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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쿠 Dec 05. 2023

할 놈은 한다.

차 안에서 잠깐 낮잠을 자려는데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가게로 빨리 와봐! 빨리!"

할 일을 다 해놓은 상태인데 이리도 재촉한 걸 보니 뭔가 긴급한 일이 생긴 게 틀림없다. 걸음을 재촉하니 어이가 없다는 듯 웃고 있는 거로 보아 험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옆에 서 있는 경찰을 보니 또 심각한 일인 것도 같아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오늘 하루를 되짚었다.

"무슨 일일까요?"

"한 시간 전쯤에 어떤 손님이 담배 다섯 보루 사 갔죠?"

"네 맞아요. 225,000원 제가 계산했어요."

"그 카드가 분실 카드였답니다. 카드 주인이 경찰에 신고했어요. 여기서 자기 카드가 결제되었다고."


맞다. 한 시간 전쯤에 남루한 옷차림의 60대 전후로 보이는 아저씨가 담배를 5보루나 사며 현장에서 일하는 직원들 선물이라고 했다. 와우 담배를 한 갑, 두 갑 사주는 동료는 보았어도 보루를 사주다니! 오늘은 그 동료들도 나도 대박이 터졌다고 좋아하며 신이 나 계산했다. 담배 이름을 여러 번 잘못 말하는 이상한 점은 보였지만 어떻게 몇 사람의 담배 취향을 모두 기억하겠는가? 게다가 나이도 있으니 잠시 헷갈리는거라 생각했다.

"어머 그러면 어떡해요? 담배는 이미 줘버렸는데?"

"담뱃값은 카드사에서 지불할 것이니 이 가게의 피해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고가 들어온 이상 저희도 사건 처리를 해야 하니 진술서를 써주셔야 해요."

비록 작은 동네 슈퍼라지만 몇 년 동안 여러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경찰들과는 n번째 대면이다. 처음엔 신고만으로도 범죄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아 긴장되고 무서웠는데 이젠 경찰들과 정들 지경이다. 그럼에도 진술서를 쓰는 일은 영 적응이 안 된다. 사건 날짜와 시간을 기록하고 당시의 일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면 된다는데 왜 내가 큰 잘못을 해 반성문을 쓰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이 떨리는지 모르겠다.


"혹시 절도 전과가 있나요? 인상은 좋아 보였거든요."

"그건 저희도 잡아봐야 알 것 같아요. 지금으로선 제일 먼저 들른 곳이 여기라."

질문을 하고도 웃겼다. 길지 않은 경력과 많지 않은 경험에 비추어보면 절도 사건의 주인공들은 모두 인상이 좋고 말도 나긋나긋 잘했다. 티브이에 나오는 강도들과는 정반대의 인상으로 일단 상대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부터 한다. 강도들은 짧은 시간에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협박과 폭력이 동반되던데.. 사기에 가까운 절도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더 많은 것을 갈취하기 위해서인 걸까? 어쨌든 사람 인상 좋다고, 말을 유순하게 잘한다고 쉽게 믿으면 안 될 일이다. 그러고 보면 옛말 틀린 게 하나 없다. 사람 겉모습 봐서는 모른다고 우리 선조들이 그리도 오랜 시간 말하지 않았는가.


진술서를 받아 든 경찰은 가맹점 피해는 없을 거라며 다시 한번 우릴 안심시켰다. 경찰의 말을 그토록 믿었건만 카드사는 100% 결제할 수 없다는 통보를 했다. 5만 원이 이상의 카드 결제 시 카드 주인의 사인을 받고 카드 뒷면의 사인과 일치하는지 살펴보지 않았다며 나의 잘못으로 돌렸다.

"저도 카드 쓰는데 어떻게 어디서나 매번 똑같은 사인을 해요? 줄 한 번 찍 긋는 거로 사인할 수 있고, 괜히 동그라미를 치고 싶은 날도 있고 그때그때 다르죠. 상담사분은 매번 똑같은 사인을 하세요?"

"이해합니다. 저도 그러는걸요. 하지만 평소에는 문제 되지 않는 이런 사소한 것들이 일단 사건이 터지면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고액 결제 시 꼭 확인하는 습관을 들이셔야 해요. 이건 회사의 규정이자 원칙이라 더 이상 제가 어찌할 방법이 없습니다."

카드사 규정이 그렇다고 하니 따를 수밖에. 혹시나 다른 방법이 있을까 담당 경찰에게 전화해 다시 물었다.

"카드사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차액은 범인 잡으면 배상해 드리겠습니다"


세상에 믿을 사람이 없다. 모두가 한통속인 것만 같아 화가 났다. 하지만 일을 크게 만들어서는 안 되었다. 일단 남편은 카드사가 100% 결제해 주는 거로 알고 천하 태평한 마음으로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한데 일을 키우면 코로나보다 무서운 남편의 잔소리 폭격에 시달릴지 모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도 공범이 되기로 결심했다.

"카드사 통화했어?"

"응. 걱정하지 말래.."

"잘됐네. 번거롭긴 했어도 우리 손해는 없으니까."

평소와 다르게 친절한 말투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남편에게 말하며 자연스럽게 미소 지었다. 속도 모르고 흡족해하는 남편의 표정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일단 내가 살고 볼 일이다. 남편은 아직도 모른다. 당일의 카드사별 결제 총금액이 입금되기 때문에 영수증과 하나하나 대조하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모를 것이고 앞으로 알기에는 시간이 많이 지났고 남편은 나의 브런치 글을 읽지 않으니, 완전범죄다.


"카드 주인은 무슨 죄야."

남편의 지나가는 말이 귀에 콕 박힌다. 우리도 매일 쓰는 카드라 카드 주인이 지금 어떤 심정일지 이해가 된다. 얼떨결에 잠시 지갑에서 이탈된 대가가 너무 크다. 금전적 손해도 손해지만 신고하고 사건경과까지 확인해야 하니 얼마나 귀찮고 짜증 나는 일일지. 요즘 어디에나 CCTV가 설치되어 있어 절도 범죄가 가능할까 싶지만, 현금도 아닌 분실 카드를 쓰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있다. CCTV가 있고 금방 경찰에 신고될 걸 알면서도 훔칠 사람은 훔친다. 상식적인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현실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또 옛말 틀린 게 하나 없다. 어찌 되었든 할 놈은 한다. 그러니 카드는 항상 잘 챙기고 눈에 안 보이는 순간, 분실 신고를 해야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는다. 이제 막 자영업을 시작했거나 아직 이런 경험이 없는 분들은 낯선 손님이 5만 원 이상 고액 결제를 할 때는 유심히 관찰하여 손해 보는 일이 없도록 하고요. 내 비록 남편을 속여 나를 속인 다수와 작당 비스름한 사기꾼이 되었지만, 장사를 하며 얻은 또 하나의 경험이자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깨달음이다.

믿지 말자 사람 인상! 다시 보자 내 지갑 속의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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