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 저 이사 가요."
갑작스럽지만 익숙하고 매년 반복되지만, 매번 서운한 인사를 건네왔습니다. 주변에 원룸이 많은 특성상 이사가 잦은 동네랍니다. 분위기에 맞게 또 한 명의 단골이 떠나가려는 소식을 전하니 무엇보다 서운한 마음이 먼저입니다. 혹시 매출 하락 걱정으로 서운한 거냐 묻는다면 그건 오해입니다. 내가 아무리 장사꾼이라지만 객 수(하루 방문자 수)와 객단가(손님 1명당 평균 소비액)를 높이는 한 명을 잃어서는 절대 아닙니다.
작별 앞에서 금전적 아쉬움이 먼저 들려면 객단가에 영향을 줄 만큼 평소 거액을 쓰는 손님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 보니 참 아이러니하네요. 돈을 많이 쓸수록 헤어짐보다 이후 매출 타격을 먼저 걱정하게 된다니 손님 입장에서는 참으로 서운한 일입니다. 저 또한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는 장사꾼다운 속물근성이고요. 그렇다고 너무 실눈 뜨고 바라보진 말아 주세요. 동네 슈퍼에서 매번 거액을 쓰는 손님은 매우 희귀하고 진귀하여 극히 보기 어렵거든요. 쿠팡과 쓱배송 차량이 온종일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지금은 말할 필요도 없고 마트를 시작한 초창기에도 흔치 않았답니다. 법인 카드로 탕비실을 채우는 멋진 사람들의 방문은 옛날 옛적 은비까비 이야기니까요.
이런 이유로 나의 서운함에는 조금의 진심이 묻어 있습니다. 손님과 농담이라도 할 수 있는 사이가 되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나야 하는지 아실까요? 카운터에서 계산하는 동안 잠깐의 만남이 전부이니 몇 달, 몇 년 절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지속해서 마주해야 가벼운 인사라도 하는 관계로 발전된답니다. 그런데 떠난다니 당연히 아쉽고 서운하고 섭섭한 마음이 먼저 아니겠어요? 혹 물건을 사고 돈을 받으면 그만인 슈퍼에서 굳이 지난 시간을 계산해 가며 관계까지 운운할 필요가 있느냐 묻는다면…. 글쎄요. 아마도 익숙함에서 오는 편안함이 좋다고 대답하겠습니다.
서운함을 뒤따르는 감정은 고마움입니다. 말마따나 가끔 농담 따먹기나 하던 동네 슈퍼 아줌마쯤이야 작별 인사 리스트에서 제외해도 그만일 텐데 애써 찾아주면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지난 시간이 헛되지 않아 서로의 안녕을 빌어주는 지금에 이르렀다는 뭉클함이 있어요. 사실 말하지 않아도 낌새는 금세 알아차린답니다. 그동안 쓰지 않던 포인트를 한 번에 쓴다던가, 대형 쓰레기봉투를 여러 장 산다던가, 폐기물 스티커에 관해 묻는 손님은 대부분 이사를 준비하는 중이거든요. 이럴 땐 내가 먼저 작별을 고해야지요.
"이삿날 꼭 들러주세요. 작별 인사라도 하고 싶어요."
떠나는 이들의 앞날을 항상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통한 건지 대부분의 손님은 이삿날 들러 인사를 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고정 멘트를 시작으로 나만의 작별 의식을 치룹니다. 평소 좋아하는 음료나 커피를 두 손에 들려주며 몇 발짝 안 되는 가게 문 앞까지 배웅하지요. 오랫동안 우리 가게를 방문해 주어 감사했다는 마음 전하고서야,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손님의 뒷모습을 확인하고서야 우리의 작별은 마무리됩니다.
마음을 전하는 음료 상자의 무게는 그동안 손님의 소비와 비례합니다. 단골에게는 더 신경 쓰니 장사꾼의 속물근성이 또 한 번 꿈틀거린 결과입니다. 단골이 왜 단골이겠어요. 오랜 시간 자주 와서지요. 그러니 음료 캔 하나와 한 박스의 차이는 분명히 구분해서 베풀 줄 알아야지요.
떠나간 손님이 오래된 정일수록 그리움도 커진답니다. 전어와 번데기를 보면 아빠가 생각나고 나무젓가락에 돌돌 말린 낙지호롱과 구운 김에 달래장 얹어 먹을 때면 엄마가 생각나듯 진열대의 특정 물건을 통해 떠나간 손님들이 떠오르지요. 신상 젤리가 입점하면 알록달록 젤리를 종류별로 맛보던 키 180cm의 거구의 여자 손님이 생각납니다. 체격과 달리 취향은 아기자기한 소품을 좋아하는 천생 여자였어요. 키 크는 비법을 비밀인 양 진지하게 알려주던 표정이 특히 사랑스러웠지요. 문득 궁금할 때면 괜스레 손님이 오갔던 길을 한 번 쳐다보며 걸음걸이를 상상합니다.
