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5시가 넘어가면 마트는 피크 타임입니다. 퇴근길, 저녁거리나 반주용 술을 사기 위한 손님들로 붐비지요. 축구, 야구 등 스포츠 중계가 있는 날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평일 퇴근 시간 또한 꽉 찼던 술 냉장고가 비워지는 훈훈한 풍경이 연출됩니다. 한데 매출에 대한 기대감으로 설렘과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불안감과 공포를 몰고 오는 이들이 있으니 바로 미성년자, 청소년입니다. 하루 중 가장 바쁜 틈을 노리는 치밀한 계획, 엄마뻘 아주머니와 독대하는 과감한 행동 등 그들의 노력은 가상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점주들도 만만한 상대는 아닙니다. 스스로 노안임을 자신했겠지만, 아직 여물지 않은 청소년만의 앳된 분위기는 숨길 수 없다는 걸 아직 모르나 봅니다. 잠시 얼굴을 마주한 순간, 흔들리는 눈동자와 어딘지 어색한 분위기를 잡아내는 눈썰미는 여러 경험치에서 나오는 학습된 능력이자 타고난 감각이라 말하겠습니다.
한 번은 저녁 시간에 주변 편의점을 들른 적이 있습니다. 역시나 바쁜 시간인 만큼 여러 명이 계산을 위해 줄을 서 있었고 내 앞에는 나보다 훨씬 큰 키의 청년 둘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에쎄 체인지 1mg 주세요."
"신분증 보여주세요."
신분증을 찬찬히 살피던 점주가 물었습니다.
"생일이 언제예요?"
"네? 12월인데요."
"신분증에는 9월이네요?"
"네? 아!"
50대로 보이는 점주의 질문은 아주 날카로웠습니다. 경험하지 않고는 물을 수 없는 질문이었어요. 급소를 찔린 그들의 반응이 궁금하더군요.
‘실제 생일과 주민등록증 생일이 달라요.’
점주처럼 학습되고 훈련된 멘트를 날릴 만도 한데 두 아이는 제대로 된 대꾸 한마디 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습니다. 점주가 건네주는 신분증을 자연스럽게 두 손으로 받을 때쯤이야 무언가 깨달은 듯 얼굴이 달아오르더군요. 점주의 완벽한 승리입니다. 패배자들이 서로 먼저 나가겠다고 문 앞에서 문고리 쟁탈전을 벌이는 모습은 지켜보는 우리를 웃게 했지요.
‘짜식들, 꼼짝 못하는군!’
언젠가는 이 기가 막힌 방법을 꼭 써먹겠다고 다짐했어요.
운 좋게도(?) 얼마 안 되어 곧 기회가 왔습니다. 미소를 가장한 매의 눈으로 술을 사는 손님들을 관찰하던 그때 두 남자가 눈에 띄었습니다. 물건을 고르는 내내 속닥속닥 붙어있던 그들은 내 앞에 와서는 언제 일행이었냐는 듯 각자의 포지션으로 흩어졌습니다. 한 명은 카운터에 장바구니를 내려놓았고 다른 한 명은 조용히 밖으로 나갔어요. 과자들로 채워진 장바구니의 한구석에 자리한 맥주병이 눈에 띄었습니다. 맥주를 한 손에 집어 들며 손님의 얼굴을 확인했어요. 눈 밑까지 올려 쓴 마스크를 내려달라는 요구를 할 필요도 없을 만큼 어린 눈빛이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내비친 긴장과 경계의 눈빛을 도저히 모른 척할 수 없어 의무를 행사하기로 했지요. 위조된 신분증일지 모르니 철저하게 검증하기로 마음먹었어요. 아차! 생일도 꼭 물어봐야지!
"신분증 부탁드립니다."
"네?"
“신분증이요.”
분명 들을 각오가 돼 있어야 할 단어인 신분증. 한데 이 아이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멍하니 나를 바라만 보더군요. 그러더니 갑자기 아기처럼 고개를 도리도리하고는 푹 숙이고 말이 없습니다. 당황하는 쪽은 오히려 나였어요. 보통의 아이들은 주머니를 뒤지는 척을 하다 집에 두고 왔으니 가져오겠다 하고는 냅다 뛰어나갑니다. 당연히 돌아오지는 않아요. 혹은 편의점의 그 아이처럼 형이나 언니 신분증이라도 가져오는 성의와 노력을 보이는 게 일반적인데 이 아이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는 이렇다 저렇다. 아무 말이 없습니다. 하다못해 삼십육계 줄행랑이라도 쳐야 이 상황이 마무리되는데 그저 처량하게 서 있으니 내가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가, 가란 말이야! 어서 도망가라고! 모른 척할 테니 저 문을 박차고 나가라고! 네 친구도 밖에서 기다리잖아? 너에게 훈계할 마음 따위 없어! 그러니 어서 나가라고!'
