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야채 가게 할머니

들으면서도 믿을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by 아이쿠

우리 집과 가게 사이에는 오래되고

유명한 전통시장이 있습니다.

거래하는 도매집이 따로 있지만

야채 하나가 없다는 직원의 전화를 받고

출근길에 그 시장에 들렀습니다.


평소 그 시장을 잘 다니지 않아

어디가 어딘지도 잘 모르겠어

아무 한 가게에 들어가니 70세는

훨씬 넘어 보이는 할머니가 계십니다.


작은 키에 짧은 뽀글 머리의 할머니는

푸근하고 넉넉한 인상은 아니고

얼굴에 지난 세월의 풍파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그 후로도 몇 번은 더 가게 되었고

이제는 일주일에 두세 번 들릅니다.


얼굴이 익숙해진 할머니가

"이 근처에 사요?"라며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근처에서 마트 하는데

이거 갖다 다듬어 소포장해서 팔아요."

"고생하는구먼. 남편은? 애들은?"

"남편하고 같이 가게 하고 아이 둘 있어요."


이것저것 물으시다가

"가만있어 봐. 그럼 남편이

우리 아들이랑 동갑이구먼 "

할머니는 젊어서 남편과 사별하고

아들이 5살 때 가게 일을 시작한 것이

올해 43년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니

듣고 있어도 실감이 나지 않는 세월입니다.


아들은 결혼해서 아이도 낳았고

지금은 서울에서 직장 생활하는데

매일 안부 전화를 하는 효자라고

흐뭇해하며 말씀하시곤 합니다.

그리고 가끔은 저에게 아드님이

보낸 문자를 보여주며 자랑하지요.


저를 보며 젊은 날 장사했던

할머니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는지

"내가 자네한테는 이문 안 남기고 파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덕분에 전 남편에게

싸게 샀다고 큰소리칩니다.



할머니는 주변 상인분들과 같이

식사를 하거나 얘기하고 놀 때가 많아

이제는 그분들도 저를 알아봅니다.

"할머니 대파 1단 주세요."

"아이고 어쩌까? 오늘 대파가 없는디

자네 있는가?"옆 가게에 물어봅니다.

"어쩌까 나도 오늘은 없네요."


할머니는 고민하더니 저를 데리고

할머니 대파 도매상으로 향합니다.

"어이 대파 1단 주소."

전 도매가격으로 1단을 샀다.

"저 브로콜리도 사야 해요"

그러면 또 다른 가게로 데리고 가서

"어이 브로콜리 좋은 거 몇 개 주소!"

하고는 저를 보며 "다 됐는가?" 합니다.

"네"

"으잉 그럼 어서 가소"

전 음료 한 잔 빵 하나로 감사함을 전하지요.


대파 도매상을 알게 되었지만

저는 여전히 할머니 가게로 갑니다.

어차피 싸게 주시고 저는 1단만 사니

돈 차이도 크게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무를 사야 하는데

할머니가 가게에 안 계십니다.

옆 가게 아주머니가 오셔서는

"할머니 잠깐 염색하러 가셨소. 뭐 필요하요?"

"무 몇 개 사러 왔는데요..."

"어메 오늘 무가 없소"

그러더니 저를 데리고 무 도매상으로 갑니다.

"아저씨 이 새댁이 마트에서 판다니까

무 한 다발 싸게 주시오"

아주머니는 가격까지 흥정해 주고는

"나 먼저 갈라니까 들어가시오"

하고 급한 걸음으로 가게로 향합니다.

전 이제 무 도매상도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할머니 가게로 갑니다.

큰 차이 없으니까요.


어느 날은

"할머니 온누리 상품권 받아요?"

몇천 원짜리 사면서 만 원 상품권

내기가 미안해 알면서도 여쭤봅니다.

"받제. 왜 안받겄어!!"

그러시면서 옆 가게 아주머니에게

"저것이 저러게 순진해. 시장에서

상품권 받냐고 물어보네 참말로...

저렇게 순해 빠져 가지고..."

제 남편이 들으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얘기들을 합니다.


아무래도 할머니는 저를 동정심으로만

바라보는지 야채 살 때마다 마트에서는

얼마 이상은 꼭 받아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지요.


가끔 할머니가 챙겨주신 야채가

신선하지 않을 때도 있고

비쌀 때도 있습니다.

고의인지 실수인지 모르지만

크게 따지지는 않습니다.


실수라면 연세가 있어 그런 거고

고의라면 할머니도 몇십 년 장삿속인데

나에게 손해 보는 장사만 하겠는가

하고 생각하고 말면 그만입니다.

그리고 싸고 좋은 물건 줄 때가

훨씬 많으니까요...


지난겨울, 폭설이 내리고 한파일 때는

옷을 두껍게 입고 난로를 켜고 계셨습니다.

가게가 3면이 모두 뚫려있어 찬바람이

제멋대로 여기저기로 불어댑니다.

그냥 서있기만 해도 저는 너무 춥습니다.

"할머니 오늘 몇 시에 나오셨어요?"

"네시"

"새벽 네시요?"

"그라제"

"오메나 부지런도 하시네요

이 추위에.... 세상에........"

또 한 번 할머니의 성실함에 놀랍니다.

"청상추 있어요?"

"지금 다 얼어서 좋은 것이 없네.

적상추라도 가져갈런가? 그건 상태가 괜찮네."

"네 그럼 그거 1kg 주세요."

"으잉 추운 게 어서 가소 어서 가

오늘은 차 갖고 왔제?"

"네"

"잘했네 어서 가소"


인심 좋은 할머니가 가끔 저에게 부탁을 합니다.

주말이면 시장 앞 차도 2차선까지

트럭들이 줄지어 서서 장사를 하는데

주말 출근길에는 저도 짜증 날 때가 많습니다.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장사가 안되니 화가 나지요.


"저 도로 위 저 사람들 좀 구청에 신고해 주소.

여러 명이 신고해야 단속을 나오제.

나는 세내고 장사한디 매주 저기서

공짜 장사하고 저것이 뭐여 저것이!!"

"그러게요. 운전하기도 복잡스러운데 신고할까요?"

"으잉 꼭 하소"

"네~"하고 돌아서지만 차마 신고는 못합니다.


지난주에 갔을 때는 빨갛게 달아오른

할머니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사장님 얼굴이 안 좋아 보여요

어디 아프세요??" 하니 웃으시며

"아파 보여??"오늘이 내 칠순이라고

옆에서 막걸리 한 잔씩 줬어."

"아~~ 그러셨어요??"


연세가 칠십 중반일 거라 생각했는데

이제야 칠순이라는 생각에

너무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칠순 축하드린다는 말도

못하고 급하게 나왔습니다...


나중에야 두유 한 박스를 들고 가

"할머니 칠순 축하드려요" 하니

"자네 뭐 이런 걸 가져온가?"

라며 당황하고 놀래시면서도

아주 호탕하게 웃으셨습니다.

이제 나오기 시작한 봄동과 달래를

서비스로 챙겨주었습니다.

"정이 있제. 이거 갖다 먹으소"


매일 새벽 4시면 나와야 하는 시장...

남편 없이 아들 하나 키우고자

얼마나 애를 쓰셨을까요...

전 상상할 수도 가늠할 수도 없습니다.

할머니의 43년 시장에서의 세월이

얼마나 애달프고 고달팠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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