오줌 사건으로 말 많은 칭다오 맥주 관련 뉴스를 볼 때면 고향으로 돌아간 손님의 반응이 궁금하답니다. 하필 칭다오를 애정하여 지금쯤 얼마나 찝찝해하고 있을지 웃음이 나오다가도 개업한다던 커피숍은 잘 되는지 소식이 궁금하지요. 요즘 같은 불경기에 내 코가 석 자지만 손님의 커피 매출까지 걱정하는 오지랖을 부려봐요. 종류가 훨씬 다양해진 몬스터 음료는 은발의 리처드 기어를 30% 닮은 노신사를 상기시켜요. 아직도 강의하고 있을까. 하려던 공부는 잘 마쳤을까. 좋아하는 공부 실컷 하기를 응원합니다.
눈부시도록 일렁이는 황금벌판에서 햅쌀이 나올 때면 일부러 때를 기다렸다가 우리에게 주문했던 장성 할머니의 전화를 기다려요. 하지만 방 한가운데서 배달 간 나를 반갑게 맞이하던 검은 눈썹의 할머니는 진즉부터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씁쓸한 짐작을 하며 좋은 곳에서 편히 쉬겠지, 생각합니다. 킨더조이 초콜릿은 생후 6개월 때부터 봐오던 지후를 눈앞에 데려놓아요. 자동문 버튼을 엄마가 눌렀다고 소리를 지르며 울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녀석 벌써 초등학생이랍니다. 남의 아이들은 참 빨리도 커요. 학교에 잘 적응하여 좋은 친구 많이 사귀기를 바라죠. 내 자식도 제대로 건사 못하면서 남의 자식 학교생활까지 걱정하는 나는 오지라퍼가 틀림없습니다.
지금 카운터 서랍 한쪽에는 곱게 포장된 담배 두 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곧 이사 간다는 손님의 인사를 듣고 선물하기 위해 챙겨두었지만 엇갈린 모양인지 요 며칠 만나질 못했거든요. 담배를 선물로 주려니 선물 같으면서 선물 아닌 선물 같은 기분이지만 그 친구는 어차피 돈 주고 사야 하니 좋아하리라 믿고 싶어요.
"이사 가요"보다 더 복잡한 심경의 소식은 "군대 가요"였습니다.
친하지는 않았어요. 중학교 때부터 단골이던 그 아이가 어느새 자라 나보다 훨씬 큰 키가 되자 어느 한겨울 아이스크림을 사 가며 말했어요.
"저 이틀 뒤면 군대 가요."
군대 간다고 말한 손님은 처음이라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왜 하필 이렇게 추운 한겨울에 입대하니?"
고민 끝에 기껏 한다는 소리가 이토록 속이 없어요. 다급히 아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잔뜩 안겨주며 잘 다녀오라고 손을 흔들었답니다. 왜 하필 이 추운 날이냐며 미련한 소리를 할 땐 언제고 꽁꽁 언 아이스크림을 한가득 주는 이유가 대체 뭘까요? 입대 전에 찬 것 많이 먹고 배탈 나라는 의미인지, 아껴뒀다 첫 휴가 나와서 먹으라는 소리인지 모르겠을 이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나란 사람을 어찌해야 할까요. 비록 선물 센스는 좀 떨어지지만 건강하게 잘 다녀오기를 바라는 마음만은 분명 진심이었습니다.
얼마 전이었어요. 늦은 밤, 한 손님이 들어와 과자코너에 한참을 서 있는 걸 보았어요. 다른 손님들이 다 나가길 기다리는듯한 움직임에 무서운 생각이 들더군요. 대책을 궁리할 새도 없이 그 남자는 계산대로 몸을 돌리더니 저벅저벅 걸어오는데 그 걸음 따라 제 심장도 쿵 쿵 쿵 뛰었어요. 큰 키에 모자까지 써서 더 위협적으로 느껴져 큰일 났다 싶었지요. 드디어 카운터 앞에서 걸음을 멈춘 남자는 갑자기 모자를 벗고는 꾸벅 인사를 했어요.
"안녕하세요? 저 휴가 나왔습니다."
가슴을 쓸어내리고서야 보니 군대 간 그 아이였습니다. 군대에서 잘 먹었는지 키가 더 큰 듯했어요.
"어머. 잘 지낸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이렇게 보니 반갑다. 이게 얼마 만이야?"
"1년 만이에요. 휴가 나올 때마다 들렀는데 안 계셔서 아저씨한테만 인사하고 들어갔어요."
"그랬구나. 군대 생활은 괜찮아?"
"전 잘 맞아서 직업군인이 되려고요."
아이는 한참이나 자신의 진로에 대해 말하고는 씩씩하게 인사하고 떠났어요. 1년 사이에 늠름한 국군 아저씨가 된 아이가 대견하고 기특했습니다. 이후로도 두세 번 보이던 아이는 못 본 지 한참 되었습니다. 아마도 직업군인이 되어 어느 한곳에 정착했을테지요.
