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도 파나요?
"빈 상자 몇 개 가져가도 될까요?"
주변 상가 사람들을 비롯해, 손님들은 박스가 필요하면 제일 먼저 우리 가게로 달려옵니다.
"생수병 큰 걸로 빈 것 있소? 내가 쓸 일이 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집에 없네"
막걸릿집 사장님은 요즘 무얼 하는지 이틀째 빈 생수통을 찾고 있습니다.
위와 같이 돈을 주고 사지 않는, 서비스 물건을 찾는 사람들은 공통으로 열린 문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부탁하는데 그 모양새가 영 미안한 폼입니다.
"그럼요! 필요한 만큼 가져가세요."
매너 좋은 단골들에게 이 정도 서비스는 얼마라도 해줄 수 있지요. 오히려 마음의 부담을 덜어주려 애쓰게 된답니다. 도레미파솔 중 '솔'에 해당하는 목소리 톤에 내 나이와 맞지 않는 상큼함까지 얹어서요. 당신의 부탁을 흔쾌히, 기분 좋게 들어 주겠다는 스윗한 표현으로 문 앞에서 미안한 폼으로 서 있지 말고 어서 들어오시라는 손짓이지요.
물건 정리 끝에 나오는 빈 상자들은 크기도 두께도 다양합니다. 라면, 과자 박스들은 똑같은 두께지만 크기가 제각각이고 과일 상자들은 두께부터가 상당한 묵직함을 자랑하지요. 무엇을 넣어도 거뜬히 버틸 것 같은 과일 상자는 알뜰살뜰한 어머님의 차지입니다. 손수 키운 감자, 고구마, 호박 등을 보내는데 라면상자는 너무나도 약한 그대랍니다.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 외모로 어머님에게는 불합격 통지를 받았다지요. 그에 비해 두툼한 과일 상자는 우리 집 현관문까지 안전 배송을 보장하는 튼실한 외양으로 어머님의 사랑을 독차지합니다. 그래서 매번 우리의 안부 끝에 과일 상자 안부까지 묻는 걸 잊지 않습니다.
귀한 과일 상자는 저 멀리 보내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온다 치고 남은 박스들은 장바구니를 깜빡 잊은 손님들을 위해 매장 한쪽에 쌓아둡니다. 그러고도 남는 박스는 가게 앞에 내놓고요. 수시로 가게 앞을 오가며 리어커에 빈 상자를 싣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위해서입니다. 한데 손님들의 부탁으로 가게 앞의 박스들을 하나둘 빼주길 몇 번 반복하면 탑처럼 쌓였던 상자는 어느새 바닥이 보입니다. 괜스레 빈 상자를 갖고자 이 주위를 맴돌았을 그분들에게 미안하지요. 하지만 매번 말했듯이 장사꾼인 나는 단골이 먼저입니다. 리어커는 다음에 꽉꽉 채워줄 것을 다짐하며 거침없이 상자 탑을 무너뜨린답니다.
"혹시 내년 달력 들어왔어요? 하나 남으면 사무실에 걸어놓게."
옆 원룸 관리인 아저씨는 젊었을 때 오랜동안 슈퍼를 운영했습니다. 1년 주기의 슈퍼 시스템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지요. 그 주기에는 신년 달력도 포함됩니다. 회사의 로고가 찍힌 여러 달력 중 하나를 골라줌으로써 아저씨의 은혜에 보답합니다. 은혜란 노후한 이 동네의 최고 난제이자 갈등의 씨앗, 흉흉한 인심의 주범인 주차 문제에서 해방해 준 일을 말합니다. 꼬장꼬장한 성격의 아저씨는 아무에게나 허락하지 않는 원룸 주차장의 한자리를 나에게 허하시었어요. 남아도는 달력으로라도 보은함으로써 인간의 도리를 했다는 안도감이 드니 감사의 인사를 할 사람은 오히려 내 쪽입니다.