용서와 포용을 담은 눈빛으로 바라보는데도 고개를 푹 숙인 채 부동자세이니 이를 어쩌나요. 날카로운 공격은커녕 어쩐지 달래줘야 할 것 같습니다.
"몇 살이야?"
"고3이요."
"그렇구나. 이 물건은 가져다 제자리에 정리해 줄래?"
"네"
제자리에 맥주를 정리하고서는 과자는 다시 카운터에 내려놓습니다. 어라? 보통은 당황해서 과자까지 진열대에 던져두고 나갈 텐데 그 와중에 술만 놓고 오는 걸 보니 실속은 다 차리는 아이입니다.
"사장님 정말 죄송해요. 저 오늘 처음 해보는 거예요."
"응. 그래 보여."
"제가 이렇게 어설픈지 몰랐어요. 저 1년 뒤에 술 사러 다시 올게요."
"응. 근데 너 1년 뒤에도 신분증 검사받을 얼굴이야. 꼭 신분증 챙겨 와."
"네. 오늘은 죄송합니다."
"호기심에 그럴 수 있지. 근데 다른 데 가도 걸리니까 아무 데도 가지 말고 그냥 얌전히 1년 기다려."
"네"
스무 살이 되어 다시 온다면 내 돈으로 맥주를 사주고 싶을 만큼 예의 바른 아이입니다. 한데 2년이 지난 지금도 오지 않는 걸 보니 고3도 거짓말이었던 것 같군요.
바쁜 시간, 계산이 밀리면 가끔 눈의 초점이 계산대 모니터에 고정됩니다. 경계심은 오로지 계산이 맞고 틀리는지에만 작동하느라 손님 얼굴을 확인할 틈이 없지요. 단말기에 손님의 카드가 꽂히고서야, 즉 타이밍을 놓친 후에야 마주한 얼굴이 언뜻 어려 보이면 심장이 쪼그라듭니다. 황급히 신분증을 요구한 적이 있는데 손님은 마지못해 신분증을 꺼내면서 주의를 주더군요.
"이미 결제되었는데 뒤늦게 보여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틀린 말이 하나도 없는 정확한 지적입니다. 다행히 20대 초반이라 별 탈 없었지만 다시 한번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지요. 그 후로 10대인지 성인인지 헷갈리면 무조건 신분증 검사를 원칙으로 삼았어요.
"사장님. 지금 네 번째 검사하는 건데요?"
"아 정말요? 어쩌죠. 마스크 쓰면 누가 누군지 몰라서…. 미안해요. 다음엔 꼭 기억할게요."
오류 난 경각심, 과도한 권리 남발은 결국 몇몇 손님의 짜증으로 돌아오니 이번엔 내 얼굴이 벌게지더군요. 이건 학습된 능력도 동물적인 감각도 아닌 그저 영업정지와 벌금에 대한 두려움으로 떠는 어느 자영업자의 몸부림입니다.
막걸릿집을 하는 손님이 있어요. 하루는 안색이 안 좋아 무슨 일 있느냐 물었더니 한숨을 푹 쉽니다.
“며칠 전에 젊은 여자 몇 명이 왔길래 신분증 검사를 했어. 요즘은 모바일 신분증 보여준다고 하더라고? 성인인 걸 확인하고 막걸리를 팔았는데 계산할 때 말이 딱 바뀌더라니까. 위조된 신분증이었다고. 자기들 미성년자라고 술값을 안 주겠다는 거야. 신고하겠다는 거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들이 협박하는 게 어찌나 화가 나던지 나 그냥 경찰 불렀어. 세상 무서운 줄 알아야지. 어린놈들이!! 근데 세상 무서운 건 내가 알게 생겼어. 나 영업정지 당했어. 뭐 어쩌겠어. 이참에 쉰다고 생각해야지. 아직도 분이 안 풀리네. 에이 나쁜 놈들.”
이처럼 동종업계 점주들이 벌금이나 영업정지를 당하는 일을 듣곤 하는데 다음 타깃은 내가 될까 한동안은 두려움에 떨게 되지요. 사람을 속인 건 미성년자이지만 모든 책임은 업주가 감당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인터넷상에서는 구매자도 같이 처벌해야 한다고 목소리 높입니다. 구매자도 같이 처벌하자니 판매자와 구매자 작당의 모의가 우려되고, 구매자만 처벌을 받기에는 판매자의 부도덕이 염려됩니다. 그렇다면 우려와 염려를 최소화할 효과적인 방안은 무엇일까요?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청소년의 호기심이 일탈이 되고 일탈이 비양심과 부도덕으로 확장되는 행위를 제재할 대책은 필요해 보입니다. 마트와 편의점의 피크 타임에 방문하는 청소년이 더 이상 불청객이 아닌 환영받는 손님이 되기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