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잠깐만 나와봐. 빨리!"
남편은 카운터를 보고 난 아이들과 창고에서 송년 음식을 준비 중이었어요. 보통은 5시 전에 퇴근하기에 바쁘지만, 오늘은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 식사를 위해 돼지고기를 볶는 중이었지요.
"무슨 일이야?"
달음박질하며 묻는데 남편 옆에 서 있는 황갈색 머리의 콧대 높은 외국인이 날 보며 인사해요. 잠시 당황하는 나를 간파한 남편이 잘난 척 말했어요.
"뉴질랜드 사람이래."
"어…. 그래? 근데 나는 왜 부른 거야?"
남편은 영어를 곧잘 해요. 마트를 하기 전 다니던 회사에서 해외업무를 담당했고 출장도 자주 다녔거든요. 공항에서 돌아오는 남편을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며 아이와 함께 무슨 선물을 사 왔을까 내기하곤 했어요. 비록 네팔의 염소 치즈, 인도 모링가 등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는 새로운 문물이었지만 신선한 기분은 있었지요. 주재원 시절의 터키와 유럽에 대한 에피소드는 이젠 제가 대신 줄줄 읊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이 들었고요. 그 말은 즉, 지금 영어 한마디 못 하는 나의 도움이 전혀 필요 없는 상황인데 왜 나를 불렀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의미에요!
"헬로우" 조차도 붕어처럼 입을 뻥긋거리는 수준이라 벌써 얼굴이 벌게지는데 말이죠. 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하여 나를 이리 골탕 먹이려는 건지 재빠르게 하루의 기억을 되감기 할 정도였습니다.
"같이 온 사람이 중국 여자야. 내가 당신 중국어 할 줄 안다니까 궁금하대서 불렀어."
이런. 내가 중국어를 할 수 있다는 건 과거, 그것도 15년 전의 오래된 일로 이미 소멸되고 없는 능력이랍니다. 어설프게 중국어 한답시고 아는 체가 싫어 중국인 손님들에게조차 일체 중국어 한마디 건네지 않는데 왜 자꾸 시험에 들게 하는지 옆눈으로 남편을 쏘아보았어요.
"어떻게 중국어를 할 줄 알아요?"
초급 수준의 중국어가 귀에 꽂혀요. 중국에서 5년을 살았던 짬밥이 있는데 이런 기본적인 것까지 잊으면 안 되는 것이지요. 한데 중국 여자 특유의 하이톤과 성조가 아닌 저음의 어설픈 중국어예요.
서툰 중국어의 주인공은 아까 그 뉴질랜드인으로, 파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주 흥미로우면서도 조금은 흥분한 목소리였어요. 이 시골 같은 동네의 마트 아줌마가 중국어를 하자 적잖이 놀라는 기색이었고 대화를 계속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어요.
"당신은 어떻게 중국어를 하나요?“
저도 궁금합니다. 중국어를 하는 뉴질랜드인이 어떻게 이 동네까지 오게 되었는지.
"난 지금 중국 대련에 있어요. 그래서 조금 할 줄 알아요"
"대련은 예전에 여행으로 가보았어요. 해산물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나네요."
사실 외국인끼리 중국어를 하면 더 잘 들린답니다. 서로 어설픈 발음과 성조이지만 할 수 있는 언어가 초급에서 중급 사이로 어렵지 않고 실전이 아닌 책에서 배웠을 법한 말을 하기에 금방 알아듣지요. 마치 콩글리시에 내 귀가 탁 뜨이는 것처럼요.
"중국어를 설마 독학한 거예요??"
인제야 제대로 된 하이톤의 중국어가 들려왔어요. 작은 키에 마른 몸으로 전형적인 중국 남쪽 지방 체형의 여자예요.
"중문 전공이고 중국에서 어학연수를 했어요. 일도 몇 년 하구요. 근데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며칠 여행을 와서 근처에 묵어요. 저녁을 먹기 위해 나왔는데 주변 식당이 다 문을 닫아서 돌아다니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어요. 한국 불고기를 먹고 싶은데 어딜 가야 할까요?"
"불고기 아니고 삼겹살."
우리의 대화에 집중하던 남자가 중국어보다 정확한 발음의 한국어로 “삼겹살”을 외쳤습니다.
"어쩌죠? 오늘은 식당 문 연 곳이 많지 않아요. 연휴잖아요. 조금 멀리 가도 괜찮다면 자주 가는 고깃집을 소개해 드릴게요.“ 남의 일에 냉소적인 남편이 웬일인지 적극적으로 나섭니다.
