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를 읽었구나....

by 아이쿠

얼마 전이었습니다.

큰 아이가 학원을 마치는 시간에 맞춰 밥상을 차렸습니다.

조카까지 초대해 이것저것 차리느라 먹거리가 제법 풍성한 저녁이었지요.


기분 좋게 식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엄마, 나 물 한 컵만"

첫째가 절 도발하더군요.


"물은 니가 떠먹을 수 있잖아"

매일 겪는 일이니 이 정도쯤은 고성 없이 우아하게 받아칠 수 있었지요.


"그래도 엄마가 떠주면 안 돼?"

"다 같이 밥을 먹는데 자꾸 엄마 시키면 엄마는 언제 밥을 먹겠니? 니가 떠먹어"

첫째가 날 닮아 게으르구나를 깨닫는 순간이었지요.


움직이기 귀찮은 건지 아직은 참을만한 것인지 엉덩이 무겁게 식사를 이어가던 첫째가 이번엔 젓가락을 떨어뜨렸습니다.

"엄마 나 젓가락 좀..."

역시나 엄마를 찾는 아이의 두 번째 도발에 슬슬 짜증이 나더군요.


"젓가락 저기 있으니 니가 갖다 먹을래?"

"히잉 쫌 갖다 주지..."

못 들은 척 대꾸도 하지 않았지요.


밥을 다 먹어 갈 때쯤

"엄마. 진짜 나 물 떠주면 안 돼?"


"야 이놈의 시키야!! 엄마가 몇 번 말해? 두 번 세 번째 물 뜰 때는 목마른 사람이 하라고!! 엄마도 밥을 먹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요즘 아가리 파이터인 아들이 누굴 닮았는지 또 한 번 깨닫는 순간이었지요.


무의식적으로 터져 나온 저의 고성에 같이 밥 먹던 조카가 놀라더군요.

"고모.. 무서워..."


순간 욱하여 소리는 쳤으나

내심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그래 너도 학원 갔다 와서 피곤하겠지...

나는 왜 이리 융통성 없이 밥상 앞에서 애를 혼냈을까....

반성이 들 때였습니다.


화가 난 고모의 눈치를 보고 있던 조카에게 첫째가 천연덕스럽게 말하더군요.

"괜찮아. 놀라지 마. 저렇게 싸나워도 어느 순간 또 착해져. 그리고 착할 땐 많이 착해"


첫째의 어이없는 말에 전 웃음이 터졌고

첫째 말대로 착해진 저는 어느새 몸을 일으켜

물 한잔을 떠주고 있었습니다!!

"옛다. 여깄다 물. 오늘 특별 서비스다."


독서도 싫고 학원도 싫은 천방지축 아이의 머릿속이 궁금했습니다.

무슨 생각으로 살까? 언제 사람 될까? 항상 걱정이 앞섰는데

이놈은 이미 절 읽었습니다....이미 조련하는 단계에 와 있었습니다..

전 그리 단순한 사람이었나 봅니다...

니가 이겼다... 널 걱정 안 해도 되겠구나...앞으로 내가 걱정이다...








keyword
이전 05화아들들의 아찔한 어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