막 주차 자리를 얻었을 땐 하늘의 달이라도 따다 주고 싶었어요. 자칫 부담스러울까 그 마음 억누르고 음료수나 아이스크림으로 마음을 전하려 했습니다. 한데 이 작은 뇌물마저도 한사코 마다하며 독야청청을 뽐내니 번번이 민망함에 몸 둘 바를 모르겠더군요. 게다가 주차도 모자라 소음까지 보태는 상황에는 민망함을 넘어 불안해졌어요. 소음이란 자동차 소리를 말합니다. 차 안에서 잠시 쉬고 싶을 땐 여름이면 에어컨을 켜고, 겨울엔 히터를 틀기 위해 시동을 걸어야 하잖아요. 지친 날, 쾌적한 환경에서 낮잠 30분은 초점 잃은 눈동자를 번쩍 뜨이게 하고 안개 낀 듯 흐리멍덩한 정신을 햇볕 쨍한 날 말린 빨래처럼 뽀송하게 해요. 내 정신이 새로 태어나는 그 시간 자동차 소음까지 감당해야 하는 아저씨가 다른 핑계로 쫓아내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거든요. 자고로 사람은 주고받아야 뒤탈이 없는 법인데 나의 여러 성의를 자꾸 뿌리치니 불안할 수밖에요.
다행스럽게도 곧 초조함을 말끔히 없앨 완벽한 기회가 찾아왔어요. 아저씨는 슈퍼에 있을 만한 물건이지만 나의 자금이 들어가지 않은, 거래처에서 서비스로 줄 만한 것들을 종종 찾은 것이죠. 달력이 딱 그래요. 소소한 물건을 손에 넣고선 굉장히 좋아하시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유레카를 외쳤어요. 오호. 취향 파악 완료. 그때부터 로비스트라도 되는 양 아저씨를 위한 온갖 뇌물 거리를 찾았습니다.
"원룸에 나오는 빈 병중에 술병 많지 않아요?"
"많지. 애들이 맨날 술을 먹나 포대로 나와."
"그럼 그거 가져오시면 공병값 계산해 드릴게요. 필요하신 물건으로 바꾸셔도 되고요."
나의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몇 번째 포대에 술병을 담아 와 필요한 청소도구로 바꿔갔으니, 나의 계획이 통하였다 하겠습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 치고 가재 잡는 우리는 이제 공생관계가 되었고 더할 나위 없이 편한 요즘이랍니다.
"혹시 봉투 하나 얻을 수 있어요? 딱 한 장이 필요한 데 사기도 그렇고."
어? 이건 좀 선 넘는데요? 잡화 코너에 떡하니 고운 흰 빛깔을 뽐내고 있는 줄 뻔히 알면서 사기는 그러하다고요? 파는 물건을 공짜로 달라는 건 장삿집에서 할 말이 아니죠!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꾹꾹 누르면서 서랍 속에서 내가 쓰다 남은 봉투 한 장을 꺼내어 건넸습니다. 그래 단골이니까 이 정도는 이해하죠. 뭐.
만물상 노릇을 하던 슈퍼는 시간이 지나면서 만사형통의 기능으로 이어집니다.
“나 잠깐 들를 데가 있어서 그러는데 이것 좀 여기다 좀 뒀다 갔다 와도 될까?"
집으로 향하던 중 갑작스러운 연락이 왔더래요. 양손에 쥔 묵직한 검은 봉지가 방향을 틀어야 할 발걸음을 무겁게 눌러 난감하던 차에 우리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고 했어요.
"무거운 짐일랑 한쪽에 두고 어서 훨훨 날아가세요."
'솔 '음을 기본 톤으로 상큼함에 이제는 유머까지 덧붙였답니다. 손님은 나의 바람대로 발걸음도 가볍게 바람처럼 날아갔답니다.