군인이 된 아이처럼 알고 지내던 손님들이 자꾸 떠나갑니다. 건강과 행복을 빌어주며 보낸 손님이 한 트럭은 될 거예요. 원룸이 많은 동네라 매년 이와 같은 작별이 주기적, 동시다발적이지요. 원룸이야 새로운 사람으로 또 채워지겠지만 서로의 안녕을 빌어줄 사이가 되려면 또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나야 할까요? 손님이 떠난 자리는 처음으로 리셋되어 이전의 기억을 지워버립니다. 젤리와 칭다오 맥주, 킨더조이를 보며 떠올리던 손님도 점점 기억 저 너머로 멀어져 쉽게 생각나지 않습니다. 오늘처럼 에피소드를 풀어놓을 때나 글감이 되어 가끔 소환되지요. 반복되는 이별과 리셋으로 새로운 손님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은 점점 떨어집니다. 어차피 떠나가는 사람들이니 기계적으로 대응하겠다 마음먹지요. 더 이상 예전 같은 열정은 없을 거라고요.
“헤헤, 이거 계산해 주세요.”
“얼씨구? 아침부터! 학교 가는 길에! 이 추위에!! 아이스크림?”
“헤헤, 네”
“안돼! 감기 걸려! 차라리 젤리를 사든지 해. 아줌마 계산 못 해줘”
하지만 나의 다짐을 깨는 복병이 등장했으니 초등학생 꼬마입니다. 우리 둘째와 나이가 같아 친근하지요. 매일 학교 가기 전에 들러 군것질거리를 사는데 그때마다 기계적 대응 어쩌고저쩌고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엄마로 빙의합니다.
“너 지난번에도 감기 걸려서 병원 다니더니 아침부터 아이스크림??”
“한 번만 먹게 해주세요. 엄마도 못 먹게 하는데 너무 먹고 싶어서 그래요.”
“안돼”
아이는 입을 삐죽거리더니 어쩔 수 없이 카운터 옆에 놓인 작은 젤리를 골랐습니다. 문을 나서는 아이를 따라 나가며 기분을 풀어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기분으로 학교를 갈 수는 없으니까요.
“걸어가면서 핸드폰 보지 말고 항상 차 조심해야 해! 알겠지? 잘 갔다 와!”
아이 엄마가 이미 했을 당부를 다시 한번 각인시키는 잔소리가 먼저 나와버렸으니, 기분을 풀어주기는커녕 더 극혐하는 아줌마가 되어버렸습니다.
“네”
말도 잘 듣고 대답도 장난스럽게 잘하는 저 아이는 정말이지 미워할 수 없는 귀염둥이입니다.
가게 오픈 시간은 아침 7시입니다. 6시 30분에 집을 나오지요. 청소하고 물건을 진열하며 오픈 준비를 하다 보면 어느새 1~2시간은 훌쩍 지나갑니다. 아이들이 제시간에 잘 일어났는지, 아침에 차려 놓고 온 밥은 먹었는지, 반찬이 마음에 안 들어 빈속으로 학교를 간 건 아닌지, 양치와 세수는 했을는지, 교복은 잘 갖춰 입었을지, 둘째는 날씨에 맞게 위, 아래 옷을 잘 맞춰 입고 학교에 갔을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어느새 오전 9시가 되어버립니다. 이 시간까지 학교에서 전화 안 오는 거로 아이의 등교를 확인하지요. 그런데 8시 20분쯤, 이 꼬맹이가 매장에 들어서면 집에 있는 아이들이 갑자기 생각납니다. 그래서인지 내 아이에게는 하지 못하는 아침 인사를 이 꼬마에게 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아이 입장에서는 싫겠지만요. 남의 집 아이 간식까지 참견하는 나는 아무래도 타고난 오지라퍼가 맞습니다. 사람은 본성대로 살아야 하는 법이니 이 본성을 거스르기는 힘들 듯합니다.
“아줌마, 저 이사 가요.”
꼬마도 어느 날 갑작스럽게 이같은 작별 인사를 할지 몰라요. 그 시간이 다가오기 전까지는 그냥 생긴 대로 놀렵니다. 매일 학교 잘 다녀오라고 인사하며 차 조심 당부를 잊지 않을 테지요. 그러다 헤어지는 시간이 오면 꼭 안아주며 잘 지내라 인사하겠지요. 아이가 좋아하는 군것질거리를 한 보따리 안겨주면서요. 아이의 어린 시절 집 앞 슈퍼 아줌마가 한 잔소리를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잠시라도 즐거웠으면 될 일입니다. 제아무리 단골이라도 떠난 자리는 쉽게 잊힌답니다. 아이의 자리도 그럴 테지요. 그러다 아침에 아이스크림을 사는 손님을 볼 때면 저도 모르게 아이가 떠오를 테지요. 리셋이 잘못되었는지 이전의 기억을 완전히 지워버리지는 못한 경우도 있거든요. 기계적 대응이라는 다짐은 다짐일 뿐, 하는 꼬락서니가 천성을 거스르지 못하니 오지랖은 앞으로도 계속될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