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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쿠 Dec 14. 2023

저 이사 가요

"사장님. 저 곧 이사 가요."

갑작스럽지만 익숙하고 매년 반복되지만 매번 서운한 인사를 건네온다.

주변에 원룸이 많은 특성상 이사가 잦은 곳이다. 동네 분위기에 맞게 또 한 명의 단골이 떠나가려는 소식을 전한다. 작별 인사를 하는 손님에게 서운한 마음이 먼저 든다. 손님을 그저 atm 기계 취급한 거냐고 따져 묻는다면 또 서운해진다. 내가 아무리 장사꾼이라지만 객수(하루 방문자 수)와 객단가(손님 1명당 평균 소비액)를 높이는 한 명을 잃어서는 절대 아니다.


작별 앞에서 금전적 아쉬움이 먼저 들려면 객단가에 영향을 줄 만큼 평소 거액을 쓰는 손님이어야 한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돈을 많이 쓸수록 헤어짐보다 이후 매출 타격을 먼저 걱정하게 되니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는 장사꾼다운 속물근성이다. 그렇다고 너무 실눈 뜨고 바라보진 말아 달라. 동네 슈퍼에서 매번 거액을 쓰는 손님은 매우 희귀하고 진귀하여 극히 보기 어렵다. 쿠팡 차량이 온종일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지금은 말할 필요도 없고 마트를 시작한 초창기에도 흔치 않았다. 법인 카드로 탕비실을 채우는 멋진 사람들의 방문이 있었던 것 같은 옛날 옛적 이야기다.


이런 탓에 나의 서운함에는 순수한 진심이 묻어 있다.

손님과 농담이라도 할 수 있는 사이가 되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있어야 하는지 아는가? 우리 가게를 방문하는 사람 중 절반은 기본 인사 "어서 오세요.""안녕히 가세요." 외에는 일체 사적 대화가 없다. 30% 정도는 익숙하게 가벼운 인사를 하는 정도며 나머지 20% 정도는 안부도 묻고 농담도 하며 동네 사건·사고를 얘기할 수 있는 단골 중 단골이다. 카운터에서 계산하는 동안 잠깐의 만남이 전부이니 몇 달, 몇 년 절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지속해서 마주해야 가벼운 인사라도 하는 관계로 발전된다. 그런데 떠난다니 당연히 아쉽고 서운하고 섭섭한 마음이 먼저다. 혹 물건을 사고 돈을 받으면 그만인 슈퍼에서 굳이 지난 시간을 계산해 가며 관계까지 운운할 필요가 있느냐 묻는다면 글쎄.. 그저 익숙함에서 오는 편안함이 좋다고 대답하겠다.


서운함을 뒤따르는 감정은 고마움이다. 말마따나 가끔 농담 따먹기나 하던 동네 슈퍼 아줌마쯤이야 작별 인사 리스트에서 제외해도 그만일 텐데 애써 찾아주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지난 시간이 헛되지 않아 서로의 안녕을 빌어주는 지금에 이르렀다는 기쁨을 느낀다. 사실 말하지 않아도 낌새는 금세 알아차린다. 그동안 쓰지 않던 포인트를 한 번에 쓴다던가, 대형 쓰레기봉투를 여러 장 산다던가, 폐기물 스티커에 관해 묻는 손님은 대부분 이사를 준비하는 중이다. 이럴 땐 내가 먼저 작별을 고해야지.

"이삿날 꼭 들러주세요. 작별 인사라도 하고 싶어요."

떠나는 이들의 앞날을 항상 응원한다. 이 또한 진심이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고정 멘트를 시작으로 나만의 이별 공식을 풀어 나간다. 평소 좋아하는 음료나 커피를 두 손에 들려주며 몇 발짝 안 되는 가게 문 앞까지 배웅한다. 오랫동안 우리 가게를 방문해 주어 감사하다는 마음 전하고서야,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손님의 뒷모습을 확인하고서야 우리의 작별은 마무리된다.


마음을 전하는 음료 상자의 무게는 그동안 손님의 소비와 비례한다.

단골에게는 더 신경 쓰니 장사꾼의 속물근성이 또 한 번 꿈틀거린 결과다. 단골이 왜 단골이겠는가. 오랜 시간 자주 와서지. 오래된 정일수록 그리움도 커진다. 전어와 번데기를 보면 아빠가 생각난다. 나무젓가락에 돌돌 말린 낙지호롱과 구운 김에 달래장 얹어 먹을 때면 엄마가 생각나듯 진열대의 특정 물건을 통해 자연스레 떠나간 손님들이 떠오른다. 신상 젤리가 입점하면 알록달록 젤리를 종류별로 맛보던 손님이 생각난다. 여자로서는 흔치 않게 180cm의 거구였지만 취향은 아기자기한 소품을 좋아하는 천생 여자였다. 키 크는 비법을 비밀인 양 진지하게 알려주던 표정이 특히 사랑스러웠다. 문득 궁금하여 괜스레 손님이 오갔던 길을 한 번 쳐다보았다.


요즘 오줌 사건으로 말 많은 칭다오 맥주 관련 뉴스를 볼 때면 고향으로 돌아간 손님의 반응이 궁금하다.

하필 칭다오를 애정하여 지금쯤 얼마나 찝찝해하고 있을지 웃음이 나오다가도 개업한다던 커피숍은 잘 되는지 혼잣말로 소식을 물어본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내 코가 석 자지만 손님의 커피 매출까지 걱정하는 오지랖을 부린다. 종류가 훨씬 다양해진 몬스터 음료는 은발의 리처드 기어를 30% 닮은 노신사를 상기시킨다. 아직도 강의하고 있을까. 하려던 공부는 잘 마쳤을까. 좋아하는 공부 실컷 하기를 응원한다. 


