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엄마가 오늘 처음으로 너에게 진심을 담은 장문의 편지를 쓰니 진중하게 읽고 가슴에 새겼으면 좋겠구나.
지금은 엄마와 덩치가 비슷한 너이지만 11년 전의 너는 10개월을 다 채웠음에도 2.58kg으로 참 작게 태어났어. 손수건 한 장으로 너의 몸을 덮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 출산의 기쁨보다는 육아의 걱정이 먼저였지.
하지만 작은 몸만큼이나 작은 손가락으로 엄마 손가락 하나를 붙잡고 엄마를 바라볼 때면 책에서나 보던 생명의 신비라는 단어가 엄마의 머리와 가슴에 새겨지는 기분이 들었지.
옛말에 작게 낳아서 크게 키우라고 했는데 엄마가 그 명언의 산 증인이야. 태어나자마자 참으로 놀라운 속도로 성장하니 육아의 기쁨을 맛보았다 말할 수 있겠구나.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너에게 느끼는 감정을 모성애라고 정의하기에는 좀 일렀다 쳐도 엄마는 널 지켜주고 많이 사랑하고 싶었어. 육아의 직접 경험은 물론 간접경험도 없었던 엄마는 그저 널 울리지 않은 게 너에 대한 최고의 사랑이라 생각했지. 그래서 너의 편안한 낮잠을 위해 엄마 등은 항상 너의 침대가 되어야 했고 깊은 저녁잠을 재우기 위해서는 널 안고 내가 아는 모든 동요와 가요를 자장가로 불러야 했어. 노래를 부르기 지치는 날에는 드라이기를 틀어 백색소음으로 너를 재운적도 여러 번이었지.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너의 동생에게는 이런 정성을 쏟지 않은 걸로 보아 육아 노하우가 없던 엄마가 완전 생으로 널 키웠던 거지. 점점 말라 가는 엄마의 몸뚱이가 육아는 극강의 매운맛이란 걸 말해주고 있었거든.
나의 달콤한 잠과 피폐한 정신을 밑천 삼아 사람의 모양새를 갖추고 어린이집에 처음 등원하는 날 너의 성장에 감동의 눈물이 고였단다. 나의 임무를 어느 정도 완성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 그리고 드디어 자유를 얻었다는 감격의 눈물도 나오더구나. 이제 네가 태어나기 전 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했거든. 한데 나의 생각과 달리 원장 선생님은 냉정하게 말씀하시더라. 너는 아직 사람이 아니라고. 유아는 사람의 모습을 한 동물이라고. 완전한 사람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고. 그러니 더 많이 안아주고 사랑하라고 했지. 충격적인 조언에 우주로 흩어지는 나의 정신을 간신히 붙잡았단다.
하지만 어쩌겠니? 내가 사람을 낳았으니 사람으로 완성시켜야 할 의무가 있는걸. 우주의 기운을 다시 모아 포용력으로 널 감싸 안았고 근엄함으로 널 훈육했어. 유아기를 지나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나의 바람대로 너는 점점 더 사람에 가까워지는 생각을 하고 행동에 옮기더라.
그런 너의 모습을 볼 때마다 이젠 엄마도 사람의 모습을 갖출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또다시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감추기 힘들었지.
그런데 말이야. 분명 사람의 모습에 가까워지던 너는 완성이 채 되기도 전에 다른 생명체로 변하는 듯 하구나. 우주의 기운을 모아 키운탓인지 외계인이 되려는 너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스러워. 너와 내가 사람답게 산 세월이 참으로 짧았다는 생각에 슬퍼지고 말이야. 어서 이 혼란의 시간이 지나 우주로 흩어진 너의 정신이 다시 지구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단다.
그러니 네가 완전한 지. 구. 인. 이 될 때를 대비해 엄마가 약간의 조언을 해볼까 해. 지구에서 사람으로 살려면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들이 좀 있거든. 그리고 그 출발은 가정에서부터니까.
지금부터 잘 알려줄 테니 여기서부터는 둘째 너도 잘 들어야 해. 아니 아빠도 같이 들어야 해. 사실 지난 십 년 동안 수없이 가르쳐준 것들이라 복습에 가까운데 너희는 언제나 그랬듯 완전 새로운 내용일지도 모르겠다.
옷을 벗은 후에는 빨래 바구니에 양말 속옷 겉옷을 구분해 넣으라고 구천구백번은 알려준 것 같은데 너의 머릿속엔 매번 탈의까지만 들어간 것 같더라. 하지만 탈의도 아닌 탈피를 한 너의 만행을 어쩌면 좋니. 곤충들처럼 네가 머물렀던 곳곳마다 허물들이 자리를 지키니 볼 때마다 엄마가 집이 아닌 자연 한복판에 서 있는 낯선 기분이 들어. 엄마는 허물을 수집하는 취미는 없으니 다시 한번 부탁할게. 탈의 후 빨래통에 분리해서 넣으렴.
