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코로나로 주춤했던 학교 대외 활동이 다시 시작되는 요즘입니다. 담임선생님과의 학부모 상담이 끝나자마자 체험활동과 부모 참여 수업이 줄줄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어요. 첫 행사는 큰 아이의 체험학습입니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단체로 버스를 타고 야외로 나간다는 설렘에 아이는 며칠 전부터 D-day를 기다리며 간식, 음료를 준비하며 좋아했어요.
"엄마 도시락은 뭐로 싸줄 거야?"
"당연히 김밥이지"
아이가 유치원 다닐 때부터 모든 야외 활동 도시락 메뉴는 김밥입니다. 요리를 잘 못하는 제가 자신 있는 음식 중 하나이고 소풍=김밥이 국롤이니까요. 저도 아이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전날 모든 재료 준비를 마쳤습니다. 통 단무지를 큼직하게 썰고 당근을 채 쳐서 소금 간 해서 볶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햄과 어묵, 계란도 크게 썰어 정리해 두었으니,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밥만 하면 되었습니다.
당일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압력밥솥에 쌀을 씻었어요. 이 중요한 날 왜 전기밥솥에 밥을 하지 않고 굳이 모험하느냐고요? 전기밥솥이 고장 났는데 구매를 미루고 있었거든요. 압력밥솥은 아직 서툴러 물 조절을 맞추기 어렵습니다만 냄비 밥보다는 밥 짓기가 수월해 보였습니다. 집 김밥을 좋아하는 남편과 이웃들을 위해 스무 줄을 싸려니 평소보다 많은 양의 밥을 해야 했고 밥물량을 맞추기는 평소보다 더 어렵더군요. 결국, 물 조절 실패로 밥은 질다 못해 조금만 더 비비면 떡이 될 기세였습니다. 참기름과 소금을 넣고 팍팍 섞어 고소한 냄새가 진동해야 하는데 자꾸 비비다 보면 가래떡이 될까 봐 소심하고 세심하게 살살 다루니 간이 제대로 되지 않아 싱거웠습니다. 게다가 밋밋한 색의 재료들 틈에 푸르른 시금치를 넣어줘야 색감도 예쁘고 달큼한 맛도 나는데 요즘 시금치가 비싸다는 이유로 과감하게 생략했지요.
완벽한 준비는커녕 부족한 준비로 김밥은 점점 망해가고 있었습니다. 예상대로 망해버린 김밥에 속상했지만 큰 아이는 무덤덤한 성격이니 크게 개의치 않을 것입니다. 음식이란 모양보다는 맛이고, 맛보다는 정성 아니겠습니까? 아이는 행복한 하루를 보낼 것이라 믿습니다. 아니 믿고 싶습니다. 샤인머스캣 몇 알을 넣어 부족한 솜씨를 감추었습니다.
체험학습을 다녀온 아이는 놀이터에 모인 동생들에게 직접 만든 쿠키와 피자를 나눠주며 세상 뿌듯해했어요. 모두가 맛있다고 칭찬을 하자 쑥스럽게 웃는 아이를 보며 망한 도시락 따위는 너의 행복을 방해하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아이가 만든 쿠키 한입에 저도 기분이 좋아지는 오후였지요.
한데 저녁 설거지를 하려 아이의 도시락 뚜껑을 열어 보고는 당황했습니다. 반도 먹지 않고 남겨진 김밥들이 풀어헤쳐져 나뒹굴고 있었거든요.
"아들아. 김밥이 그렇게도 맛이 없었어? 거의 안 먹었네?"
"맛은 그럭저럭 괜찮았어."
"그래? 근데 왜 안 먹고 이렇게 다 남겨왔어? 친구들하고 나눠 먹지 그랬어?"
"엄마. 요즘에 소풍이라고 김밥 싸는 애들 별로 없어. 친구들에게 더 맛있어서 그냥 친구들 거 같이 먹었어" "친구들은 뭐 싸 왔는데?"
"베이컨 말이나 유부초밥, 주먹밥도 싸 오고 하여튼 김밥은 별로 없는데 나만 김밥이라 조금 창피하기도 했어. 집에서 먹는 김밥은 맛있는데 체험학습까지는 아닌 것 같아."
아니 소풍날 김밥을 안 싼다고? 어렸을 때 소풍날 아침이면 새벽 일찍 일어나 김밥을 싸는 엄마 옆에 꼭 붙어 앉아 꽁지 하나 집어 먹던 그 맛을 어떻게 잊을까요. 엄마 몰래 분홍 소시지 한 줄 먹으려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 냉큼 집어 먹던 그 기억을요. 김밥을 싸는 내내 풍기는 고소한 참기름과 깨 냄새에 소풍을 가기도 전에 행복했습니다. 어릴 적 느꼈던 나의 행복을, 그 추억을 아이와 공유하고 싶었는데 아마도 실패한 듯합니다.
아무래도 요즘은 김밥이 흔해서 소풍=김밥의 의미가 없나 보다 스스로 위로해 보지만 어쩐지 굉장히 서운한 마음이 들더군요. 그런 제 마음도 모르고 이 상황을 지켜보던 둘째가 말합니다.
"엄마. 다음 주나 체험학습 갈 때는 김밥 말고 베이컨 말이 해줘. 유부초밥이나"
창피했다는 형의 말에 둘째는 그 상황을 피해 가고 싶었나 봅니다.
"그래…."
대답은 하면서도 또 서운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래저래 이번 김밥은 폭망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