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가게는 직사각형으로 출입문에서 안쪽 진열대까지 아주 긴 구조입니다. 몸이 불편한 분들에게는 조금 부담스러운 거리이지요. 그래서 한두 개의 물건은 제가 대신 가져와 계산하기도 해요. 손님은 서비스를 받아 좋고 저는 저대로 만족감을 느낀답니다. 이제는 노인이 되어버린 부모님 생각에 하는 행동이었다면 너무 앞서가는 감정일까요. 나이 든 손님에 대한 배려가 부모님의 복으로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 어린 학생들에 대한 존중이, 내 아이들이 어디선가 배려받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친절이라 나름의 만족감을 느낀다 표현했습니다.
매일 오전 막걸리 5병을 사는 할아버지가 있어요. 중간에 위치한 막걸리 냉장고까지 가는 길 내내 불편한 몸을 지팡이에 의지합니다. 한 손에는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한 손은 지팡이를 쥐고 절뚝거리며 카운터로 걸어 오는 모습은 보는 저도 불편하게 만듭니다.
‘저런 몸으로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막걸리를 마시는구나. 가족들은 얼마나 속상할까?’
부정적인 생각이 먼저 들자, 손님에 대한 관심이 뚝 떨어졌어요.
할아버지처럼 매일 술을 사는 손님들이 있어요. 처음엔 술을 파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무슨 상처가 많아서 이리 자신을 망가뜨릴까?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고요. 여길 올 게 아니라 치료센터를 가야 될 텐데…. 가족들은 얼마나 힘들고 지칠까. 여러 생각에 계산하면서도 편치 않았어요. 하지만 전 알아요. 분명 가족들도 온갖 노력을 했을 테지만 실패했다는걸요. 결국 자신만이 스스로를 구할 수 있다는걸요. 그러니 얼굴 몇 번 봤다고 술을 사라 마라 잔소리는 결국 그 손님과 불화의 씨앗이 될 뿐 아니라 우리 가게를 놔두고 먼 가게까지 가는 수고를 더할 거라는걸요. 그래서 입을 꾹 닫고 일절 대화하지 않아요. 계산에만 집중하고 신경을 끄는 거죠. 한데 이 손님은 매일 술을 사는 노인치고는 점잖은 말투와 깔끔한 행색, 결정적으로 술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아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하루는 가게 문을 나서는 할아버지 뒷모습을 지켜보았어요. 걸음 한 발짝 뗄 때마다 손님의 몸도 막걸리가 담긴 봉지도 흔들흔들…. 아슬아슬한 장면이 계속되었습니다. 그제야 달려가 짐을 받아 들고 집 앞까지 배달해 드렸어요. 참 좋아하셨어요. 왜 진즉 들어드리지 않았을까 미안할 정도였지요. 그날 이후 꼭 배달해 드리는데 집 앞에 물건을 두고 돌아오는 길이면 걸음이 느린 할아버지와 마주칩니다. 그때마다 고개를 숙여 “허허, 고맙습니다” 인사하는데 손녀뻘인 저를 존중하는 마음이 느껴져요.
“젊은 부부가 열심히 일하는 게 보기 좋소.”
물건만 사가던 할아버지가 처음으로 마음속 말을 꺼냈어요.
“할아버지, 막걸리를 이렇게 매일 드시면 건강에 안 좋을 텐데요.”
앞에서 말했듯 손님의 사생활까지 터치할 권리와 의무는 없지만 어쩐지 할아버지에게는 확인하고 싶었나 봐요.
“허허, 내가 90이 넘었소. 어떻게 이걸 내가 매일 먹겠소? 우리 농장 일을 하는 사람들한테 보내요.”
자세한 내막을 알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죄책감과 찝찝한 기분이 아닌 오늘도 돈 번다는 기쁨으로 막걸리 냉장고를 꽉꽉 채울 수 있으니까요.
할아버지는 이제 문을 들어서며 손가락 다섯 개를 펴 보입니다. 저도 고개를 끄덕이고 자동으로 막걸리 쪽으로 향하지요. 때로는 자신 외에 다른 손님이 있다면 눈치를 발휘합니다.
“오늘은 내가 가져갈 테니 손님들 계산하시오.”
막걸리 봉지를 들고 지팡이를 짚는 할아버지예요.
“먼저 출발하시면 여기 손님 계산하고 곧 뒤따를게요. 그리고 이건 서비스로 드릴게요.”
짐을 빼앗아 한쪽에 두며 할아버지의 배려에 같이 배려합니다.
매일 2~3만 원의 금액을 쓰면 할인을 얘기하거나 생색을 낼만도 한데 그저 배달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는 할아버지가 감사하여 되려 챙기게 되더군요. 사실, 지금껏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얄미운 손님들의 대부분은 노인들입니다. 어느새 편견이 생겨버렸지요. 한데 할아버지의 등장으로 어르신이라는 단어를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노인들의 얄미운 행동 중 첫째가 새치기입니다. 다른 손님이 카운터에 물건을 내려놓는 그 잠깐의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알아차립니다. 문을 들어서며 담배를 외치는 경우도 있고 슬쩍 다가와 자신의 물건을 카운터에 먼저 밀어 넣는 손님도 있지요. 살짝 애매한 상황인 경우 먼저 계산하지만, 기분이 영 개운치 않습니다.
