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신우대

by 아이쿠


할아버지는 어부였습니다. 위험한 직업인만큼 바다로 나갈 때면 만선보다는 무사귀환을 더 간절히 바랐습니다. 할아버지가 바다에서 목숨을 걸고 고기를 잡는 동안 할머니 또한 조금의 논과 밭이라도 일구고자 애를 썼으나 형편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아빠는 어렸을 때 서당에서 자주 1등을 했는데 할머니에게 아들의 1등은 기쁜 소식이 아니었습니다. 떡이라도 돌려야 했지만 떡은 고사하고 감자 내놓기도 힘에 부치니 적당히 틀려 1등을 면하라는 말을 해야 했으니까요. 어차피 이렇게 나아지지 않는 살림일 바에야 안전한 농사일을 짓는 게 낫다고 생각하여 찾아온 곳이 지금의 나의 고향 산골입니다. 하지만 산골에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할아버지는 병을 얻어 경제활동이 불가능해졌습니다. 나이 50이 다 되어 낳은 막둥이를 키워내기 위해서라도 집안의 경제적 활동은 온전히 할머니가 책임져야 했습니다.


신우대.. 사람들은 대나무 밭을 보면 꼿꼿한 자태와 청량감을 떠올린다지만 나는 할머니가 떠오릅니다.

잠이 없던 할머니는 새벽 4시면 일어나 어두컴컴한 산을 혼자 올랐습니다. 하루를 남보다 더 일찍 시작했다는 뿌듯함으로 낫질을 반복했고 꼿꼿하게 베어진 신우대를 칡넝쿨로 단단히 묶어 머리에 인채 경사진 산길을 수없이 오르내려야 했습니다. 앙상한 작은 몸으로 무거운 짐을 감당하기에 역부족일 때는 이를 꽉 악물었으며 그래도 힘들면 "저 염병할 인간 때문에 내가 이 고생을 하네"라는 욕설로 할아버지를 원망했습니다.

힘든 노동과 암울한 현실을 잊기 위해 막걸리를 자주 마셨고 취기가 오르면 자신의 팔자를 독설로 풀어낼 때도 많았습니다. 술기운으로 한을 풀어낼 때도 평소 무언가 심각한 일을 마주할 때도 할머니는 언제나 이를 악물었으니 습관이 된 듯했습니다.


막둥이가 고등학생일 때 할머니 꿈에 검은 남자들이 나타나 이제 그만 같이 떠나자고 하자 할머니는 두려움보다 걱정이 앞섰다고 합니다. 어린 저 막내 놈 다 키워놓고 가야지 벌써 나를 찾아오면 어떡하냐고 악다구니를 썼다는 꿈 얘기를 하면서도 다시 한번 다짐을 하듯 이를 악물었습니다.

옆에서 듣던 아빠가 "엄니 대단하네. 저승사자도 내쫓아버리고."라고 농담을 할 정도로 할머니는 억척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 할머니의 얼굴은 미소와 여유보다는 주름과 근심이 섞여 고단한 삶을 대변하고 있었으니까요.


평생 일하는 게 몸에 배어서인지 자식들의 나아진 형편에도 몸을 쉬지 않았습니다.

"엄니. 남보기도 창피하니까 일은 이제 그만하세요"라고 말릴 때면 "사지가 멀쩡한데 나 하고 싶은 대로 둬라"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평생 지겹도록 해왔던 노동을 되풀이했습니다.

그랬던 할머니가 80세 중반을 넘어서자 조금씩 이상한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집을 못 찾아가는 경우가 많아졌고 집 앞 길에서 헤매는걸 아빠가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치매 초기였더군요.


신혼 초기 남편과 친정을 가는 날 동네 한쪽에 서있는 할머니를 발견한 적도 있습니다.

"할머니 왜 여기 서있어?"

할머니는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고서야 알아보더군요.

