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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쿠 Nov 05. 2023

컵라면의 숨겨진 기능

"사장님. 거긴 지금 어때요?"

"한가해요."

"저희도요. 한가하다 못해 지루해서 전화해 봤어요."

"이달은 전국이 야외 축제인 데다 단풍 구경 다니는지 매출이 뚝뚝 떨어지네요"

"그러니까요. 불경기는 우리만 불경기인가 봐요. 다들 놀러 다니는 거 부럽네요."

"장사도 안 되는데 우리 컵라면에 물 좀 부어볼까요?"

"그럴까요? 하하하"

알고 지내는 편의점 점주와의 통화 중 컵라면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며 깔깔 웃었다.


손님과 컵라면이 무슨 상관이 있다고 컵라면에 물을 부으라고 했을까? 한가하니 밥이나 먹자는 의미일까?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는 걸까? 이중 의미가 있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기서는 다른 뜻으로 쓰인다. 손님이 없을 때 밥이라도 편하게 먹자며 컵라면에 물을 붓는다. 그러면 꼭 손님이 한 명 들어온다. 컵라면이 익는 시간 3분이니까 손님 한 명이 간단한 물건을 고르고 계산하는 데는 적당한 시간이라 괜찮다. 한데 분명 좀 전까지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 않았는데, 기다려도 오지 않던 손님이 갑자기 줄줄이 들어오고 물건을 고르는 시간은 점점 길어진다. 나의 면발 치기를 기다리던 라면은 익다 못해 국물을 말끔히 흡수해 우동면이 되어있다. 뻘건 우동면을 먹을 때마다 머피의 법칙이 생각난다.


수리수리마수리 주술을 외우지 않아도 컵라면에 물을 붓는 순간 가게 문이 열리며 손님이 들어서는 이 신기한 순간, 손님을 반가워해야 할까 불어 터지는 라면을 아쉬워해야 할까? 장사꾼인 만큼 매출 금액에 따라 반가움과 아쉬움 사이의 온도는 급변한다. 철저하게 이윤으로만 따져보자면 담배 한 갑 손님이라면 솔직히 라면이 아쉽다. 정해진 식사 시간이 없는 자영업 특성상 빨리빨리 식사가 몸에 배어 있지만 (특히나 1인 근무 매장) 컵라면 한 그릇 정도를 먹는 몇 분의 시간은 방해받지 않고 온전히 맛을 즐기고 싶다. 이윤 500원이 안 되는 담배와 1,000원 전후 되는 컵라면의 원가만 비교해도 내가 손해다. 게다가 컵라면을 가장 맛있게 먹을 물 부은 후 3분까지 계산하면 더욱 그렇다. 분명 좀 전까지 그토록 기다렸던 손님인데 불어 터진 라면에 신세 한탄까지 하게 되는 한 인간의 간사함이 얼마나 변화무쌍한지.



담배 한 갑이 아닌 손님의 장바구니가 차곡차곡 쌓이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면 말이 달라진다. 내가 포기해야 하는 컵라면의 원가와 10분의 점심시간은 일종의 제물이자 투자비용으로 여기게 되며 투자 대비 고소득에 입꼬리가 올라가니 참으로 만족스러운 장면이다. 게다가 나도 조금이라도 맛있는 라면을 먹고자 하는 의지로 물 부은 지 3분이 지나면 면발만 건져내 그릇에 담아두니 몇 분이 지나도 탱탱함이 유지되어 그럭저럭 먹을만하다. 밥도 먹고 돈도 버는, 머피의 법칙이 샐리의 법칙으로 전환되는 경우로 우리만 아는 컵라면의 숨겨진 기능이다. 위의 [컵라면에 물을 부어볼까요?]는 샐리의 법칙을 위한 주술 행위라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매일 시간별로 컵라면에 물을 부으면 곧 부자가 되겠다는 결론에 이르지만 세상의 이치는, 우주의 기운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컵라면 효과는 정말 배가 고픈 그 시간, 마침 30분 동안 손님 한 명 오지 않는 그 절묘한 타이밍이 맞아떨어져야 하는 찰나의 행운이다. 손님이나 불러볼까 하고 아무 때나 컵라면에 물을 부으며 수리수리 마수리를 불러본다 한들 매장은 여전히 파리만 날리는 정숙함을 유지할 것이다. 결국 1,000원의 투자금을 날리거나 원금 회복을 위해 불어 터진 면발을 내 위장 속으로 쑤셔 넣는 파국으로 끝난다.


컵라면 효과를 내는 유사품은 또 있다. 전화가 그렇다. 손님이 뜸하면 그동안 연락해 보지 못한 친구와 통화라도 해볼까, 하고 핸드폰을 손에 쥔다. 연락처를 찾는 버튼음은 가게 주위 사방으로 초음파를 전달하는 듯하다. 돌고래 급 청력의 사람들이 가게로 발길을 돌린다. 이 방법 또한 여러 번 효과를 보았다. 통화 중 "잠깐만"을 몇 번 반복하 기다리는 친구도 지치고 나도 미안하여 연락 두절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그러니 유유상종, 이심전심으로 "잠깐만"을 기다려 줄 수 있는 가족이나 동종업계 지인들에게 안부를 물으며 좁은 인맥을 유지하게 된다. 때로는 편의점 점주님과 이와 같은 농담을 한다.

"우리 각자 핸드폰 하나 더 개통해서 하루 종일 통화상태로 둬 볼까요?"

역시나 컵라면과 같은 이중적 의미로 손님을 끌어보고자 하지만 세상의 이치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화장실 가기, 유튜브 보기 등이 있다. 다만 주의점은 화장실에서 나오다 손님과 아이컨택을 하는 민망한 상황이 되지 않도록 나올 타이밍을 잘 찾아야 하니 뭐든 쉬운 일이 없다.


그런데 쓰고 보니 이상하다. 손님이 자꾸 오는데 왜 나는 장사가 안된다고 하는 걸까? 그냥 기분 탓일까? 아마도 기다리는 시간에 오지 않고 잠깐의 짬을 이용하려는 순간에 손님이 몰리는 희귀한 상황, 머피의 법칙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이 또한 경기 좋았을 때 이야기다. 컵라면이 아니라 정화수라도 떠 놓고 빌고 싶은 심정인 불경기다. 그래서 가끔 찾아드는 행운을 기대하는 것일까? 그런 듯하다. 주말인 오늘도 한가하다. 아침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컵라면은 안 되겠다. 전화하자니 주말 오전에 전화를 받아줄 사람이 없다. 남은 건 화장실과 영화다. 행운을 위한 주술로는 화장실 앞에서 손님과의 아이컨택보다는 카운터 한쪽 노트북과의 눈맞춤이 더 낫겠다. 수리수리 마수리 단풍 구경 가는 길에 들어와라. 들어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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