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이곳은 눈이 아주 많이 내렸습니다.
오랜만에 휘날리는 눈으로 즐거울 법도 한데 걱정이 앞섰어요.
대형마트에 가서 아이가 원하는 레고를 사기로 했거든요.
지난번 학원 반평성 시험 결과 한 등급 올라서 축하와 보상의 의미로요.
인터넷으로 주문할 수도 있었지만 나간 김에 같이 영화도 보고 서점도 들를 거라 꼭 외출을 하고 싶어졌지요.
교통대란으로 걸어오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고고를 외치며 나섰습니다. 저는 아이와 단둘이 영화를 본다는 설렘과 아이는 오늘 레고를 손에 넣는다는 기대감의 서로 다른 목적으로요.
첫 목적지는 극장이었어요. 요즘 아이는 역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회시간에 담임 선생님에게 칭찬을 들은 후로는 더더욱 열심히 역사책을 읽습니다. 그리고 전 원래 시대극을 좋아하는터라 13년 만에 후편이 나온 아바타가 개봉한 첫 주였지만 고민도 하지 않고 올빼미를 예매했습니다.
"엄마. 나 사실 별로 안 보고 싶은데."
"왜?? 엄마 진짜 보고 싶은 건데 같이 보자. 대신 너 좋아하는 팝콘 사줄게"
아이 비위를 맞출 팝콘과 콜라를 사서 좌석에 앉아 광고를 보는 동안 영화에 대한 나의 기대는 점점 커져갔고 오랜만에 극장에서 먹는 팝콘과 콜라에 대한 아이의 기대도 점점 커졌어요.
드디어 영화가 시작했습니다. 주인공 맹인 류준열이 등장합니다. 그때 사각사각 소리와 함께 "엄마 팝콘은 역시 캐러멜 맛이야" 아이가 속삭입니다.
청나라 볼모로 잡혀 갔던 세자가 돌아오는 장면에서 "엄마. 저 사람이 소현세자고 왕이 인조야" 설명하는 아이의 귓속말에 영화 선택을 잘한 것 같아 흐뭇했습니다.
소현세자와 맹인 내의원이 서로에 대한 호감이 깊어질 때쯤 쪼릅쪼릅 소리와 함께 "엄마. 콜라가 체리맛이 나는데 맛있어" 아이가 또 속삭입니다. 살짝 짜증이 남과 동시에 그 맛이 궁금해졌습니다.
"엄마 한입만" 이번엔 제가 속삭였습니다.
"딱 한 입만 먹어야 해" 아들의 작은 목소리가 단호합니다.
맛있습니다. 딱 한입만이라서 그런지 체리 가루를 넣어서 그런지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들처럼 속도 없이 참 맛있습니다.
콜라맛을 음미하는 사이 소현세자가 죽었습니다. 소현세자의 죽음에 안타까워하는 아이를 보니 영화에 집중하는 것 같아 안심이 됩니다.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맹인 류준열은 궁안 여기저기를 긴박하게 뛰어다니고 보는 저도 긴장감이 고조되어 침을 꼴깍 삼키는 그 타이밍에 ...쪽쪽쪽.... 콜라컵 밑바닥까지 콜라를 빨아대는 아이의 간절함이 느껴집니다.
먹방을 선보이는 아들 덕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습니다.
주인공이 방어에 나설 때 즈음 아이의 콜라컵을 빼앗았습니다.
"그만 먹어. 영화 끝나고 줄게.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될 것 같아"
의기소침해진 아이를 모른 체 나만의 영화 세계에 빠져드니 어느새 끝을 향합니다. 마지막 장면까지 다 보고 내뱉은 나의 탄식과 함께 들려오는 와그작와그작 얼음 씹는 소리에는 현기증이 납니다.
영화는 참 재미있었습니다. 픽션과 논픽션이 잘 버무려졌다고 생각합니다. 이 재밌는 영화를 보는 내내 참을 인을 여러 번 새겼습니다. 주인공들의 갈등이 터질 때 저의 화도 같이 터질뻔했습니다. 애 손목을 붙잡고 밖으로 나갈뻔했지만 용케도 잘 참았습니다.
생각해보니 아이는 처음부터 영화를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냥 어서 빨리 레고를 사러 갔으면 좋겠다는 아이를 팝콘과 콜라로 유혹하였지요. 네가 재밌어하는 역사 이야기야. 그러니 너는 꼭 봐야 한다며 강요하였습니다. 지금껏 어린이 영화관의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익숙한 아이는 이 고요한 환경이 적응 안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보고 싶은 영화를 보았고 아이는 먹고 싶은 것을 맛있게 먹었으니 어쨌든 서로 목표 달성입니다만 조금 아쉬웠습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어떤 장면이 재밌었는지 얘기하는 상상을 했었지만 현실은 팝콘과 콜라가 참 맛있었다는 아이의 감탄을 듣고 있었거든요.
마지막 코스로 들른 마트에서 아이는 원하는 레고를 사기 위해 여기저기 둘러보며 이것저것 들었다 놨다를 반복합니다. 자기의 선택권 앞에서 신중한 아이는 영화 볼 때와는 다른 모습이었지요. 지루한 기다림에 몸이 베베 꼬이는 저 또한 영화 볼 때와는 다른 모습이었고요.
레고를 품에 안고서야 영화 이야기를 조잘조잘하던 아이는 아주 행복한 하루였다며 고맙다는 인사를 했습니다. 이번엔 드라마에 나오는 데이트를 한 것 같은 마무리에 저 또한 아주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어린이 영화를 보던 아이는 이제 청소년 영화를 볼 나이가 되었습니다. 곧 극장 매너에 잘 따르겠지요. 싫어하던 공부에서 자기만의 성과를 낸 것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