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 매장 내 냉장고와 냉동고를 잠시 끌게요. 잡음이 들리면 안 되거든요.”
생각지 못한 일이에요. 마트에서 냉장고 냉동고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건 그야말로 대참사예요. 가게에서 터지는 사고 중 1티어 대형 사고로 모든 걸 멈추고 원래대로 복구하지 않으면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냉장고 수리비는 덤이고요. 올여름처럼 더운 여름이 있었을까요? 오래된 냉장고라 한낮이면 버티지 못할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부품을 갈려면 냉장고 하나당 백만 원은 우스운 가격이에요. 돈이 없으면 몸으로 때워야지요. 여름내 냉장고 실외기에 물을 뿌려 열기를 식혀주었어요. 너무 절실하면 사물에게도 말하는 심정 아실까요?
“힘들지? 덥긴 덥다. 그래도 좀만 더 견뎌줘. 부탁할게”
물을 뿌리며 기계에 사정을 하는 남편의 모습이 짠한 여름이었어요.
이토록 애지중지 다룬 냉장고를 일부러 꺼야 한다네요. 몹쓸 짓 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지만 적극 협조해야 해요. 돈 받았잖아요. 이제 와서 못 한다고 하면 계약위반이에요. 먹튀가 안 먹히는 타이밍이에요. 스탭들 눈치가 백단이에요. 내 걱정을 눈치채고는 촬영 순간만 잠시 끄는 거니 걱정하지 말라 안심시켜요. 그제야 마음이 놓여요.
모든 냉장고와 냉동고의 위치를 알려주고 스위치 앞에 한 사람씩 서서 신호를 기다렸어요. 냉동고는 두꺼비집의 스위치로 작동되어 제가 담당했고요. 시범 삼아 동시에 스위치를 내렸어요. 조용해요. 마치 세상이 멈춘 듯한 고요함이 영 이상해요. 그동안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와 음악, 오가는 손님들로 인해 가게는 항상 시끌시끌했어요. 어쩌다 음악 소리만 줄여도 익숙지 않은 허전함에 다시 볼륨을 높여 마음의 안정을 찾았지요. 한데 냉장고까지 꺼버린 지금은 그야말로 무음상태…. 장사 이래 처음 겪는 지금, 이 순간이 꼭 영화 같아요. 왜 있잖아요. 길거리를 걷던 모든 사람이 마법에 의해 갑자기 멈추어 버리는, 내리던 눈도 멈추고 도로 위 자동차도 멈추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주인공만 그 광경에 당황하여 주변을 둘러보는. 익숙한 장소에서 굉장히 낯선 기분을 느껴요.
소음 체크가 끝나자, 배우들이 자리를 잡아요. 슬레이트마저 ‘탁’하고 입을 다물자, 촬영은 시작되었어요. 가늘고 길게 호흡을 유지하며 감독에 빙의된 채 배우의 연기를 지켜봐요. 난 지금만은 봉준호예요. 배우의 표정과 손짓, 대사 톤을 체크해요. 분명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목소리 톤은 아니에요. 이것 또한 하나의 기술이라는 생각이 드니 새삼 배우들이 대단하게 느껴져요.
“다시 찍을게요, 들고 있는 물건을 살짝 손안으로 틀어볼게요.”
“돌아설 때 조금만 천천히요.”
봉준호 감독 드립이 무색할 만큼 아무 생각 없이 현장을 지켜보는 나와 달리 감독님은 하나하나 체크하며 좀 더 나은 장면 연출을 위해 정신을 집중했어요.
“부아아앙, 부아아아아아”
눈치 없는 배달 오토바이가 자신의 존재를 크게도 알리며 골목길을 질주해요.
“에이”
오토바이 소리에 몇몇 스텝이 한숨을 쉬고 감독님은 “다시”를 외쳤어요.
지켜볼수록 참으로 예민한 작업임이 틀림없어요. 같은 장면인데도 정면에서 찍고 옆면에서 찍고 위에서 찍기를 반복해요. 촬영이 계속될수록 스위치 ON/OFF 작업이 슬슬 번거로워요. 한 스탭과 난 냉동고 스위치 위 다른 스위치까지 내려 여러명의 수고를 덜자 했어요. 나름 효율적인 방법이라 생각했지요. 신호에 따라 스위치 두 개를 힘껏 내렸어요. 가게는 다시 조용해졌고 배우의 대사가 크게 들려와요. 카운터에서 바라보는 세상이 오늘은 더욱더 재미있고 특별하다고 느끼는 순간,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알았어요.