자정이 되어서야 퇴근하는 날이면 어린 너희를 잘 챙기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마음이 무거울 때가 있어. 저녁은 잘 먹었는지 숙제는 잘했는지 몸은 깨끗이 씻었는지 모든 게 걱정이 되거든. 아빠와 함께인걸 알면서도 왜 불안한지는 엄마도 모르겠어. 하지만 경쾌한 너희의 행동은 엄마의 불안한 마음과 대비되어 위로가 되지. 간식으로 뿌셔뿌셔를 먹었다고 거실에 굴러다니는 과자 봉지가 알려주더구나. 숙제는 하다 만 그대로 책상에 펼쳐져 있으니 내일 너의 수업이 조금은 염려된단다. 요즘 너의 동생은 장검에 빠져서 시간만 나면 그림으로 그리곤 하지. 이렇게 멋진 검을 그리고 왜 저렇게 내팽개쳐둘까? 살 때는 그토록 소중했던 인형들이 집에만 오면 쓰레기로 변하는 마법에 엄마는 이번에도 속았구나.
제대로 씻었는지 모르겠지만 다행히 일단은 샤워라는 행위를 했다는 결과물인 젖은 수건이 너희가 멈춰 섰을 그 어딘가에 널브러져 있지. 물론 아빠 것도 말이야. 오늘도 아빠와 함께 잘 지냈다는 안도감도 잠시 함께 치밀어 오르는 화는 어찌해야 할지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단다.
바삭바삭하고 짭조름한 조미김을 밥에 싸 먹으면 올매나 맛나는지 엄마도 알지. 단짠단짠 갈비를 한입 뜯으면 잔치집에 와있는 기분이라는 거 엄마도 잘 알아. 하지만 먹을수록 너의 손 또한 단짠단짠 짭조름 기름지니 휴지에 닦으라고 구천구백구십 번을 얘기했을 거야. 그러나 너는 휴지를 뜯을 새도 없이 옷에다 손가락을 비벼대고 있지. 헌 옷인지 어제 새로 산 새 옷인지 검은색 옷인지 흰색옷인지는 중요하지 않구나. 너에게 지금 입고 있는 옷은 그저 휴지에 불과하니까. 다시 말할게. 휴지 혹은 화장지라 불리는 하얀 종이에 닦으렴. 아 그 손을 닦은 휴지는 쓰레기통에 꼭 버리고!
그리고 말이야. 볼일을 볼 때는 변기커버를 올리라고 수없이 말했지만 오늘도 지켜지는 법이 없구나. 그래 그럴 수 있어. 근데 적어도 물은 내려야 하지 않을까? 이것도 또 까먹은 거니? 정말로 그런 거라면 너의 뇌는 연구 가치가 굉장히 높은 것 같아. 엄마가 굉장한 물건을 하나 낳았구나.
분명 연락을 위해 스마트폰이 꼭 필요하다고 했던 너였지만 게임할 때 외에는 너와 연락할 수가 없구나.
왜 핸드폰이 버젓이 있는 네가 아닌 친구 엄마들을 통해서 너의 행방을 알아야 할까? 너는 왜 이모들의 핸드폰으로 엄마에게 전화를 하는 걸까? 너의 핸드폰은 그저 외계 행성의 신분증인거니? 그래서 여기에서는 필요 없는 거니? 그래 그렇다 쳐도 오는 전화는 좀 받아주렴.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건 정말 진짜 아주 가장 중요한 부탁이야. 엄마의 소원에 가까우니 너희들이 꼭 좀 들어줬으면 좋겠다. 아니 명령이다. 너희! 이제 그만 싸우자. 너희 싸우는 소리 들릴 때마다 엄마의 심장이 요동쳐서 힘들거든. 양보, 배려, 매너, 입장 바꿔 생각하기, 한번 더 생각해보기. 모든 해결책을 알려줬지만 해결이 안 되는 걸 보니 너희는 전생에 원수가 아니었을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든단다. 원수라도 이만큼 싸웠으면 지칠 법도 한데. 매번 엄마가 먼저 나가떨어지는구나. 눈만 마주쳐도 싸우는 야만스러운 행동은 이제 그만하자.
엄마의 이 잘잘한 부탁에 너희는 웃을지도 모르겠구나. 엄마도 헛웃음이 나온단다. 그럼에도 부탁할게!
아빠도 계속 같이 읽고 있는 거지? 이 작은 부탁을 앞으로도 모른 척한다면 이번엔 엄마가 니 핸드폰 들고 우주로 뛰쳐나갈지도 몰라. 그럼 변화될 너희를 기대할게.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