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학습 시즌이 돌아왔습니다. 도시락 메뉴 고민이 시작된 것이지요. 사실 고민이랄 것도 없습니다.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단무지와 햄, 계란, 시금치를 넣은 원조 김밥을 싸면 될 일이죠. 손은 많이 가지만 풍성한 재료와 시골에서 직접 짠 참기름, 통깨의 조화는 집 김밥만의 매력이자 어렸을 적 소풍날 아침 풍경을 떠오르게 하는 추억의 음식입니다. 벌써 소풍날 아침, 엄마가 싸던 김밥의 참기름 냄새가 코끝으로 느껴집니다. 하지만 둘째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문어 소시지와 달팽이 모양 김밥을 예쁘게 싸달라는 요청을 했거든요.
아이는 선뜻 대답을 못하는 나의 눈치를 보며 알록달록한 도시락 사진들을 보여주더군요. 맘카페나 인터넷에서 많이 봐 온 비주얼의 도시락입니다. 한 번도 만들어 본 적도, 만들 생각도 해 본 적 없는 알록달록 도시락. 메추리알로 만든 병아리와 소시지로 만든 문어, 슬라이스햄과 치즈가 돌돌 말려 달팽이로 변신한 신기한 도시락들 말이에요. 아들들은 이런 동물농장 같은 도시락을 싫어할 거라 단정 짓고 난 언제나 김밥을 돌돌 말았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요? 치즈를 말 것인가 김밥을 말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고민하는 사이 첫째가 흥분한 말투로 끼어들었어요.
"안돼! 달팽이 김밥은 무슨 달팽이 김밥?! 너도 시금치 넣은 일반 김밥 싸 가!!"
옆에서 둘째와의 대화를 지켜보던 첫째가 씩씩거리며 소리를 지르니 이 또한 무슨 일인가요?
"너 왜 그래?"
"내가 베이컨 말이 싸달라고 할 때도 무시하고 맨날 김밥만 싸더니 왜 쟤는 문어 소시지를 싸줘? 내 부탁은 안 들어주면서 문어 소시지는 무슨 문어 소시지야? 난 절대 싫어!! 나에게 문어 소시지 싸준 적 있어? 없잖아? 소풍 도시락으로 김밥만 싸 온 애는 나밖에 없었어. 친구들은 내 도시락 먹지도 않아서 얼마나 속상했는지 알아? 엄마 속상할까 봐 말을 안 했을 뿐이야. 유치원부터 지금까지 8년 동안 항상 같은 도시락이었어. 근데 쟤는 문어 소시지를 싸준다고? 난 절대 용납할 수 없어!! 너도 나처럼 당해봐!“
어른이야 웃음이 나오는 내용이지만 아이는 그동안 꾹꾹 눌러두었던 엄마를 향한 원망을 눈물로 쏟아내었습니다. 어찌나 서러워하는지 제 마음이 다 아프더군요. 아이의 분노는 쉽게 멈추지 않았어요. 시뻘게진 눈, 침을 흘려가며 우는 모습에 자기반성을 안 할 수 없었지요. 생각해 보니 작년에도 아이는 도시락을 남겨왔어요. 통 안에 풀어 헤쳐진 김밥을 보며 체험학습 도시락으로 김밥은 인기가 없다는 글을 내가 여기 브런치에 썼던 기억도 나요.
08화 소풍=김밥, 체험학습=? (brunch.co.kr)
아이 말이 맞아요. 집에서 싼 김밥을 좋아하는 남편과 이웃들에게 솜씨를 발휘할 겸 도시락 메뉴는 한결같이 김밥이었습니다. 유부초밥이나 베이컨 말이를 해달라고 하는 아이에게 소풍 도시락은 김밥임을 강요했어요. 내가 김밥을 보며 어렸을 적 소풍날 아침을 떠올리듯 아이도 같은 추억을 갖길 바랐습니다. 성인이 된 아이와 김밥이 놓인 식탁에서 우리의 지금을 떠올리며 대화하는 낭만을 꿈꾸었습니다. 8년이란 긴 시간 동안 이리도 내 생각만 했는지 참으로 무심한 엄마입니다.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훔치는 아이에게 8년의 세월만큼 긴 사과를 해야 했습니다.
"엄마가 너무 무심했네. 미안해"
"네가 이렇게 속상하고 서운한지 몰랐어. 미안해"
"이번엔 네가 원하는 도시락을 싸줄게. 미안해"
"엄마는 김밥이 가장 정성스러운 도시락이라고 생각했어. 미안해"
미안해로 끝나는 문장을 여러 번 되풀이한 후에야 아이의 마음은 조금 풀린 듯했어요. 그제야 뚝뚝 흐르던 눈물도 멈추었습니다. 좀 전까지 엄마를 원망하던 아이의 눈빛은 본래의 착한 아이로 돌아왔습니다.
"이미 지난 일로 동생한테 복수하는 것은 원하지 않아. 문어 소시지 싸줘. 대신 나도 싸줘."
이제 열세 살짜리 마음이 이리도 따뜻하다니. 이번엔 내가 눈물이 나려 하더군요. 이래도 흥 저래도 흥, 매사에 무관심한 줄 알았더니 속이 깊은 아이였습니다. 그러니 여태껏 불평불만 없이 마음에 안 드는 도시락을 챙겼겠지요. 배불러 다 못 먹었다는 말로 엄마를 위로한 거였겠지요. 아이의 마음을 헤아릴수록 미안함을 넘어 슬퍼지더군요.
"이번엔 진짜 내가 원하는 것 싸줘! 또 시금치 넣은 김밥 싸면 나 진짜 가출할 거야."
"엄마가 이번에도 김밥을 싸면 네가 가출할 게 아니라 엄마를 치매 병원에 데려가."
확실한 약속을 원하는 아이에게 굳은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육아 13년 만에 처음으로 만들었습니다. 문어 소시지와 달팽이 김밥. 화려한 비주얼에 비해 간단한 준비물과 조리법에 또 한 번 반성했어요.
집에 돌아온 아이는 만족스러운 도시락이었다는 말로 고맙다는 인사를 했어요. 친구들도 맛있게 잘 먹어서 8년의 서러움이 씻겼다고요. 증명이라도 하듯 도시락은 아주 깨끗하게 비어 설거지도 필요 없겠더군요. 저 또한 아이에게 진 빚을 갚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올해 체험학습 도시락은 대성공입니다. 처음으로 칭찬받았으니 말이에요!! 꼭 김밥만이 우리 모자를 추억에 젖게 하는 건 아닐 텐데 난 왜 이리 고지식했을까요. 스팸 김밥과 닭강정만으로도 우린 충분히 지금을 회상하며 웃을 텐데요. 결국 우리는 김밥과 동물농장 도시락으로 각자의 추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