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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쿠 Dec 31. 2023

다 판다.

"빈 박스 몇 개 가져가도 될까요?" 

주변 상가 사람들을 비롯해, 손님들은 박스가 필요하면 제일 먼저 우리 가게로 온다. 

"생수병 큰 걸로 빈 것 있소? 내가 쓸 일이 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집에 없네" 

막걸릿집 사장님은 요즘 무얼 하는지 이틀째 빈 생수통을 찾는다. 

위와 같이 돈을 주고 사지 않는, 서비스 물건을 찾는 사람들은 공통으로 열린 문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부탁하는데 그 모양새가 영 미안한 폼이다. 

"그럼요! 필요한 만큼 가져가세요." 

매너 좋은 단골들에게 이 정도 서비스는 얼마라도 해줄 수 있다. 오히려 마음의 부담을 덜어주려 애를 쓰게 된다. 도레미파솔 중 '솔'에 해당하는 목소리 톤에 내 나이와 맞지 않는 상큼함까지 얹었다. 당신의 부탁을 흔쾌히, 기분 좋게 들어 주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현이다. 그러니 문 앞에서 미안한 폼으로 서 있지 말고 어서 들어오시라는 손짓이다. 


물건 정리 끝에 나오는 빈 상자들은 크기도 두께도 다양하다. 라면, 과자 박스들은 똑같은 두께지만 크기가 제각각이고 과일 상자들은 두께부터가 상당한 묵직함을 자랑한다. 무엇을 넣어도 거뜬히 버틸 것 같은 과일 상자는 알뜰살뜰한 어머님의 차지다. 손수 키운 감자, 고구마, 호박 등을 보내는데 라면상자는 너무나도 약한 그대라, 오는 도중에 밑이 터질지 모를 일이다. 그에 비해 두툼한 과일 상자는 안에 있는 농산물끼리 서로 부딪쳐 상처가 날지언정 박스 자체는 흠집 없이 우리 집 현관문까지 안전 배송된다. 그래서 어머님은 우리의 안부 끝에 과일 상자 안부까지 묻는 걸 잊지 않는다. 귀한 과일 상자는 저 멀리 보내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온다 치고 남은 박스들은 장바구니를 깜빡 잊은 손님들을 위해 매장 한쪽에 쌓아둔다. 그러고도 남는 박스는 가게 앞에 내놓는다. 수시로 가게 앞을 오가며 리어커에 빈 상자를 싣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위해서다. 한데 손님들의 부탁으로 가게 앞의 박스들을 하나둘 빼주길 몇 번 반복하면 탑처럼 쌓였던 자리는 어느새 바닥이 보인다. 괜스레 이 박스를 갖고자 리어카를 끌고 이 주위를 맴돌 그분들에게 미안해진다. 하지만 매번 말했듯이 장사꾼인 나는 단골이 먼저다. 다음에 꽉꽉 채워줄 것을 다짐하며 거침없이 상자 탑을 무너뜨린다.


"혹시 내년 달력 들어왔어요? 하나 남으면 사무실에 걸어놓게 좀 줄 수 있나 해서

옆 원룸 관리인 아저씨는 젊었을 때 오랜 시간 동안 슈퍼 운영을 했다. 

1년 주기의 슈퍼 시스템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안다. 그리고 그 주기에는 신년 달력도 포함된다. 회사의 로고가 찍힌 여러 달력 중 하나를 골라줌으로써 아저씨의 은혜에 보답했다. 은혜란 노후한 이 동네의 최고 난제이자 갈등의 씨앗, 흉흉한 인심의 주범인 주차 문제에서 해방시켜 준 일을 말한다. 꼬장꼬장한 성격의 아저씨는 아무에게나 허락하지 않는 원룸 주차장의 한자리를 나에게 허하시었다. 남아도는 달력으로라도 보은함으로써 인간의 도리를 했다는 안도감이 드니 감사의 인사를 할 사람은 오히려 내 쪽이다


막 주차 자리를 얻었을 땐 하늘 같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늘의 달이라도 따다 주고 싶었다. 자칫 부담스러울까 싶어 음료수나 아이스크림으로 마음을 전하려 했다. 한데 이 작은 뇌물마저도 한사코 마다하며 독야청청을 뽐내니 번번이 민망함에 몸 둘 바를 모르겠더라. 게다가 주차도 모자라 소음까지 보태는 배은망덕한 나의 행태에는 민망함을 넘어 불안해졌다. 차 안에서 잠시 쉬고 싶을 땐 여름이면 에어컨을 켜고, 겨울엔 히터를 틀기 위해 시동을 걸어둔다. 지친 날쾌적한 환경에서 낮잠 30분은 초점 잃은 눈동자를 번쩍 뜨이게 하고 안개 낀 듯 흐리멍덩한 정신을 햇볕 쨍한 날 말린 빨래처럼 뽀송하게 한다. 이 귀한 시간 누리게 해준 아저씨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하지만 내 정신이 새로 태어나는 그 시간 자동차 소음까지 감당해야 하는 아저씨가 다른 핑계로 쫓아내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다행스럽게도 곧 초조함을 말끔히 없앨 완벽한 기회가 찾아왔다. 

아저씨는 슈퍼에 있을 만한 물건이지만 나의 자금이 들어가지 않은, 거래처에서 서비스로 줄 만한 것들을 종종 찾았다. 달력이 좋은 예다. 기꺼이 망설임 없이 드렸다. 소소한 물건을 손에 넣고선 굉장히 좋아하시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유레카를 외쳤다. 오호. 취향 파악 완료. 그때부터 로비스트라도 되는 양 아저씨를 위한 온갖 뇌물 거리를 찾았다. 

