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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쿠 Jan 07. 2024

다분히 의도적인 K-친절


"당신, 잠깐만 나와봐. 빨리!"     

남편은 카운터를 보고 난 아이들과 창고에서 송년 음식을 준비 중이었다. 알바생이 없어 네 식구가 옹기종기 앉아 밥을 먹은 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보통은 5시 전에 퇴근하기 바쁜 나지만 오늘은 12월 31일. 아무리 상황이 여의찮더라도 한 해의 마지막 날인 만큼 가게 창고에서라도 식구끼리 밥을 먹기 위해 돼지고기를 볶는 중이었다.      

         

"무슨 일이야?"     

달음박질하며 묻는데 남편의 옆자리에 서 있는 황갈색 머리의 콧대 높은 외국인이 날 보며 인사한다. 잠시 당황하는 나를 간파한 남편이 잘난 척 말했다.     

"뉴질랜드 사람이래."     

"어. 그래? 근데 나는 왜 부른 거야?"     

남편은 영어를 잘한다. 마트를 하기 전 회사 업무가 해외 파트였고 해외 출장도 자주 다녔다. 그 말은 즉, 지금 영어 한마디 못 하는 나의 도움이 전혀 필요 없는 상황인데 왜 나를 불렀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의미다. 

"헬로우" 조차도 붕어처럼 입을 뻥긋거리는 수준이라 벌써 얼굴이 벌게진다. 내가 오늘 무슨 잘못을 하여 남편이 나를 골탕 먹이려는 것인가 재빠르게 하루를 되짚을 정도다.   

  

"같이 온 사람이 중국 여자야. 내가 당신 중국어 할 줄 안다니까 궁금하대서 불렀어."     

이런. 내가 중국어를 할 수 있었다는 건 과거, 그것도 15년 전의 오래된 일이다. 과거의 능력은 이미 소멸한지라 중국인 손님들에게 일체 중국어 한마디 건네지 않는 나다. 왜 자꾸 시험에 들게 하는지 옆눈으로 남편을 쏘아봤다.


"어떻게 중국어를 할 줄 알아요?" 

안 들으려 해도 안 들릴 수 없는 중국어가 귀에 꽂혔다. 중국에서 5년을 살아온 짬밥이 있는데 이런 기본적인 것까지 잊으면 안 되는 것이지. 한데 분명 중국 여자 특유의 억양과 하이톤이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나보다 어설픈 중국어가 들린다. 게다가 저음이다. 서툰 중국어의 주인공은 콧대 높은 뉴질랜드인으로 눈을 반짝거리며 아주 흥미롭게 말을 걸어오는데 조금은 흥분한 목소리이기도 했다. 이 시골 같은 동네의 마트 아줌마가 중국어를 하자 적잖이 놀라는 기색이었고 대화를 계속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당신은 어떻게 중국어를 하나요?" 

도리어 내가 물었다. 

"난 지금 중국 대련에 있어요. 그래서 조금 할 줄 알아요" 

"오. 그렇군요. 대련은 예전에 여행으로 가보았어요. 해산물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네요." 

아는지 모르겠는데 외국인끼리 중국어를 하면 더 잘 들리는 법이다. 서로 어설픈 발음, 성조이지만 할 수 있는 언어가 초급에서 중급 사이로 어렵지 않고 실전이 아닌 책에서 배웠을 법한 말을 하기에 금방 알아듣는다. 마치 콩글리시에 내귀가 탁 트이는 것처럼.


"중국어를 설마 혼자서 독학한 거예요??" 

인제야 제대로 된 중국어가 들린다. 작은 키에 마른 몸의 전형적인 중국 남쪽 지방 체형의 여자다. 

"중문 전공이고 중국에서 어학연수를 했어요. 일도 몇 년 하구요. 근데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아 그래요? 사실 며칠 여행을 와서 근처에 묵어요. 저녁을 먹기 위해 나왔는데 근처 식당이 다 문을 닫아서 돌아다니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어요. 한국 불고기를 먹고 싶은데 어딜 가야 할까요?" 

"불고기 아니고 삼겹살." 

우리의 대화에 집중하던 남자가 중국어보다 정확한 발음의 한국어로 삼겹살이라고 외쳤다. 


"어쩌죠? 오늘은 식당 문 연 곳이 많지 않아요. 연휴잖아요. 조금 멀리 가도 괜찮다면 자주 가는 고깃집을 소개시켜 드릴게요." 