하지만 십중팔구는 카운터의 권한을 휘두르지요.
“여기 손님이 먼저 기다리셔서요.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나이보다는 순서가 먼저잖아요. 적어도 앞 손님에게 양해를 구하는 예의를 보였다면 저도 센스 있게 빨리 계산했을 텐데 물건을 먼저 밀어 넣는 것으로 이미 아쉬운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최대한의 상냥한 말투와 친절한 미소로 불만 제기를 방어함과 동시에 다음에도 같은 태도를 유지하겠다는 작은 경고입니다. 마음속으로 “하여튼 노인네 뭐가 그리 급해서!”를 외치면서요.
얼마 전, 노인이라고 하기에는 젊은 60대 손님이 소주 4박스를 사겠다고 했어요. 대신 식자재 마트 가격으로 달라고 하더군요. 행사에 필요한데 같은 동네라서 사줄 테니 좀 싸게 달라고요. 단골 아니 가끔이라도 오는 손님이었다면 식자재 가격에는 못 맞춰도 내가 해줄 수 있는 할인은 해드렸을 텐데…. 꼭 필요할 때만 같은 동네 운운이 오히려 빈정 상했어요.
“죄송하지만 할인은 안 될 것 같습니다.”
객기를 부리자 당황한 아주머니는 다른 제안을 했어요.
“그럼, 병당 100원 깎는 거로 하고 먹다 남은 소주는 다시 반품해도 되나요?”
자신은 조금도 손해를 안 보려는 그 마음이 괘씸하고 황당해 오기까지 생기더군요.
“죄송합니다. 반품은 안 될 듯합니다.”
아주머니는 장사 더럽게 못한다는 눈빛으로 절 쳐다보았고 장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일러주고 싶은 말이 있지만 참는 듯 보였어요. 사실 소주는 유통기한이 없으니 뜯지만 않았다면 반품해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내키지 않더군요. 유통 구조상 동네 마트와 식자재 마트의 가격 차이는 당연해요. 물량 차이가 나는 걸요. 식자재와 구분되는 또 다른 편리함이 있을 텐데 가격만 이야기 하니…. 우리는 거저 장사하나요. 내 기본이 장사꾼인걸요. 그날은 같은 말 되풀이 하며 설득과 실랑이 사이를 오가는 신경전도 하고 싶지 않더군요. 장사 못하는 젊은 여자로 소문이 났을 테지만 가끔은 이런 객기를 부립니다.
속에서 욕이 나와 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노인 : 나이가 들어 늙은 사람.
노인네 : 나이 든 사람을 얕잡아 이르는 말.
어르신 : 아버지나 어머니와 벗이 되는 어른이나 그 이상 되는 어른을 높여 이르는 말.
사전도 그 차이를 명확히 구분했어요.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늙어가는 이 몸, 어르신이 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 노력도 벅찬 일이라면 최소한 노인네는 삼가고 노인이라도 되어야겠어요.
사실, 노인을 운운하며 나이를 꼭 거론할 일은 아닙니다. 어린 나이를 따져보자면 젊은 친구와 젊은 놈이 있으니까요. 술, 담배를 팔 때 신분증 검사는 필수입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농담으로 협조해 주는 손님은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듭니다.
“세상에 너무 어려 보이세요.”
저도 듣기 좋은 리액션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반면에 짜증을 내는 어린 친구들도 있습니다.
“아이씨, 어딜 가나 신분증 검사야 짜증나!”
배려까지 바라지 않습니다. 신분증 검사에 응해주는 것으로 손님의 의무는 다했으니까요. 다만, 굳이 싫은 티를 내며 짜증을 낼 필요는 없습니다. 못 본 척 제 할 일을 하지만 속마음은 다르지요.
‘에라이, 어린 것아! 뭐가 그리 짜증이냐.’
이런 순간을 맞이하면 역시나 부모님과 아이들이 떠오릅니다.
“엄마, 그러면 어디 가서 노인네, 늙은이 소리 들어. 그러지 마!”
“얘들아,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알아야지. 그런 행동을 누가 좋아하니?
돈에 따라 극락을 오가는 유리멘탈의 장사꾼이라지만 때로는 돈이 전부는 아닙니다. 서비스직으로서 베푸는 친절이 당연할지라도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손님을 볼 때면 사람 사이에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예의와 인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본인은 유두리, 융통성으로 포장하고 싶겠지만 그 얕은수가 너무 눈에 보여 얄밉고 상대하기 싫습니다.
힘들고 바쁜 세상에 매장 점원에게까지 친절하기를 바라냐고 묻는다면 그건 오해입니다. 오히려 손님의 과한 친절은 경계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계산할 때마다 제가 해야 할 “감사합니다” 멘트를 손님이 선수 치며 “수고하셨습니다.”를 굳이 붙일 때면 무언가 자연스럽지 않아 불편합니다. 제 역할을 빼앗긴 기분마저 들어요. 젊은 친구와 젊은 놈, 어르신과 노인네는 자신의 선택입니다. 자격조건은 까다롭지 않아요. 그저 기본적인 상식과 교양을 갖춘 태도로 자신의 역할을 하는 것, 그만으로도 우리 모두 젊은 친구와 어르신이 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