아니, 남편은 외국인에게 항상 적극적인 태도를 취했어요. K-슈퍼마켓의 K-친절을 베풀겠다는 큰 뜻은 아니에요. 구석진 마트의 계산대에 앉아 오는 손님을 기다리며 눈물 나게 하품하는 지금의 처지와 달리, 한때는 치열했던 직장인의 삶을 떠올리기에 아주 좋은 소재이거든요. 유럽과 아시아를 넘나들었던 지난 과거가 지금과는 다른, 적어도 겉모습은 화려했던 기억 말입니다. 더 중요한 점은 아직 녹슬지 않는 자신의 영어 실력을 뽐내고 싶었고 그러자면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어야 했지요. 영어로 대화하는 사이에 계산하던 단골들은 그동안 한국어 능력이 의심되었던 남편을 다시 한번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남편은 그 시선을 꽤 즐겼습니다. 오늘도 자신의 이미지를 한껏 업그레이드할 기회가 왔고 그 기회에 나를 동참시키기 위해 애타게 부른 게 틀림없습니다.
식당에 전화해 식사 가능한지를 묻고는 위치와 사진을 그들에게 보여주는 행동을 최대한 크게 하고 대화는 오래도록 길게 했지요. "하이" "땡큐"를 외치는 외국인 손님에게 굳이 한국어로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로 답하며 한국에 왔으면 한국어를 배우시라는 마음속 언어를 하는 나와는 다른 모습입니다.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우리 손님 중 고깃집 하는 분 있잖아. 그 집 맛있는데 문 열었는지 지금 보고 올게"
말릴 새도 없이 오토바이를 타고 저 멀리 가버렸어요. 천지가 개벽할 노릇입니다. 오늘따라 더 과잉 친절이네요. 하지만 단골집 식당도 문이 닫혔다는 나쁜 소식을 전해야 했습니다. 우리 가게에서 고기를 팔지만, 호텔에서 구워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방금 창고에서 볶은 돼지고기를 낯선 이들과 나눠 먹기도 민망하니 택시를 타야 하는 거리의 그 식당이 마지막 선택지로 남았습니다.
"원한다면 택시를 불러줄게요."
부창부수라고 금세 친절이 전염되었는지 부탁도 하기 전에 카카오 앱을 켰습니다. 주변 근거리의 택시를 불러오는 동안 파란 눈의 외국인은 깻잎 한 봉지를 계산대에 내려놓았어요.
"이게 뭔지 알아요? 이걸 좋아해요?"
"그럼요. 삼겹살 먹을 때 깻잎 없이는 못 먹어요. 목이 막힌다고나 할까? 식당에서 주는 걸로도 부족해요."
남자는 두 손으로 자기 목을 조이며 숨이 넘어가는 시늉을 했습니다. 깻잎을 좋아하는 외국인은 많지 않던데 참 별난 사람입니다. 아니면 외국에서 한국 음식이 유행이라더니 그 대세를 실감하는 중이거나요.
"아이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칠 거예요?"
여자에 비해 활달한 성격의 남자는 궁금한 점이 많은 듯 계속해서 말을 시켜왔습니다.
"기회가 된다면요. 하지만 영어가 먼저라 중국어는 아직 시작 안 했어요."
"맞아요. 전 지금 대련에 있지만 1년에 한 번씩 중국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며 살고 있어요. 제 친구들 대부분이 당신이 어학 연수했던 그곳에 살고 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가웠어요.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한국에서 즐겁게 여행하시길 바랄게요."
우리는 작별의 인사를 했지만, 날이 날인만큼 카카오 택시는 잡히지 않았어요. 대신 택시가 몰려있을 만한 장소를 알려주었습니다.
"신니엔 콰이러"
새해 축하 인사를 하며 우리의 짧았던 시간은 끝이 났습니다. 남편의 표정이 일을 잘 끝낸 듯 상쾌해 보였고 나 역시 조금은 뿌듯한 마음이 들더군요.
남편의 친절은 목적에 맞게 의도된 반응으로 이어졌습니다.
"아저씨 영어를 잘하시더라고요. 깜짝 놀랐잖아요. 사람 다시 보게 되었어요."
다음날 계산을 하던 단골손님이 먼저 아는 체를 했거든요.
"원래 하던 일이 그런 쪽이었어요."
그리고 남편은 꼭 이런 대화에선 뒤로 한걸음 물러선 채 내가 대응하기를 바라며 얌전을 떨고 있지요.
"근데 왜 지금 마트를 하세요?"
"장사로 빨리 돈 벌어 일찍 은퇴하려고요. 제 꿈이 한량이거든요. 근데 점점 더 고생길이 열린 것 같아요. 하하"
"저도 장사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사장님도 길을 잘못 들었네요 하하."
결국 신세 한탄으로 끝이 난 대화였지만 남편은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오토바이 뒤 칸 노란 바구니에 짐을 싣고 배달하러 다니던 아저씨가 영어를 하니 배움이 짧아 장사하던 사람에서 분명한 목적이 있어 자영업에 뛰어든 인재로 이미지가 바뀌었지요. 자신을 알아주는 것 같아 흐뭇한 남편입니다. 외국인에게 K-친절을 베푸는 가장 큰 이유지요.
