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안에서 잠깐 낮잠을 자려는데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가게로 빨리 와봐! 빨리!"
할 일을 다 해놓은 상태인데 이리도 재촉한 걸 보니 뭔가 긴급상황인 게 틀림없어요. 걸음아 나살려라 속도로 가게에 들어서니 어이가 없다는 듯 남편이 웃고 있어요. 험한 일은 아닌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가 옆에 서 있는 경찰을 보니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싶어 오늘 하루를 되짚게 되더군요.
"무슨 일일까요?"
"한 시간 전쯤에 어떤 손님이 담배 다섯 보루 사 갔죠?"
"네 맞아요. 225,000원 제가 계산했어요."
"그 카드가 분실 카드였답니다. 카드 주인이 경찰에 신고했어요. 여기서 자기 카드가 결제되었다고."
아이고야. 한 시간 전쯤에 남루한 옷차림의 60대 전후로 보이는 아저씨가 담배를 5보루나 사며 현장에서 일하는 직원들 선물이라고 했어요. 담배를 한 갑, 두 갑 사주는 동료는 보았어도 보루를 사주다니! 오늘은 그 동료들도 나도 대박이 터졌다고 좋아하며 신이 나 계산했지요. 담배 이름을 여러 번 잘못 말하는 이상한 점은 보였지만 어떻게 몇 사람의 담배 취향을 모두 기억하겠어요? 게다가 나이도 있으니 잠시 헷갈리는 거로 생각했어요. 옷차림도 지저분했지만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손님들도 모두 비슷한 일복이라 의심하지 않았어요. 그 모든 것들이 이제야 의심이 되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어요.
"어머 그러면 어떡해요? 담배는 이미 줘버렸는데?"
"담뱃값은 카드사에서 지불할 것이니 이 가게의 피해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고가 들어온 이상 저희도 사건 처리를 해야 하니 진술서를 써주셔야 해요."
비록 작은 동네 슈퍼라지만 몇 년 동안 여러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경찰들과는 n번째 대면이에요. 처음엔 신고만으로도 범죄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아 긴장되고 무서웠는데 이젠 경찰들과 정들 지경이에요. 그럼에도 진술서를 쓰는 일은 영 적응이 안 돼요. 사건 날짜와 시간을 기록하고 당시의 일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면 된다는데 왜 내가 큰 잘못을 해 반성문을 쓰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이 떨리는지 모르겠어요. 이런 소심한 간뎅이로 어찌 그리 시원하게 카드를 긁었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어요.
"혹시 절도 전과가 있나요? 인상은 좋아 보였거든요."
"그건 저희도 잡아봐야 알 것 같아요. 지금으로선 제일 먼저 들른 곳이 여기라."
질문하고도 웃긴다는 생각이 들어요. 길지 않은 경력과 많지 않은 경험에 비추어보면 절도 사건의 주인공들은 모두 인상이 좋고 말도 나긋나긋 잘했거든요. 티브이에 나오는 강도들과는 정반대의 인상으로 일단 상대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부터 시작했어요. 강도들은 짧은 시간에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협박과 폭력이 동반되던데 사기에 가까운 절도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더 많은 것을 갈취하기 위해서일까요? 어쨌든 사람 인상 좋다고, 말을 유순하게 잘한다고 쉽게 믿으면 안 될 일이에요. 정말이지 옛말 틀린 게 하나 없어요. 사람 겉모습 봐서는 모른다고 우리 선조들이 그리도 오랜 시간 말하지 않았는가요. 귀담아듣지 않은 내가 문제지요.
진술서를 받아 든 경찰은 가맹점 피해는 없을 거라며 다시 한번 우릴 안심시켰어요. 불행 중 다행으로 이건 하나의 헤프닝으로 끝날 생각을 하니 오히려 글감이 하나 생긴 것 같아 나쁘지 않더군요. 카드 주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요. 한데 카드사는 100% 결제할 수 없다는 통보를 해왔어요. 5만 원 이상의 카드 결제 시 카드 주인의 사인을 받고 카드 뒷면의 사인과 일치하는지 살펴야 했는데 그 과정을 생략했다며 아주 친절하게 설명하더군요.