남의 일에 냉소적인 남편이 웬일인지 적극적으로 나선다. 아니다. 남편은 외국인에게 항상 적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K-슈퍼마켓의 K-친절을 베풀겠다는 큰 뜻은 아니다. 구석진 마트의 계산대에 앉아 오는 손님을 기다리며 눈물 나게 하품하는 지금의 처지와 달리, 한때는 치열했던 직장인의 삶을 떠올리기에 아주 좋은 소재였다. 더 중요한 점은 아직 녹슬지 않는 자신의 영어 실력을 뽐내고 싶었고 그러자면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어야 했다. 영어로 대화하는 사이에 계산하던 단골들은 그동안 한국어 능력이 의심되었던 남편을 다시 한번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남편은 그 시선을 꽤 즐겼다.


오늘도 자신의 이미지를 한껏 업그레이드할 기회가 왔고 그 기회에 나를 동참시키기 위해 애타게 불렀을 테다. 인터넷 검색을 하더니 고깃집에 전화해 영업 중인지를 묻고는 위치와 사진을 그들에게 보여주는 행동을 최대한 크게 하고 대화는 오래도록 길게 했다. "하이""땡큐"를 외치는 외국인 손님에게 굳이 한국어로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로 답하며 한국에 왔으면 한국어를 배우시라는 마음속 언어를 하는 나와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우리 손님 중 고깃집 하는 분 있잖아. 그 집 맛있는데 문 열었는지 지금 보고 올게"     

말릴 새도 없이 오토바이를 타고 저 멀리 가버렸다. 천지가 개벽할 노릇이다. 오늘따라 더 과잉 친절이다.     

단골집 식당도 문이 닫혔단다. 우리 가게에서 고기를 팔지만, 호텔에서 구워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방금 창고에서 볶은 돼지고기를 낯선 이들과 나눠 먹기도 민망하다. 택시를 타야 하는 거리의 그 식당이 마지막 선택지다.     


"원한다면 택시를 불러줄게요."     

부창부수라고 금세 친절이 전염되었는지 부탁도 하기 전에 카카오 앱을 켰다.     

주변 근거리의 택시를 불러오는 동안 남자는 깻잎 한 봉지를 골라 계산대에 내려놓았다.     

"이게 뭔지 알아요? 이걸 좋아해요?"     

"그럼요. 삼겹살 먹을 때 깻잎 없이는 못 먹어요. 목이 막힌다고나 할까? 식당에서 주는 걸로도 부족해요."     

남자는 두 손으로 자기 목을 조이며 숨이 넘어가는 시늉을 했다. 깻잎을 좋아하는 외국인은 많지 않던데 별난 사람이다. 요즘 한국 음식이 유행이라더니 대세를 실감하는 중이다.               

"아이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칠 거예요?"     

여자에 비해 활달한 성격의 남자는 궁금한 점이 많은 것 같다.     

"기회가 된다면요. 하지만 영어를 먼저 배우고 그다음이 중국어라 생각해서 아직 시작 안 했어요."     

"맞아요. 전 지금 대련에 있지만 1년에 한 번씩 중국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며 살고 있어요. 제 친구들 대부분이 당신이 어학 연수했던 그곳에 살고 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가웠어요.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한국에서 즐겁게 여행하시길 바랄게요."     

우리는 작별의 인사를 했지만, 날이 날인만큼 카카오 택시는 바빠 잡히지 않았다. 대신 택시가 몰려있을 만한 장소를 알려주었다.     

"신니엔콰이러"     

새해 축하 인사를 하며 우리의 짧았던 시간은 끝이 났다. 남편의 표정이 일을 잘 끝낸 듯 상쾌하다.    

  

 남편의 친절은 목적에 맞게 의도된 반응으로 이어졌다.     

"아저씨 영어를 잘하시더라고요. 깜짝 놀랐잖아요. 사람 다시 보게 되었어요."     

다음날 계산을 하던 단골손님이 먼저 아는 체를 했다.     

"원래 하던 일이 그런 쪽이었어요."     

그리고 남편은 꼭 이런 대화에선 뒤로 한걸음 물러선 채 내가 대응하기를 바라며 얌전을 떨고 있다.     

"근데 왜 지금 마트를 하세요?"     

"장사해서 빨리 돈 벌고 일찍 은퇴하고 쉬려고요. 근데 점점 더 고생길이 열린 것 같아요. 하하"     

"저도 장사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사장님도 길을 잘못 들었네요 하하."     