내 앞의 포스기 모니터마저 조용해요. 방금까지 화면을 환하게 밝히던 백색의 판매창은 사라지고 어둠의 흑색이 화면을 차지해요. 검은색 덕분에 모니터 위 먼지만 더 도드라져 보여요. 아니 잠깐만요. 지금 흑백 요리 촬영도 아닌데 왜 제 모니터가 흑백이 반복되는 건가요. 짐작이 가요. 급하게 컴퓨터를 다시 켰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아요. 식은땀이 흐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냉장고가 아닌 포스기가 고장 날 줄이야! 니가 고장 나면 어떻게 계산하냐고!! 그 스위치가 포스기 스위치인 줄 알았다면 그토록 세차게 내리지 않았을 거예요!!
“어머, 야 너 왜 이래? 정신 차려! 얼른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어서 깨어나란 말이야!”
제가 말했죠? 절실하면 기계에도 사정을 하게 된다고.
밖으로 나가 포스 담당자에게 전화해 긴급뉴스를 전했어요. 주말이라 당장 갈 수 없대요. 오후까지 기다리래요. 비관적인 상황에 눈앞이 캄캄하고 실성할 것 같아요.
“최대한 빨리 부탁해요!”
영화를 찍던 사람들이 상황을 눈치채고 일제히 나를 쳐다봐요. 또다시 침묵이 흐르는 어색한 상황이에요. 이 순간은 정말로 내가 주인공이에요.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세상이 멈춰버렸으면 좋겠어요.
그토록 바랐건만 시간은 잘만 가요. 촬영이 끝나버렸어요. 아직 손님들을 맞이할 준비가 안 되었는데 말이죠. 이번엔 괜찮다, 별일 아니라는 표정으로 스태프들을 안심시키려 했지만 어설픈 연기와 목소리 톤은 곧 탄로 났어요. 배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봐요. 포스기 고장으로 가장 걱정이 되는 건 계산도, 수고비도 그 무엇도 아니에요. 이 황당한 사건이 남편 귀에 들어간다면 잔소리 폭격이 시작될 거예요. 최소 며칠은 놀림을 당할 거예요. 감당할 자신이 없어요. 가만히 듣고 있을 저도 아니고요. 오늘 또 가게에서 남편과 아름다운 추억 하나 만들게 생겼어요!
잔소리는 잔소리고, 어서 대처 방법을 찾아야 해요. 다행히 위기를 모면할 방법이 생각났어요. 포스기는 죽었지만 카드 단말기는 살아있어요. 가격표는 다 붙어있으니, 총금액으로 단말기에 결제하고 나중에 포스기에 입력하면 돼요. 손님들에게 상황을 차분히 설명하니 모두가 이해해 주었어요. 손님과 함께 물건 하나하나 가격을 확인하고 계산기를 두드리는 모습이 이제는 티비에서나 볼 수 있는 옛날 슈퍼 모습 그대로예요. 익숙한 장소에서 또다시 마주하는 낯선 풍경에 이제는 웃음이 나와요.
촬영은 끝났지만, 위층 사람들은 수시로 오가며 상황을 물었어요. 특히 나와 같이 스위치를 내린 이는 더욱 죄인이 되어 거듭 사과했고 이 상황이 불편해 화제를 돌렸어요.
“직업이 스태프예요?”
“편의점을 하고 있어요.”
의외의 대답이었지만 나와 비슷한 업종이라 호감이 가요.
“오늘은 알바가 근무예요?”
“네. 이거 찍으려고 사람 구해놓고 왔어요. 편의점에서 돈을 벌어 영화 찍는데 보태요.”
적은 나이는 아닌 듯했는데 여전히 자신의 꿈이 있다니. 365일 연중무휴의 편의점을 누군가에게 맡기고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니. 대충 질끈 묶은 머리에 피곤한 얼굴이 나와 같은 모습이에요. 다르다면, 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 꿈에 대해 눈을 반짝거리며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었죠. 그이와의 대화에 생각이 깊어져요.