"저도 카드 쓰는데 어떻게 어디서나 매번 똑같은 사인을 하나요? 줄 한 번 찍 긋는 거로 사인할 수 있고, 괜히 동그라미를 치고 싶은 날도 있고 그때그때 다르죠. 상담사분은 매번 똑같은 사인을 하세요?"
"이해합니다. 저도 그러는걸요. 하지만 평소에는 문제 되지 않는 이런 사소한 것들이 일단 사건이 터지면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고액 결제 시 꼭 확인하는 습관을 들이셔야 해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어찌할 방법이 없습니다."
카드사 규정이 그렇다고 하니 따를 수밖에. 혹시나 다른 방법이 있을까 담당 경찰에게 전화해 다시 물었어요.
"카드사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차액은 범인 잡으면 배상해 드리겠습니다"
세상에 믿을 사람 없다더니. 도난 카드를 제 것인 양 쓰던 도둑도 우릴 안심시키던 경찰도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100% 변상은 안된다는 카드사도 모두 나를 속이는 것만 같아 화가 나더군요.
하지만 일을 크게 만들어서는 안 돼요. 일단 남편은 카드사가 100% 결제해 주는 거로 알고 천하 태평한 마음을 굳이 어지럽게 할 필요는 없어요. 그리고 100%는 아니지만 상당 부분은 보상을 받아서 큰 타격은 없었어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도 공범이 되기로 결심했어요.
"카드사 통화했어?"
"응. 걱정하지 말래…."
"잘됐네. 번거롭긴 했어도 우리 손해는 없으니까."
평소와 다르게 친절한 말투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남편에게 말하며 자연스럽게 미소 지었어요. 속도 모르고 흡족해하는 남편의 표정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일단 내가 살고 볼 일이지요. 이미 정해진 답인데 조금 더 보상받겠다고 카드사와 싸우고 남편과 싸우며 감정 상하느니 외식 한 번 안 한 셈 치고 평화를 얻는 게 더 이득이라는 판단이에요. 남편은 아직도 몰라요. 당일의 카드사별 결제 총금액이 입금되기 때문에 영수증과 하나하나 대조하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모를 것이고 앞으로 알기에는 시간이 많이 지났고 남편은 나의 브런치 글을 읽지 않으니, 이건 완전범죄이지요.
"카드 주인은 무슨 죄야."
관대해진 남편의 남 걱정이 여유를 찾은 나의 귀에 콕 들어와요. 우리도 매일 쓰는 카드라 카드 주인이 지금 어떤 심정일지 이해가 되고도 남지요. 얼떨결에 잠시 지갑에서 이탈된 대가가 너무 크고요. 금전적 손해도 손해지만 신고하고 사건 경과까지 확인해야 하니 얼마나 귀찮고 짜증 나는 일인가요. 요즘 어디에나 CCTV가 설치되어 있어 절도 범죄가 가능할까 싶지만, 현금도 아닌 분실 카드를 쓰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있어요. CCTV가 있고 금방 경찰에 신고될 걸 알면서도 훔칠 사람은 훔쳐요. 여러 장애물을 딛고도 꼭 하고 말겠다는 강한 의지임이 틀림없어요. 상식적인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현실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에요. 또 옛말 틀린 게 하나 없어요. 어찌 되었든 될 놈은 되고, 할 놈은 한다.
카드는 항상 잘 챙기고 눈에 안 보이는 순간, 분실 신고를 해야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아요. 이제 막 자영업을 시작했거나 아직 이런 경험이 없는 분들은 낯선 손님이 5만 원 이상 고액 결제를 할 때는 사인을 유심히 관찰하여 손해 보는 일이 없어야 해요. 내 비록 남편을 속여 나를 속인 다수와 작당 비스름한 사기꾼이 되었지만,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인지했어요. 내 상식의 기준으로만 세상을 보다가는 큰코다칩니다.
믿지 말자, 사람 인상! 다시 보자 내 지갑 속의 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