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터 J.S

슬기로운 놀이터 생활을 위한 백과사전?

by 아이쿠


저희 아이들은 놀이터 죽돌이입니다.

몇 년째 아이들 곁에서 지켜본 놀이터는 제 생각보다 더 무법천지였습니다.

보호자를 동반한 어린아이들은 순한 언어로 양보하며 배려하니 슬기로운 놀이터 생활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학년이 높아질수록 백과사전이 백지사전이 되는 기적이 종종 목격되니 지켜보는 다른 이들을 많이 불편하게 하지요.


자전거를 타고 지나던 아이들이 딱지 치는 저희 아이들을 발견하고 우르르 몰려오더니 타고 온 자전거를 그대로 땅바닥에 던져놓고는 바로 딱지치기에 합류합니다.

아이들 뒤로 내팽개쳐진 자전거가 사람들의 통행을 방해합니다.

"애들아. 자전거 한쪽에 세워두자."

다행히 바로 일어나 자전거를 한쪽에 일렬 주차하니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그래. 아주 잘했어"


딱지를 치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한 아이가 욕을 시작하니 금세 너도나도 욕 배틀로 이어집니다.

"아씨 열여덟!! 이런 새끼개"

"아이 18"

숫자 18이 이토록 사랑받는 숫자였는지 미처 몰랐습니다. 놀이터마다 울려퍼지니말이죠.

이 비범한 아이들을 바라보는 주변 엄마들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습니다.

문제는 저 무리에 지금 저희 아이들이 함께 있으니 재빨리 출동해야지요.

욕으로 리듬을 타는 친구에게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습니다.

"친구야 욕하지 마. 자꾸 욕하면 사람들이 너를 오해해. 이미지 관리 하자"

"네."

대답은 잘합니다. 하지만 뒤돌아서자마자 다시 들려오는 "야 이 크레이지 베이비야" 외침에 저도 마음속 큰 소리로 응답합니다.'야 이 썩을 놈아. 욕 좀 그만하라고'

애들만 뭐라 할 게 아니네요.


이번엔 한 아이가 갑자기 일어나 쌍절곤을 꺼내들더니 사정없이 휘두릅니다.

이소룡 뒤를 이을 삼소룡이 되겠다며 요즘 열심히 연마 중이라는데 삼소룡답게 화려한 손놀림에 감탄이 아닌 오싹한 공포를 느낍니다.

"친구야. 쌍절곤 휘두르다 잘못되면 너 삼소룡 되기 전에 친구 어머님에게 무릎부터 꿇어야 할지 몰라. 그러니 사람 없는 저 끝으로 가서 연마하렴."

삼소룡은 유배형에 처해졌습니다. 아이는 몇 번의 연습 끝에 감을 잡았나 봅니다. 중원 진출을 위해 또다시 화려한 손놀림으로 한 발짝 한 발짝 걸어 나오니 다시 익숙한 공포를 느낍니다.

"어이 삼소룡!! 다시 뒤로 가!!" 재차 유배형에 처합니다.


몇 번 큰 소리를 지른 탓에 목이 탑니다. 아이들도 목이 타는지 너도 나도 물과 음료를 꺼내 벌컥벌컥 마십니다. "캬" 소리를 내며 함박웃음을 지으니 보는 저도 흐뭇한 순간이지요.

헌데 한 아이가 다 마신 빈병을 미련 없이 땅바닥에 내동댕이 치니 제 한 몸 희생한 빈병들의 마지막을 잘 거두어야 할 의무감을 느낍니다.

"친구야 네가 버린 물병 주워서 저기 쓰레기통에 버려라. 줍는 김에 옆에 과자봉지도 줍고."

쓰레기 함부로 버린 자는 사회봉사형입니다.


숨좀 돌리려 하니 딱지치기에 정신없던 아이들끼리 고성을 지르니 험악한 분위기입니다.

돈.. 아니 딱지 앞에서는 친구도 없는지 네가 반칙을 했다느니 나를 속였다느니 싸우기 시작하는데 이건 현실판 타짜가 따로 없습니다.

'이놈의 자식들. 손모가지를 확 그냥!!' 잠시 아귀에 빙의 되는 순간입니다.

"애들아 반칙 쓰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해. 남자답게!!"

지칠 대로 지친 저는 이젠 일어설 힘도 없어 앉아서 고래고래 소리칩니다.

'지겹다 이놈들아. 언제 철들래? 내가 언제쯤 이 놀이터를 탈출할 수 있을까?'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지친 저를 향해 한 여자 아이가 다가옵니다. 앙증맞은 모습이 1학년인 것 같습니다.

"아줌마"

"응?"

"저 오빠가 아줌마 아들이에요?"

아이의 손끝이 새끼개를 그리도 찾던 아이를 가르킵니다.

"아니"

"근데 왜 자꾸 저 오빠들 혼내고 참견해요?"

"어?? 잘못했으니까..."

"아~" 짧은 대답을 한 아이는 제자리로 돌아가 흔들말을 마저 탑니다.


앙증맞은 아이의 깜찍한 질문에 전 조금 당황했습니다.

적어도 놀이터 J.S(지킴이 선생님)쯤은 된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아이들 눈에는 그냥 놀이터 J.S(진상)이었을지 모를 일입니다.

그동안 놀이터 대장 노릇의 명분도 의무도 사라져 버린 것 같아 머쓱해졌습니다.

드디어 놀이터 탈출 성공에 홀가분할 줄 알았는데 섭섭한 마음과 함께 뭔지 모를 미련이 남습니다.


복잡한 마음으로 아이들과 집으로 가려는데 절 당황시켰던 여자아이가 딱지 치던 오빠들과 술래잡기를 시작합니다. 한데 오빠들의 행동이 술래잡기인지 약 올리기인지 모를 경계를 오가니 또 눈에 거슬립니다.

여자아이에게 다가가 "아는 오빠들이니?" 물으니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럼에도 또 한 번 나서야 하나 고민이 되었지만 제자신도 지킴이인지 진상인지 모를 경계에 서 있는터라 그냥 뒤돌아섰습니다. 조금 전까진 나만의 확신이 있었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모호해진 기분이라서요.

구분과 경계가 모호한 아이들의 세계와 확실한 기준이 필요한 어른의 역할 사이에서 내가 지켜야 할 선이 무엇인지 고민을 좀 더 해봐야겠습니다. 일단, 놀이터 오지라퍼는 그만두는 걸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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