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30년 전이었어요..
시골에서 이사온지 얼마 안 되어
엄마 아빠도 저도 모두가 힘겹게 도시생활에
적응하는 중이었지요..
그날은 제 생일을 하루 앞둔 날이었어요..
시골이었다면 기대도 안 했을 테지만
여기저기 가게들이 넘쳐나는 도시에 살고 있으니
솟구치는 물욕을 해소할 좋은 기회잖아요.
이제 열세 살 아가씨인데 갖고 싶은 게
얼마나 많겠어요~~
"엄마!! 나 내일 생일인 거 알지??
이따 학교 갔다 오면 선물 사줘야 해!!"
"생일?? 돈이 어딨다고 그런 말을 하냐?
이번엔 그냥 넘어 가자"
"싫어!! 맨날 그냥 넘어 가재!! 선물 사줘!!
다른 친구들은 생일파티도 하는데!!"
대충 넘어가려던 엄마였지만 빙의된 듯 희번덕거리는
나의 눈깔에 엄마도 모르게 실언을 했어요..
"그래.. 이따 학교 끝나고 사러 가자"
엄마의 긍정적인 대답에 튕겨나갔던 눈알을
제자리에 장착한 저는 기분 좋게 집을 나섰어요...
아직 학교도 친구들도 낯설어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콧노래가 절로 나와요..
게다가 어제 비가 많이 와서인지 하늘도 쾌청한 것이
정말이지 오랜만에 느끼는 상쾌한 기분이에요..
학교 앞 골목길 한쪽에 큰 차를 세워놓고 물을 푸고 있어요..
어제 비가 많이 와 주택 지하가 잠겼었나 봐요..
작업에 방해가 되지 않게 옆으로 살짝 비켜 걸으려던 찰나에
갑자기 샤워하는 기분이 들어요...
지하에서 뽑아 올린 그 물이 제 몸을 흠뻑 적시고 있어요!!
정말이지 오랜만에 느끼는 더런 기분이에요.
화가 나서 따지고도 싶지만... 부끄러움이 먼저예요..
한쪽에 서서 흠뻑 젖은 물을 짜고 또 짜내어도
더러운 물이 다리를 타고 흘러내려요... 냄새는 덤이에요.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을까 생각했지만
더 지체했다가는 학교에 늦을 것 같아요..
이래 봬도 공부 못하지만 모범생이라 지각은 상상할 수 없어요!!
동물들 영역 표시하듯 걷는 걸음마다 물방울 뚝뚝 흘리며
이 구역 미친 X은 나라는 영역표시를 해요..
평소엔 존재감도 없던 전학생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인기스타.... 가 아니라 비호감까지 더했어요..
괜찮아요.. 내일은 내 생일이고 오늘은 선물을
살 거니깐요. 이 정도 굴욕은 참을 수 있어요.
"어 왔어?? 엄마가 오늘 우리 딸 위해 선물을 샀지~~"
"진짜?? 진짜?? "
이게 웬일이래요. 엄마가 미리 선물을 사놨대요.
"이것 봐! 진짜 좋지?? 수박이 이제 나오기 시작해서
얼마나 비싼지.. 그래도 우리 딸 위해서 제일 큰 것 사 왔다"
엄마가 수박을 쓰다듬으며 만족스럽게 말해요...
기가 막혀요..
"이게 뭐야?? 난 수박 싫어하는데 생일 선물이 수박이라는 게 말이 돼?
엄마가 먹고 싶어서 샀지?? 뚱뚱한 엄마나 실컷 먹고 더 뚱뚱해져! 난 안 먹어"
나도 엄마 따라 실언을 해요..
엄마는 이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 웃으며 날 달래 보아요...
하지만 아침부터 쌓였던 화가 폭발한 것인지
낯선 도시생활이 힘들었던 것인지
엄마에게 철없는 막말들이 끝없이 쏟아져요.
듣고 있던 엄마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며 인내심의 한계를 느껴요.
조금만 더 하면 저 세상 갈 것 같아 멈춰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한번 시작한 모진 말은 끝을 모르고 기어 나와요...
아주 아가리 파이터 납시었어요.
그리고 결국 난 넘지 말아야 했을 선을 넘고 말았어요.....
그 엄마의 그 딸인지 그 딸에 그 엄마인지 모르겠으나
이번엔 엄마가 빙의된 듯 눈이 희번덕거리더니 갑자기
방문을 잠가요...
"주둥이 함부로 놀리면 어떻게 되는지 오늘 알려주마!!"
선전포고와 함께 비상시를 대비해 상시 챙겨두었던
회초리를 집어 들어요....
여기가 오늘 내가 죽을 자리라는 게 느껴져요...
우리 엄마로 말할 것 같으면 한없이 인자하고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지만
한번 화가 나면 앞뒤, 옆이 없는 사람으로 그냥 직진이에요.
외모는 어떻고요... 소도 때려잡을 원조 오랑캐예요...
그런 엄마를 향해 내가 지금 호루라기 불며 내게로
오라이~~ 오라이~~ 손짓한 거지요.
아주 스페인 투우사 납시었어요.
갑자기 쓰러져버릴까... 고민도 하기 전에
엄마의 사정없는 매질이 시작되었어요.
아직 마르지 않은 옷 덕분에 회초리가 온몸에 착착 감겨요.
창문을 열고 도망치기에는 내 몸집이 거대하고
방문을 열고 도망치기에는 엄마 몸집이 거대하니
엄마의 매질 한 번에 자동으로 밥알 위의 파리처럼
손을 비비고 비비며 잘못을 고해 보아요...
엄마... 아니 어머니...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
살고자 모든 인맥 총동해도 부질없더니
지옥을 몇 번 오가고서야 엄마의 매질이 멈췄어요...
엄마는.... 진정한 파이터였어요...
"잘못했어요... 흐흐... 수박 흐흐 먹을게요..
맛... 있... 게... 흐흐.. 잘.. 먹.. 을.. 게요.. 흐흐흐"
평소 쓰지도 않는 존댓말을 써가며 엄마를 달래려 용을 써요..
눈물의 수박... 아니 살아 있어 수박을 먹고 있음에 감사했어요...
눈물 젖은 케이크.. 아니 그냥 살아있음에 모든 게 감사한 날이었어요...
그 이후로 엄마에게 매를 맞은 적이 없어요..
목숨을 담보로 한 선 넘을 짓 안했.. 아니 못했거든요...
그래서인지 지금도 정지선, 주차선마저
잘 지키고 살고 있어요!
그런데 요즘 자꾸 선을 넘고 싶어 져요.
5학년 아들이 저를 닮았나 봐요.
슬슬 아가리 파이터가 되려는 조짐이 보여요.
나도 울 엄마처럼 눈을 희번덕거리며
오랑캐에 빙의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아들에게 몸소 교훈을 줘야 하나 잠시 고민해요.
시대가 다르니 참아야지요.
저도 슬슬 음악에 몸을 맡긴 채
걸으며 해탈할 준비를 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