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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쿠 Oct 08. 2024

이웃 잘 만나 영화를 찍게 되었다. 1편



8월 초에 남편이 물었어요.

”위층에서 영화를 찍는데 마트씬이 있데. 우리 가게에서 찍어도 되냐는데? 대여비도 준다고…. 어떻게 할까?“

”어머 어머…. 이걸 왜 이제 말해? 당연히 괜찮지~ 나야 완전 땡큐지~“

”그래? 그럼, 돈은 반땅하자!!“

돈이 들어오기도 전에 돈 쓸 곳이 백만 개쯤은 생각나요. 너무 흥분되고 설레어서 어디다 먼저 써야 할지 도통 감이 안 잡혀요! 그건 남편도 마찬가지인가 봐요. 낚시를 갈까, 낚시 장비를 살까를 고민하는 걸 보니 한편으론 안쓰러워요. 이렇게 고생하면서 사고 싶은 것도 실컷 못 사고…. 눈물이 또르르또르륵 흐르려 해요. 그럼에도 내 반 땅을 양보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미안해. 내 코가 석 자야.


로또 당첨되게 해달라고 하나님 부처님 알라신 조상신께 빌었는데 이렇게 빨리 소원이 이루어질지 몰랐어요!! 비록 1등도 2등도 3등도 아닌 5만 원보다는 조금 많은 금액이지만, 비록 내가 아닌 가게를 찍는다지만 이것도 감사할 따름이에요. 하여튼 고민할 필요도 없이 바로 허락했어요!! 사실, 꼭 돈 때문만은 아니에요. 남편과 내가 지겹도록 싸우며 묵언과 지랄쌩쇼를 반복했던 우리의 아름다운 추억이 깃든 이 가게가 영상으로 영원히 남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라요. 가게 곳곳을 돌아보니 지난 우리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요.


제일 먼저 카운터가 보이네요. 제가 항상 지키고 서 있는 곳이자 시간 날 때 글을 쓰는 곳이지요. 손님들과 안부를 묻고 농담하던 곳이에요. 편한 의자가 있어 쉼의 장소이기도 해요. 그래서 남편과 자주 카운터 쟁탈전을 벌이곤 했어요. 3년 전, 그날은 쟁탈전을 넘어선 전쟁에 가까운 언쟁이 있었죠. 저도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남편과의 불화로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지만 입을 열면 모진 말이 쏟아질 것 같아 묵언수행을 하던 때였어요. 남편이 작은 실수를 하자 때는 이때다 싶었어요. 

우선, 근처 편의점에서 시원하게 맥주를 원샷했어요. 전투적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 카운터에 앉아 있던 남편을 들이받았어요. 아무리 속상해도 제가 앞뒤 못 재는 사람은 아니에요…. 그날은 스스로 지대로 미쳐보고자 작심한 날이었지요. 그렇게라도 남편에게 풀지 않으면 정말로 미칠 것 같았거든요!! 집에서는 애들이 있어 참았고 싸우자고 가게를 비울 수 없으니 차라리 가게에서 터트리자 했어요. 남편도 너무 당황해 말을 못 하더군요. 손님이 없어 다행이지 뭐예요. 내가 생각해도 또라이 같을 때가 있는데 보통은 남편을 상대로 하곤 해요. 아마도 남편이 받아주니까 그런가 봐요. 흑백요리사의 요리하는 똘아이는 요리라도 잘하지. 전 그냥 똘아이였어요!! 제 인생 최대 똘아이 짓이 아니었나 생각해요. 돌아보니 부끄럽군요. 요즘 참회의 삶을 살고 있어요.


가게 중간에 위치한 계란 냉장고를 바라보니 또 남편이 생각나요. 초겨울이었어요. 계란 냉장고를 청소하느라 30개짜리 계란판을 모두 꺼내어 바닥에 두었어요. 청소를 끝내고 신줏단지 모시듯 조심스럽게 차곡차곡 쌓았어요. 거의 다 끝나가고 마지막 5판이 남았어요. 이제 우리 계란 냉장고는 새롭고 깨끗하게 다시 태어나는 거예요.

내 정성이 갸륵했는지 남편이 다가와요.

