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라면의 숨겨진 기능
"사장님. 거긴 지금 어때요?"
"한가해요."
"저희도요. 한가하다 못해 지루해서 전화해 봤어요."
"이달은 전국이 야외 축제인 데다 단풍 구경 다니는지 매출이 뚝뚝 떨어지네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컵라면에 물 좀 부어볼까요?"
"그럴까요? 하하하"
알고 지내는 편의점 점주와의 통화 중 컵라면 이야기에 웃음이 나왔습니다.
손님과 컵라면이 무슨 상관이 있다고 컵라면에 물을 붓자고 했을까요? 한가하니 밥이나 먹자는 의미일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기서는 다른 뜻입니다. 손님이 없으면 밥이라도 편하게 먹자며 컵라면에 물을 붓습니다. 한데 신기하게도 물을 붓고 돌아서는 그 순간, 손님이 들어옵니다. 컵라면이 익는 시간 3분은 손님이 간단한 물건을 고르고 계산하는 데는 딱 적당한 시간이라 오히려 시간 때우기 딱 좋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점은 분명 좀 전까지 개미 한 마리 얼씬 않더니 손님이 갑자기 줄줄이 들어와 매장을 한참 구경한다는 것이지요. 물건을 고르는 시간은 점점 길어집니다. 그사이 나의 면발 치기를 기다리던 라면은 익다 못해 국물을 말끔히 흡수해 우동면이 되어있고요. 불어 터진 뻘건 우동면을 보고 있노라니 머피의 법칙이 생각납니다. 아니면 진짜 심술쟁이 도깨비라도 있는 걸까요? 어쩜 타이밍이 이리도 절묘한지 신기할 정도입니다.
수리수리마수리 같은 아이들이나 할법한 주문을 외우지 않아도 컵라면 한 젓가락에 손님이 들어서는 이 순간, 과연 나는 손님을 반가워할까요? 아니면 불어 터지는 라면을 아쉬워할까요? 장사꾼인 만큼 매출 금액에 따라 반가움과 아쉬움 사이에서 마음의 온도는 오르락내리락합니다. 철저하게 이윤으로만 따져보자면 담배 한 갑 손님은 솔직히 라면이 아쉽지요. 정해진 식사 시간이 없는 자영업 특성상 빨리빨리 식사가 몸에 배어 있지만 (특히나 1인 근무 매장) 컵라면 한 그릇 정도를 먹는 몇 분의 시간은 방해받고 싶지 않습니다. 이윤 500원이 안 되는 담배와 1,000원 전후 되는 컵라면의 원가만 비교해도 내가 손해입니다. 게다가 컵라면을 가장 맛있게 먹을 타이밍까지 계산하면 더욱 그렇지요. 문 여는 소리에 예열되었던 내 심장이 “담배 주세요”의 말 한마디로 저 밑까지 '쿵' 떨어집니다.
그와는 다르게 손님이 장바구니를 드는 순간 기대감으로 볼이 살짝 달아오릅니다. “툭, 툭, 툭” 장바구니에 물건이 하나씩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제 마음속 온도도 1도씩 올라갑니다. 가득 쌓인 바구니를 카운터에 내려놓을 때면 그 온도를 견디지 못해 터져버리기 직전입니다. 내가 포기해야 하는 컵라면의 원가와 10분의 점심시간은 일종의 제물이자 투자 비용으로 여기게 되며 투자 대비 고소득에 입꼬리가 제멋대로 어깨춤을 추지요. 마음속 하트를 날리며 다음 방문을 유도하느라 컵라면의 존재를 잊습니다.