슈퍼마켓을 배경으로 찍는 [어쩌다 사장]이라는 예능이 있습니다. 벌써 시즌 3이고 현재도 방송 중이지요. 쏠쏠한 재미와 호기심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데 첫 시즌 이후로는 안 보고 있어요. 나와 같은 일을 하는 연예인들의 슈퍼 이야기가 재미있을법한데 재미없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너무 익숙한 일이라서예요. 물건을 진열하고 그 와중에 실수를 하고 실수를 만회하고 손님을 대하는 모든 것들이 내 입장에서는 새로울 게 전혀 없어요. 매장에서 내내 했던 일을 퇴근 후, 휴식 시간에도 다시 하는 기분이랄까요? 연예인을 보는 재미는 있지만 스토리는 노잼이지요. 자주 가는 맘카페에 어떤 분이 '어쩌다 사장을 보고 있으면 아이쿠님이 생각나요.'라고 썼는데 무의식적으로 '죄송하지만, 전 잘 안 봐요. 늘 하는 일이라서요. ㅠㅠ'라고 댓글을 달 정도였어요.
두 번째 이유는 불편함입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볼 때까지는 출연자들의 인위적이고 과한 친절이 불편했어요. 처음 온 손님에게 허리를 굽히고 눈을 맞추며 "어머니"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내뱉는 장면들은 자꾸 나를 되돌아보게 했거든요. 나는 친절해지려고 애쓰는 사람이지만 처음 온 손님에게 그 정도의 다정함을 보이진 못해요. 그저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의 연습 되고 훈련된 인사와 태도를 유지하지요. 예전에 옷을 사러 매장을 방문하면 옆에서 보이는 과잉 친절이 아주 불편했어요. 점원이 이 옷, 저 옷을 추천하며 말을 걸어오면 고맙기는커녕 어서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더군요. 원하지 않은 친절은 상대에게 부담을 준다는 생각으로 손님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 애썼어요.
지금껏 써 온 슈퍼 이야기의 주인공들도 몇 년을 봐온 손님들입니다. 아무리 손님과 내가 서로 이해관계 없이 응원하고 격려만 하면 되는 아름다운 관계라 정의하였지만 기본적인 신뢰가 쌓일 만큼의 시간은 필요해요. 그런데 이 프로는 나의 마인드를 무시하는 듯 처음부터 너무 싹싹하고 다정하니, 마치 과정 없이 결론에 도달하는 느낌이에요. 방송이라서 가능한 걸까? 찡그렸어요. 식당에서 흔히 부르는 "이모"도 내뱉지 못하는 나로서는, 친해지는 과정이 필요한 나로서는 자괴감도 살짝 들었고요.
하지만 벌써 시즌3이니 그 인기는 증명되었습니다. 프로그램 취지에 맞게 친절하고 감동적인 몇몇 요소들을 보며 시청자들은 감동하고 따스한 안정감을 느낍니다. 방송에나 적합한 불편한 친절이라고 속이 꼬인 나와는 다른 관점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남편이 외국인에게 친절한 장면이 겹칩니다. 상대에 대한 배려보다는 자신의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키려 애쓰는 모습이라 깎아내렸어요. 하지만 오래도록 설명하고 크게 제스처를 취하는 남편에게 외국인들은 하나같이 "오 땡큐, 땡큐"를 연발하며 한 손을 가슴에 대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어요. 어떤 외국인은 다시 찾아오기도 했고요. 마치 어쩌다 사장을 보며 힐링하고 감동하는 시청자들처럼 남편의 행동에 K-친절이라며 감동했습니다.
일부분만 보며 아니꼽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남편이든, [어쩌다 사장]이든 의도된 행동이라도 그 효과는 상당했으니까요. 우선 상대에게 감동을 주었고 나아가 나비효과를 가져올지 모를 일이지요. 방금 저 문을 나간 외국인들이 여행 중 설사 불미스러운 일을 겪더라도 남편을 상기하며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편견을 갖지 않을 테니까요.
"그래도 아이쿠님이 어떤 일을 하며, 얼마나 힘드실지 알게 되어 이 프로를 좋아해요."
인위적이라 안 본다는 나의 댓글에 다시 달린 위의 댓글은 나를 위로하듯 따스했습니다. 결국 [어쩌다 사장]을 통해 나도 감동하고 힐링한 기분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남편과 [어쩌다 사장]이 의도적이면 어떤가요. 법을 어긴 것도, 사람을 헤친 것도, 누군가를 속인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친절과 감동을 주었으니 그 자체가 이미 선행임을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