”내가 도와줄게“

이거 그린라이트인가요? 오늘 뭔 일이래요.

하지만 호의는 오래가지 못했어요.

”아~ 아~ 허리야!! 허리 삔 것 같은데?“

잠깐만요, 지금 계란을 들지도 않았어요. 계란을 들기 위해 엎드린 자세로 뭔가 잘못되었다 소리쳐요.

너무 기가 막혀서 눈에는 쌍라이트가 켜지고 콧구멍이 벌렁거려요. ‘염병’을 시작으로 육두문자가 쏟아지려 입안에서 대기 중이에요. 일은 내가 다 했는데…. 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정말이지 내가 다시 새롭게 태어나고 싶은 심정이에요. 남편은 병원에 가 치료를 받고 한동안 육체적 노동을 못 했어요. 덕분에 소주 박스도 내가 들고 맥주 박스도 내가 들고 음료수 박스도 내가 들고!! 근데 왜 내 허리는 멀쩡할까요? 와~ 일복 지린다. 진짜!!! 남편은 민망한지 콧구멍만 벌렁거릴 뿐이었어요.


좋은 추억도 있어요. 음…. 자…. 음…. 생각을 해보자….

창고예요. 삼시세끼중 적어도 한 끼 많을 땐 세 끼를 먹던 우리의 창고는 저의 주방과 같았어요.

겨울이면 아침에 쌀을 불려 남편이 장을 봐 오는 점심때면 콩나물밥이나 버섯밥을 해서 계란후라이와 함께 양념간장에 비벼 먹었어요. 여름이면 가게에 있는 국수를 삶아 열무에 비벼 먹거나 냉면을 삶아 얼음 가득 넣고 시원하게 한 사발 들이켰어요. 그제야 싸우지 않고 일 할 마음의 여유가 생겼지요. 하루 중 부부가 제일 마음이 맞고 대화라는 걸 할 수 있는 짧고 귀한 시간이었어요. 비록 먹는 중간 손님이 오면 누가 카운터로 달려갈 것인가 눈치싸움을 하다 빈정이 상할때도 있었지만 나름 부부가 얼굴 마주 보고 식사하는 시간이었어요.


한데 남편에게 또 미안해져요.

”당신 고생이 많아. 맛있는 거 해놨으니까 먹고 힘내.“

이렇게 말했으면 얼마나 듣기 좋고 다정하고 보기 좋은가요.

한데 언제나 전 ”밥!! 밥 먹어!!“ 창고 문 앞에서 소리쳤어요. 아무리 한가한 시간이라 손님이 없다지만 이 얼마나 소란스러운가요. 노화가 시작된 남편이 못 들으면 가엾게 여길 일이잖아요.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매장 음악 소리에 더 못 들을 수 있잖아요. 하지만 전 붉으락푸르락 화가 나서 더 크게 소리쳤어요.

”밥 먹으라고!!“

아주 손에 들고 있던 주걱을 카운터까지 던질 기세에요.


어릴 적 논에 농약을 뿌리면 경운기 소리 때문에 말소리가 안 들렸어요. 대화가 불가능하니 더 큰 목소리를 내거나 손발을 사용하여야 겨우 의사 전달이 되었죠. 지금 제가 그래요. 발짓으로 남편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하기보다는 큰 목소리를 내기로 한 거죠. 누가 보면 싸우는 줄 알겠어요. 온 동네 사람들이 싸워도 밥은 차려주는가 보다 하고 딱 오해하기 좋은 장면이지요. 제가 생각해도 깡패가 따로 없어요. 나폴리 맛피아는 파스타를 잘 만들고 게국지라도 잘 끓이지. 전 그냥 마피아예요. 옛일을 곱씹을수록 남편이 고생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요.


바쁜 일을 마치고 잠시 짬이 나면 우리 부부는 출입문에 서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곤 해요. 봄이면 만개한 벚꽃의 화려함에 두 눈이 호강하고 여름이면 쏟아지는 비에 귀가 시원해요. 가을이면 쓸쓸한 분위기에 취한 따뜻한 커피에 입안이 즐거웠고 겨울이면 눈이 내리는 그림 같은 풍경에 밖으로 뛰쳐나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지요. 허나 요즘은 좀 달라졌어요.