"집에 가려는데 집이 어딘지를 모르겠다"

그토록 억척스러웠던 할머니는 온데간데없고 그저 두려운 눈빛으로 갈길을 기억하려 애쓰며 힘이 빠진 처진 입꼬리로 집이라는 말을 중얼거렸습니다.


그로부터 몇 달이 안되어 할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당시 나는 출산한 지 갓 백일이 지날 때라 할머니의 죽음을 슬퍼하고 애도하기보다는 백일밖에 안 된 아이를 장례식장에 데려가도 되는지가 걱정이었습니다. 그만큼 나와 할머니 사이에 다정한 추억은 없었습니다.

할머니가 불쌍하면서도 이를 악무는 모습이 인생을 독하게 사는 것만 같아 보기 싫었거든요.

장례식 이후, 할머니를 추억할 여유도 없이 할머니의 존재를 잊어갔습니다.


하지만 친정 부모님은 달랐습니다. 가끔 할머니를 회상하는 엄마에게 "할머니 성격이 너무 했어"라고 말을 하면 "그런 소리 말어라. 표현할 줄을 몰라서 그렇지 자식을 끔찍이 한분이다."라는 대답으로 내 입을 다물게 했습니다.

하루는 아빠가 할아버지 할머니 사진을 보고 있길래 장난을 걸어보았습니다.

"아빠는 할아버지랑 할머니 중 누가 더 보고 싶어?"

"할머니"

내 예상과 다른 아빠의 답변에 이유를 묻게 되더군요.

"왜? 아빠 할머니랑 자주 다투고 서운해하고 그랬잖아"

"사람이 아니라 사는 환경이 나빴지. 나이가 드니 이해가 되고 할머니가 꿈에라도 나왔으면 좋겠다."

할머니 그리워하며 사진을 한참 바라보는 아빠의 모습이 쓸쓸했습니다.


올해 봄 남편이 여수에 놀러 가자고 하더군요. 여수 하면 꼭 들른다는 오동도는 듣던 대로 동백나무 천지였습니다. 바다 위에 마련된 산책로와 봄을 알리는 동백꽃은 신선한 공기를 내뿜으며 걷는 이를 기분 좋게 하더군요. 모두가 그런 동백꽃을 보며 감탄할 때 내 발걸음이 멈춰진 곳은 산책로 정상 한쪽의 신우대 밭이었습니다.


(오동도 정상의 신우대)



나도 모르게 멈춰진 내 발걸음 따라 자연스럽게 할머니가 떠올랐습니다.

할머니가 일 욕심에 새벽이면 제일 먼저 신우대를 찾아 산을 올랐는데 여기 이렇게 많은 걸 보면 "오메 오지다" 하고 낫질을 했겠네. 난 오동도에서 동백꽃이 아닌 신우대를 보며 감탄이 절로 나오더군요.


그리고 할머니와의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할머니 귀지를 조심조심 파 주었던 날. 손발톱을 잘라드렸던 날. 할머니 기분을 맞추려 좋아하던 새콤한 음식을 사 갔던 그날이. 할머니가 잔치집에서 맛난 것을 안 드시고 날 위해 싸왔던 그날이.

"요년 요거 김 씨 아니랄까 봐 보통 아니네" 라며 칭찬했던 말들이 떠올랐습니다.


신우대 밭을 본 그날 진심으로 내 마음에서 할머니가 살아나는 걸 느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가 짊어졌을 삶의 무게가 느껴지더군요. 그 무게를 가볍게 했을 막걸리와 독설, 할머니의 이를 악문 모습이 오히려 고마웠습니다. 그렇게라도 버텨온 세월에 경의를 표해야 했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10년이 지난 지금에야 진정으로 슬프고 애도하는 마음이 듭니다.


할머니. 이제는 신우대 안 베고 무거운 짐 머리에 이지 않아서 편한가요?

그곳에서는 막걸리 마시고 독설이 아닌 즐거운 노래를 부르길 바랍니다.

이 악물지 말고 온화한 미소 짓기를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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