"제 친구가 여기 자주 오는 OOO 인데 지금 집에 없어서 그러는데요. 이 반찬 좀 여기도 두고 가도 될까요? 친구가 퇴근길에 찾아간다고 하네요"
‘저 종이가방의 묵직한 물건이 반찬이 아니라 마약이면 어떡하지? 나도 공범이 되는 건가? CCTV가 있으니, 무죄를 입증할 수 있을 테지?’
짧은 한 문장의 부탁을 듣는 시간 동안 범죄와 그에 따른 대처 방법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집니다. 고민 끝에 몇 년 동안 별 사고 없이 우리 가게를 이용한 손님에 대한 믿음으로 종이가방을 받았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를 위해 하루 종일 부엌에서 정성을 쏟았을 낯선 여자 또한 모른 척할 수 없었지요.
"이리 주세요. 냉장고에 넣어 둘게요."
장사를 하다 보면 손님들의 부탁을 무 자르듯 딱 거절하기 힘든 경우가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불친절하고 장사요령이 없다는 소리를 듣기 쉽상이거든요. 그렇다고 무조건 들어주기에는 위험 요소가 도사립니다. 결국 융통성 있는 결정을 해야 하는데 상황 파악이라는 게 경험과 타고난 감에서 나오기에 처음엔 많은 실수를 했답니다. 그 실수가 단순히 글감이 될 만한 어이없는 일이면 다행이지만 경찰을 대면 해야 하는 아주 귀찮은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귀찮음과 서비스 사이의 균형을 잘 맞추는 게 아주 중요하지요.
"사장님. 우체국 택배 하나 거기다 두라고 했거든요? 잠시 맡아주시면 제가 이따 찾으러 갈게요."
아주 중요한 택배라고 했습니다. 원룸 손님들은 1인 가구의 가장으로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밖으로 돌아야 하니 갑작스러운 방문이나 택배를 받아 줄 가족이 없습니다. 그 순간 부탁할 곳은 동네에서 자주 가는 슈퍼뿐이지요. 그 사정을 알기에 상하거나 손상의 위험이 있는지 확인하고 한쪽 자리를 내주게 됩니다.
이쯤 되면 슈퍼는 물건뿐 아니라 마음마저 파는 만물상이 틀림없습니다. 마음을 산 퇴근길 손님들은 자기 방식으로 감사를 전합니다.
"요즘 붕어빵 파는 데 별로 없는데 오는 길에 있더라고요. 하나 맛보세요."
바라고 한 일이 아니기에 손사래 치며 사양하지만, 손님 또한 물러서지 않습니다. 여러 번의 실랑이 끝에 손이 부끄럽다는 말에 내가 지기로 했어요. 작은 붕어빵 하나로 마음이 따뜻해지니 빵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기분이 참 좋습니다.
장사꾼이지만 때론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마음이 있습니다. 돈만 바라보았다면 90세 할아버지의 인생 넋두리도 초등생 아이의 말장난도 받아주지 않았을 거예요. 물론 아주머니들의 긴긴 수다에 장단 맞추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차라리 그 시간에 물건을 추천하는 쪽이 더 돈을 벌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전 우리 가게에 들르는 손님이 편하게 왔다 기분 좋은 마음으로 나가길 바랍니다. 어차피 동네 장사라 오는 손님은 정해져 있으니, 물건과 더불어 마음도 팔고자 합니다. 내 마음 같지 않아 서운한 일도 생기지만 찰떡같이 알아주고 더 큰 배려와 감사를 전하는 손님들이 더 많습니다. 그럴 때면 사람 간의 따스한 정에 위로받습니다. 진상과 갑질로 뉴스를 채우는 세상이라도 아직은 살 만하다고 느답니다.
점점 사라지고 없어 발품을 팔아야 볼 수 있는 붕어빵 가게. 많고 많은 동네 가게 중 마음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나의 마트는 붕어빵 가게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니 빈 상자 하나, 빈 페트병, 자리 한쪽은 나의 붕어빵입니다. 종이봉투 속 온기를 뿜어내는 붕어빵처럼 나의 붕어빵 덕에 손님 또한 잠시 따뜻했다면 남는 장사였다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