을 벌였던 고양이는 그 뒤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내게 가장 살갑게 구는 턱시도냥이는 '마를린'이라고 지었다. 사진을 보면 이유가 명백하다. 입가에 커다란 점이 그의 트레이드마크였고, 내가 그를 알아보는 방법이었다. 그 모습이 배우 마를린 먼로와 닮아 있어서 그 이름으로 굳었다. 이름을 붙여주던 날에도 마를린은 내 다리에 자신의 몸을 비비고 있었다. 나는 '마를린~마를린~'하며 계속 쓰다듬었다. 마를린은 기분이 좋은 듯 야옹야옹 나를 연이어 불렀다. 내 멋대로 이름이 맘에 들었다는 뜻이라 받아들였다.
실은 이날 제일 먼저 마주친 냥이는 치즈냥이, 곧 '먼로'가 될 친구였다. 마침 친구와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다.
"저 치즈냥이는 뭐라고 부를까?"
질문을 던진 후 친구와 나는 골똘히 생각했다 (그리고 신박한 이름을 떠올리는 데 실패했다). 그때 마침 마를린이 푸드덕대며 내 옆으로 왔다. 마를린을 마를린이라고 부르게 되자 그의 절친의 이름도 자동으로 정해졌다. 둘이 항상 붙어 있으니까 마를린과 먼로가 아주 딱이었다. 게다가 마를린은 명백히 여자애였고 (나와 있을 때 항상 꼬리를 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쉽게 식별을 할 수 있었다), 치즈냥이들의 70% 정도는 남자인 것으로 알려져 있기에 먼로 또한 남자애일 거라고 생각했다. 남자애에게는 마를린이란 이름보다는 먼로가 잘 어울렸다.
마를린과 먼로에게 간식을 주고 공원을 떠날 무렵, 미니 턱시도냥이가 나타났다. 여전히 경계 어린 표정으로 나를 주시했다. 그래도 아픈 줄 알았던 한쪽 눈이 나은 모양인지, 두 눈을 땡그랗게 뜨고 있었다. 아직 어린 고양이라서 그런 건지, 원래 털이 그런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이 친구는 항상 등의 털이 삐죽빼죽하게 서 있었다. 나는 아주 1차원적으로 이름을 붙여줬다. 고슴도치 같아서 '도치'라고 부르기로 했다. 도치의 이름을 불러주면서 간식을 놓아주고 멀리서 지켜봤다. 도치는 항상 내가 좀 멀찍이 떨어져 있을 때 비로소 간식을 향해 몸을 옮겼다.
고양이들이 자신의 이름을 알아듣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들에게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그들을 향한 나의 내적 친밀감은 더욱 솟아올랐다. 아침 산책 빼고 아무런 활동을 하지 못한 나의 생활에서 이들의 존재는 나의 유일한 낙이 되었다. 산책을 빠짐없이 다녔다. 개나리부터 시작해서 꽃이 슬슬 피고 있는 3월 말~4월 초의 아침이었다.
고양이들에게 이름을 붙여 부르자, 그들은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