눈부시도록 일렁이는 황금벌판에서 햅쌀이 나올 때면 일부러 때를 기다렸다가 우리에게 주문했던 장성 할머니의 전화를 기다렸다. 한쪽에 기저귀를 쌓아놓은 채 방 한가운데 앉아 배달 간 나를 맞이하던 검은 눈썹의 할머니는 진즉부터 연락이 되지 않는다. 씁쓸한 짐작을 해본다. 킨더조이 초콜릿은 생후 6개월 때부터 봐오던 지후를 눈앞에 데려놓는다. 자동문 버튼을 엄마가 눌렀다고 소리를 지르며 울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녀석 벌써 내년이면 초등학교에 들어가겠구나. 남의 아이들은 참 빨리도 크는구나. 학교에 잘 적응하여 좋은 친구 많이 사귀기를 바란다. 내 자식도 제대로 건사 못하면서 남의 자식 학교생활까지 걱정하는 나는 오지라퍼가 틀림없다.


지금 카운터 서랍 속에는 곱게 포장된 담배 두 갑이 한쪽에 자리하고 있다. 곧 이사 간다는 손님의 인사를 듣고 선물하기 위해 챙겨두었지만 엇갈린 모양인지 요 며칠 만나질 못했다. 담배회사마저 온갖 흉측한 사진을 붙여놓고 폐암 등 무서운 병명을 크게 써놔 금연을 유도하는데 담배를 선물로 주려니 선물 같으면서 선물 아닌 선물 같은 기분이지만 그 친구는 어차피 돈 주고 사야 하니 좋아하리라 믿는다.


"이사 가요"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당황스러웠던 말은 "군대 가요"였다.

친하지는 않았다. 중학교 때부터 단골이던 아이가 어느새 자라 나보다 훨씬 큰 키였다. 멀대 같던 아이가 한겨울 아이스크림을 사 가며 말했다.

"저 이틀 뒤면 군대 가요."

군대 간다고 말한 손님은 처음이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왜 하필 이렇게 추운 한겨울에 입대하니?"

기껏 한다는 소리가 이토록 속이 없다.

다급히 아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잔뜩 안겨주며 잘 다녀오라고 인사했다. 왜 하필 이 추운 날 군대에 가냐며 미련한 소리를 할 땐 언제고 이 추운 날에 하필 꽁꽁 언 아이스크림을 챙겨 준 나의 어리석음은 어찌할꼬. 아들 둘 엄마로서 군대 간다는 아이가 남 일 같지 않아 부디 건강하게 다녀오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얼마 전 늦은 밤, 한 손님이 들어와 과자코너에 한참을 서 있는 걸 보았다. 다른 손님들이 다 나가길 기다렸다가 계산대로 오는데 큰 키에 모자까지 쓰고 있어 경계하는 마음이 들었다. 카운터 앞에 툭 서더니 갑자기 꾸벅 인사를 하며 모자를 벗었다.

"안녕하세요? 저 휴가 나왔습니다."

그제야 찬찬히 보니 군대 간 그 아이였다. 군대에서 잘 먹었는지 키가 더 큰 듯했다.

"어머. 잘 지낸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이렇게 보니 반갑다. 이게 얼마 만이야?"

"1년 만이에요. 휴가 나올 때마다 들렀는데 안 계셔서 아저씨한테만 인사하고 들어갔어요."

"아 그랬구나. 군대 생활은 괜찮아?"

"네. 전 잘 맞아서 직업군인이 되려고요."

아이는 한참이나 자신의 진로에 대해 말하고는 씩씩하게 인사하고 떠났다. 1년 사이에 늠름한 국군 아저씨가 되어 있어 대견하면서도 뭉클했다. 다치지만 말기를 바랐는데 군대에 말뚝 박겠다니 기특해서 박수가 절로 나왔다.


우리는 친했다. 비록 쌍방이 서로 나이, 직업, 속사정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친했다. 이 공간을 벗어나면 각자의 분주한 일상을 보내느라 금세 잊어버리지만, 나의 가게에서만큼은 익숙하고 편한 관계였다. 친했던 사람들이 자꾸 떠나간다. 행복을 빌어주며 보낸 손님이 한 트럭은 된다. 원룸이 많은 동네라 매년 이와 같은 작별이 주기적, 동시다발적으로 다가온다. 원룸이야 새로운 사람으로 또 채워지겠지만 서로의 안녕을 빌어줄 사이가 되려면 또 얼마의 시간을 함께해야 할까?


손님이 떠난 자리는 처음으로 리셋되어 이전의 기억을 지워버린다. 반복되는 이별과 리셋은 새로운 손님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단골손님과의 유대를 유지하는 것 외에는 귀찮다. 먼저 다가오는 손님에게는 금방 마음이 열리지만, 예전 같은 열정은 아니다. 거창하게 번아웃까지는 갖다 붙이지 못하더라도 몇 년 동안 같은 일을 하려니 좀 지겨워진 것도 한몫한다. 게다가 장사까지 안되어 분위기는 축축 처진다. 내년에는 더 어렵다는데 어떻게 버텨야 하나 갖가지 걱정과 고민으로 하루가 버겁다. 이러다간 내가 먼저 가게 문 앞에 [이제 그만합니다. 영업종료] 팻말을 걸어놓고 작별을 고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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