결국 신세 한탄으로 끝이 난 대화였지만 남편은 목적을 달성했다. 오토바이 뒤 칸 노란 바구니에 짐을 싣고 배달하러 다니던 아저씨가 영어를 하니 배움이 짧아 장사하던 사람에서 분명한 목적이 있어 자영업에 뛰어든 인재로 이미지가 바뀌었다. 자신을 알아주는 것 같아 흐뭇한 남편이다. 외국인에게 친절한 가장 큰 이유다.               

슈퍼마켓을 배경으로 찍는 [어쩌다 사장]이라는 예능이 있다. 벌써 시즌3이고 현재도 방송 중이다. 지금은 아마 외국에서 찍는 거로 보인다. 첫 시즌을 호감 있게 보다 두 번째 시즌부터는 보질 않는다. 나와 같은 일을 하는 연예인들의 슈퍼 이야기가 재미있을법하지만 유독 재미없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너무 익숙한 일이라서다. 물건을 진열하고 그 와중에 실수를 하고 실수를 만회하고 손님을 대하는 모든 것들이 새로울 게 전혀 없다. 매장에서 내내 했던 일을 퇴근 후, 휴식 시간에도 다시 하는 기분이랄까?     

결국, 힐링도 되지 않고 신선함도 없고 신경을 자극할 재미도 없는 노잼으로 느껴진다. 자주 가는 맘카페에 어떤 분이 '어쩌다 사장을 보고 있으면 아이쿠님이 생각나요.'라고 글을 써주셨는데 무의식적으로 '죄송하지만, 전 그 프로를 잘 안 봐요. 늘 하는 일이라 재미가 없어요'라고 댓글을 달 정도였다..  

             

두 번째는 부자연스럽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본 시즌2 초반까지는 출연자들의 인위적이고 과한 친절이 불편했다. 처음 온 손님에게 허리를 굽히고 눈을 맞추며 손을 붙잡고 "어머니"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내뱉는다. 노잼 프로가 "어머니"라고 부르는 순간 나의 말초신경이 자극되었다.     

나는 친절해지려고 애쓰는 사람이지만 처음 온 손님에게 그 정도의 다정함을 보이진 못한다. 그저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의 연습 되고 훈련된 인사와 태도로 내 역할은 끝난다. 예전에 옷을 사러 매장을 방문하면 옆에서 보이는 과잉 친절이 아주 불편했다. 점원이 이 옷, 저 옷을 추천하며 말을 걸어오면 고맙기는커녕 어서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원하지 않은 친절은 상대에게 부담을 준다. 그런데 "어머니"라고?   


 지금껏 써 온 슈퍼이야기의 주인공들도 몇 년을 봐온 손님들이다. 아무리 손님과 내가 서로 이해관계 없이 응원하고 격려만 하면 되는 아름다운 관계라 정의하였지만 기본적인 신뢰가 쌓일 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프로는 나의 마인드를 무시하는 듯 처음부터 싹싹하고 다정하다. 아무리 서비스직이라지만 단계가 없고 과정이 짧다. 진심이 없다며 찡그렸다. 식당에서 흔히 부르는 "이모님"도 내뱉지 못하는 나로서는, 친해지는 과정이 필요한 나로서는 자괴감도 살짝 들었다.    

           

하지만 벌써 시즌3이니 그 인기는 증명되었다. 나와 달리 시청자는 프로그램 취지에 맞게 친절하고 감동적인 몇몇 요소들로 인해 더욱 좋아한다. 의도적이고 목적이 있다며 불편한 친절이라고 폄하하는 나와 다른 관점이다. 남편이 외국인에게 친절한 장면이 오버랩된다. 상대에 대한 배려보다는 자신의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키려 애쓰는 모습이라 깍아내렸다. 하지만 오래도록 설명하고 크게 제스처를 취하는 남편에게 외국인들은 하나같이 "오 땡큐, 땡큐"를 연발하며 미소를 지었다. 마치 어쩌다 사장을 보며 힐링하고 감동하는 시청자들처럼 남편의 행동에 K-친절이라며 감동하였다.     

          

남편이든 어쩌다 사장이든 의도된 행동이면 어떠한가. 상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그만이지. 그리고 남편의 목적 있는 친절이 더 큰 효과를 가져올지 모를 일이다. 방금 저 문을 나간 외국인들이 여행 중 설사 불미스러운 일을 겪더라도 남편을 상기하며 마음을 다스릴 테다. 편견을 갖지 않도록 노력할 테다.     

[어쩌다 사장]이 시청자들의 슈퍼마켓에 대한 이해를 돕는 것처럼. 그래서 나의 댓글에 다시 달린     

"아이쿠님이 하루 종일 어떤 일을 하면 얼마나 힘드실지 알게 되어 이 프로를 좋아해요." 댓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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