”저 손님 편의점 가네? 내가 저번에 서비스도 줬는데 저길 가네?“

남편이 흥분해서 얼굴이 벌게져요. 예전에 없던 편의점이 코앞에 생겨 바깥 풍경을 방해해요.


비도 눈도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아요. 이제는 편의점으로 들어가는 손님이 우리의 풍경이에요.

원래 부창부수하는 성격이 아니라 또 남편에게 핀잔을 줘요.

”편의점이 더 싼 것도 많아. 저 사람들 사정도 이해하자. 대신 서비스는 주지 말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 눈도 남편과 같이 손님의 동선을 쫓아요. 그때 나이 든 단골이 문을 열고 들어오며 한마디 해요.

”부부가 다정하게 서서 같이 바깥을 바라보며 대화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소.“

이런…. 손님이 또 오해를 해버렸어요.

이렇게 다정한 추억과 참회의 기억이 많은 우리 가게를 배경으로 영화를 찍는다네요. 이젠 그 영화를 틀면 우리 가게가 나온다고 생각하니 뭐랄까. 좀 뭉클해요. 그리고 이웃을 잘 만나 이런 행운이 생기네요.


작년 여름, 극단에서 위층을 빌려 연습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이런 조용한 동네에 극단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지만 관심 대상은 아니었어요. MBTI의 T 성향이 강한 나에게 예술인들은 타고난 재능, 풍부한 감성의 F들로 태생부터 다른 세계의 사람들로 다가가기 어렵다는 인식이 컸거든요. 하지만 그들은 달랐어요. 뒤풀이하는 날, 몇 번이고 가게를 들락거리는 그들의 씀씀이에 가까이할 수밖에 없는 매력을 느껴버렸어요. 내 그동안 오해해서 미안하오.


영화는 비교적 손님이 적은 일요일 오전에 찍기로 했어요. 토요일은 남편이 근무하지만, 내일을 위해 준비할 게 많아 출근했어요. 화면에 먼지가 보이면 안 되지. 진열대의 먼지를 닦고 바닥을 쓸고 걸레질했어요. 비뚤어진 물건들은 각 잡아 세웠고요. 혹시 창고에서도 찍을지 몰라 흐트러진 물건들을 정리했어요. 우리 배우님들 화장실 갈지 몰라 간만에 화장실 대청소까지. 카운터도 나오려나? 카운터 뒤 담배 진열에 좀 신경을 써야 하나? 혹시 계산하는 장면이 있나? 내일 머리라도 단정히 빗고 옷도 깔끔하게 입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혹시 정말 혹시 모르니까요. 상상만으로도 이토록 설레다니. 오랜만에 생기를 되찾은 기분이에요.


드디어 일요일 아침이에요. 토요일부터 준비했는데도 괜스레 바빠요. 우선,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해야지! 아주 자랑스럽게 [영화 촬영으로 9시~10시 가게 문을 닫습니다.]는 글자를 되도록 크게 써서 유리문 가운데 붙였어요. 내년엔 영화 포스터가 붙을 자리지요. 오가던 사람들이 호기심에 이것저것 물으니 내가 찍는 영화도 아닌데 광대가 입꼬리를 쥐어 잡고 승천해요. 국뽕도 울고 갈 어깨뽕이 차오르니 벌써 분위기에 취하고요.


스태프 한두 명이 먼저 내려와 가게를 훑어보고는 장비팀을 호출해요. 상상이 점점 현실이 되어가요. 카메라를 세우고 조명등을 설치할 때쯤엔 심장이 제멋로 나대더군요. 궁금한 게 많지만, 모르는 사람들뿐이라 그저 눈동자를 굴려 가며 그들의 움직임을 살폈어요.

앗! 아는 사람이다. 배우와 동선을 체크하는 저 여자 스태프는 매일 커피를 사는 손님이고 티비에서만 보던 슬레이트를 들고 있는 스태프는 간식을 사러 자주 오는 손님이에요. 일에 집중하는 모습은 조용한 손님으로 봤을 때와 사뭇 다른 분위기에요. 멋짐이 폭발해요. 어느 정도 준비가 되자 감독님이 들어와 인사했어요. 처음 보는 젊은 여자분이에요.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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