"원룸에 나오는 빈 병중에 술병 많지 않아요?" 

"많지. 애들이 맨날 술을 먹나 포대로 나와." 

"그럼 그거 가져오시면 공병값 계산해 드릴게요. 필요하신 물건으로 바꾸셔도 되고요." 

나의 예상은 적중했다. 몇 번째 포대에 술병을 담아 와 필요한 청소도구로 바꿔갔으니, 나의 계획이 통하였다 하겠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 치고 가재 잡는 우리는 이제 공생관계가 되었고 더할 나위 없이 편하다. 


"혹시 봉투 하나 얻을 수 있어요? 딱 한 장이 필요한 데 사기도 그렇고." 

'어? 이건 좀 선 넘네. 잡화 코너에 떡하니 고운 흰 빛깔을 뽐내고 있는 줄 뻔히 알면서 사기는 그러하다고? 파는 물건을 공짜로 달라는 건 장삿집에서 할 말이 아니죠'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꾹꾹 누르면서 서랍 속에서 내가 쓰다 남은 봉투 한 장을 꺼내어 건넸다. 그래 단골이니까 이 정도는 이해하자. 


만물상 노릇을 하던 슈퍼는 시간이 지나면서 만사형통의 기능으로 이어진다. 

"나 잠깐 들를 데가 있어서 그러는데 이것 좀 여기다 좀 뒀다 갔다 와도 될까?" 

집으로 향하던 중 갑작스러운 연락이 왔더란다. 양손에 쥔 묵직한 검은 봉지가 방향을 틀어야 할 발걸음을 무겁게 눌러 난감하던 차에 우리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고 했다. 

"무거운 짐일랑 한쪽에 두고 어서 훨훨 날아가세요." 

'솔 '음을 기본 톤으로 상큼함에 유머까지 덧붙였다. 손님은 나의 바람대로 바람처럼 발걸음도 가볍게 날아갔다. 


"제 친구가 여기 자주 오는  ooo 인데 지금 집에 없어서 그러는데요. 이 반찬 좀 여기도 두고 가도 될까요? 친구가 퇴근길에 찾아간다고 하네요" 

저 종이가방의 묵직한 물건이 반찬이 아니라 마약이면 어떡하지? 나도 공범이 되는 건가? CCTV가 있으니, 무죄를 입증할 수 있을 테지? 짧은 한 문장의 부탁을 듣는 시간 동안 범죄와 그에 따른 대처 방법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고민 끝에 몇 년 동안 별 사고 없이 우리 가게를 이용한 손님에 대한 믿음으로 종이가방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를 위해 하루 종일 부엌에 서서 정성을 쏟았을 낯선 여자 또한 모른 척할  할 수 없었다.

"이리 주세요. 냉장고에 넣어 둘게요."


장사를 하다 보면 손님들의 부탁을 무 자르듯 딱 거절하기 힘든 경우가 있다. 

자칫 잘못하면 불친절하고 장사요령이 없다는 소리를 듣기 쉽상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들어주기에는 위험 요소가 있다. 결국 융통성 있는 결정을 해야 하는데 상황 파악이라는 게 경험과 타고난 감에서 나오기에 처음엔 많은 실수를 한다. 그 실수가 단순히 브런치에 글을 쓸 만한 소재가 되는, 웃픈일이 되면 다행이지만 경찰을 대면 해야 하는 아주 귀찮은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귀찮음과 서비스 사이의 균형을 잘 맞추는 게 중요하다.


 "사장님. 우체국 택배 하나 거기다 두라고 했거든요? 잠시 맡아주시면 제가 이따 찾으러 갈게요." 

아주 중요한 택배라 했다. 원룸 손님들은 1인 가구의 가장으로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밖으로 돌아야 한다. 갑작스러운 방문이나 택배를 받아 줄 가족이 없다. 그 순간 부탁할 곳은 동네에서 자주 가는 슈퍼뿐이다. 상하거나 손상의 위험이 있는지 확인을 하고 한쪽 자리를 내준다. 


이쯤 되면 슈퍼는 물건 뿐 아니라 마음마저 파는 만물상이 틀림없다. 그리고 조금은 특별한 곳이다. 다른 영업점에 비해 짧게 머무르지만 자주 들르는 곳이다. 그만큼 익숙하고 편한 곳이다. 손님과 나는 일대일로 마주하며 서로를 알아간다. 슈퍼를 떠나면 서로에게 금세 잊히는 존재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알아갈수록 친근하고 익숙한 관계가 된다. 슈퍼라는 장소를 넘어가지 않고 서로의 사생활에 깊이 묻지 않는, 비난과 비판 없이 응원과 격려만을 할 수 있는 관계로 나에게는 딱 맞다. 저의가 의심되는 말에 모난 마음 표출할 필요 없고 돈 문제로 얽혀 얼굴 붉힐 일도 없이 그저 서로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을 뿐이다.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는 마법 같은 관계라 정의하겠다. 


이리저리 묻고 따지고서야 인심 쓰듯 한자리를 내주었던 나에게 손님들은 자기 방식으로 감사를 전한다. 

"요즘 붕어빵 파는데 별로 없는데요 앞에 있더라고요. 하나 맛보세요." 

바라고 한 일이 아니기에 손사래 치며 사양했다. 손님 또한 물러서지 않는다. 여러 번의 실랑이 끝에 손이 부끄럽다는 말에 내가 지기로 했다. 결코 바랬던 것은 아니었지만 붕어빵 하나로 마음이 따뜻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기분이 좋다. 종이봉투 속 온기를 뿜어내는 붕어빵처럼 나의 작은 배려로 손님 또한 따뜻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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