지역카페에 마트에서의 일상을 재미 삼아 올린 게 글쓰기의 시작이었어요. 감사하게도 재밌다는 반응이었고 곧 브런치 작가가 되었지요. 어느새 브런치 4년째에요. 그사이 많은 작가님을 알게 되었고 그 작가님들의 글을 읽는 것도 브런치의 또 다른 재미였어요. 필력에 매료되어 팬을 자청한 작가님들도 있었죠. 예상대로 모두 출판사의 선택을 받았고 책을 출간하였어요. 팬인만큼 응원과 축하의 인사를 건넸어요. 시기와 질투는 하지 않는 편이라 그 대상으로 삼은 적은 없어요. 하지만 부러운 건 사실이에요. 나도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혼자서 꾸준히 글을 쓰며 실력을 높이고 성과를 얻기란 쉽지 않았어요. 자연스럽게 좌절감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보다는 정신 승리를 하기로 했죠.
‘어려서부터 수없이 바뀐 나의 꿈에 작가는 단 한 번도 없었어. 우연히 잠시 관심받은 거야. 그러니 그만하자.’
낙담 끝에 포기를 택했지만 할 일을 미루는 것 같은 찝찝함과 아쉬움은 마음속에 남아 있었어요. 그 감정을 모른 척 할 수 있었지만 지워버릴 수는 없었죠. 올해, 특히나 위기인 자영업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생업에 온 힘을 다 쓰면서도 말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그이의 등장은 생각할수록 의미심장해요.
컴퓨터를 복원하는 데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그 오랜 시간 동안 역시나 남편의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고통에 시달렸고요. 잔소리를 튕겨내기 위해 오전에 있었던 일련의 일들을 곱씹자 곧 어느 깨달음에 도달해요. 스위치를 함부로 내리지 말자, 사고가 나더라도 남편은 부르지 말자! 웃자고 하는 소리예요. 스위치로 오늘 일이 꼬인다 싶었는데 내 안의 꼬인 문제를 풀어주는 운명의 장치였어요. 스위치가 아니었다면 냉장고가 고장 났을 하루에요.
여러분들이 제일 궁금한 내용 알려드릴게요^^
위층 사람들이 찍은 영화는 김소영 감독의 [슬기다운]이에요. 잘 못 들어보셨죠? 내년 광주 독립영화제 출품작이래요. 기대했던 스케일이 아니라 당황하고 실망하셨을까요~~~? 매년 유명 정치인들은 많이 내려오지만(전 본 적 없음.) 유명 배우가 출연하는 대형 영화사들이 우리 동네까지 내려올 기회는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요즘 넷플릭스 흑백요리사가 인기이고 출연자 모두가 이슈잖아요. 저도 보고 있는 중이고요. 유명 요리사의 절반 이상도 이 프로그램을 통해 알게 되었어요. 그러니 흑수저 요리사들은 말해 뭐해요. 하지만 프로그램이 진행될수록 무명의 흑수저 요리사들 실력이 백수저 요리사들을 위협하더군요. 우리는 몰랐지만 자기만의 꿈을 향해 달려오던 사람들이었고 요리 예능을 통해 그동안의 노력이 빛을 발하였어요. 이제는 시청자에게 요리사로 이름을 남기에 되었고요. 편의점을 하며 영화를 찍는 그 스탭도 어쩌면 흑수저 요리사에요. 김소영 감독과 젊은 무명 배우도 언젠가 영화계의 나폴리 맛피아, 이모카세, 급식대가, 철가방 요리사로 주목받을지 모를 일이에요.
흑백요리사의 에드워드 리가 자신이 만든 요리를 들고 심사위원에게 가며 말하잖아요.
“심사위원에게 가는 길은 길었어요. 가끔은 잠깐만 돌아가서 뭔가 고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하지만 한 번 걷기 시작하면 끝까지 걸어야 하죠. 해봅시다.”
멋진 말이에요. 이 명언은 요리사, 영화인을 넘어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 아닐까요.
사실, 저도 관심이 없어 광주 독립영화제가 있는 줄도 몰랐지만, 내년은 달라요. 의미를 부여하니 아카데미 시상식만큼 기다려져요. 영화 [슬기다운]을 찍으며 어려움에 부딪히며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을 테지요. 에드워드의 말처럼 돌아가서 뭔가를 고치고 싶을 테지요. 하지만 끝까지 걸어 내년 영화제에서 관객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영화가 되기를 응원해요. 영화계의 러브콜을 받기를!
영화인들이 이사 오니 영화를 찍고 영화제도 구경하러 가게 생겼어요. 역시 이웃을 잘 만나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