게다가 나도 노하우를 터득했습니다. 물 부은 지 3분이 지날 때쯤 면발만 건져내 그릇에 담아두면 시간이 지나도 탱탱함이 유지되어 뻘건 우동면만은 피할 수 있습니다. 밥도 먹고 돈도 버니 머피의 법칙이 샐리의 법칙으로 전환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이 법칙 전환이 바로 우리만 아는 컵라면의 숨겨진 기능입니다. 그러니 위의 [컵라면에 물을 부어볼까요?]는 샐리의 법칙을 위한 주술 행위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매일 시간별로 컵라면에 물을 부으면 곧 부자가 되겠다는 결론에 이르지만 세상의 이치는, 우주의 기운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컵라면 효과는 정말 배가 고픈 그 시간, 마침 30분 동안 손님 한 명 오지 않는 그 순간, 딱 10분 동안 아무도 들어오질 않길 기도하며 물을 붓는 그 간절한 타이밍이 맞아떨어져야 하는 찰나의 행운입니다. 아무 때나 물을 부으며 수리수리 마수리를 불러본다 한들 매장은 여전히 파리와 하루살이, 모기의 천국일 뿐입니다. 결국 1,000원의 투자금을 날리거나 원금 회복을 위해 불어 터진 면발을 내 위장 속으로 쑤셔 넣는 파국으로 끝나기 마련입니다. 나름 여러 번의 시험 끝에 얻어 낸 결론으로 참으로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우주의 이치이자 흡사 미신과도 같은 현상입니다.
컵라면 유사품은 또 있습니다. 전화가 그렇습니다. 소식이 궁금한 친구에게 연락해 볼까 싶어 연락처를 찾습니다. 나에게도 들리지 않는 버튼음은 가게 문을 뚫고 나가 주위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돌고래 급 청력의 사람들이 버튼음 초음파에 이끌려 가게로 발길을 돌립니다. 이 방법 또한 여러 번 효과를 보았습니다. 통화 중 "잠깐만"을 몇 번 반복하여 기다리는 친구도 지치고 나도 미안해 연락 두절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졌지만요. 그러니 유유상종, 이심전심으로 "잠깐만"을 기다려 줄 수 있는 가족이나 동종업계 지인들에게 안부를 물으며 좁은 인맥을 유지하게 됩니다. 때로는 편의점 점주님과 이와 같은 농담을 합니다.
“우리 각자 핸드폰 하나 더 개통해서 하루 종일 통화상태로 둬 볼까요? 대박 날 것 같은데요?”
또 다른 방법으로는 화장실 가기, 유튜브 보기 등이 있습니다. 다만 주의점은 손에 남은 물기를 탁탁 털며 화장실에서 나오다 손님과 아이컨택을 하는 민망한 상황이 되지 않도록 나올 타이밍을 잘 찾아야 합니다. 유튜브에 집중하면 어떤 손님들은 뭣이 그리 궁금한지 고개를 빼꼼 내밀어 같이 영상을 시청하니 프로그램 선택에 주의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잠시라도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마침 19금 장면이 목격되면 낭패입니다. 다음 날, 온 동네에 가게에서 야동을 보는 변태 점주로 낙인찍혀 어떤 선행에도 이미지 개선이 절대 되지 않는 늪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참고로 노트북 사양이 꽤 괜찮은 편이 아니라면 넷플릭스는 추천하지 않습니다. 드라마를 튼 지 10분도 안 되어 담배 한 갑 손님, 또 5분도 안 되어 껌 하나 손님이 드나들어 재생과 일시 정지 버튼을 반복하면 어느 순간 화면은 완전정지에 이릅니다. 넷플릭스를 껐다 다시 들어와야 다음 장면을 이어볼 수 있으니, 뼛속까지 빨리빨리 정신인 저에게는 극혐 대상입니다. 내가 공포 영화를 본 것도 아닌데 심장이 멎을 것 같은 답답함과 발작이 오니 차라리 안 보고 말겠다는 굳은 의지를 다지게 되지요. 하지만 느긋한 성격이라면, 극의 흐름을 따라가는 집중력이 뛰어난 점주라면 이것만큼 거저먹기가 없을 듯합니다.
위의 내용과 같이 여러 방법이 있다고 한들 사람의 본능 중 ‘식’에 해당하는 컵라면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면발을 한 젓가락 집어 입안 가득 넣어 오물오물 쫄깃함을 느낄 때쯤, 면발은 끝내 견디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끌어안고 있던 열기를 토해내지요. 그 열기를 나도 감당할 수 없어 ‘후’하고 뱉어내며 ‘후루룩’ 따뜻한 국물로 입안을 다시 데우고 목구멍으로 넘기는 행복은 무엇과 바꿀 수 없습니다. 아! 딱 하나 있습니다. 가득 찬 장바구니! 그것만이 ‘식’의 행복을 뛰어넘는 쾌감을 선사하는, 도파민을 미친 듯이 폭발시키는 매개체입니다. 그리하여 그 쾌감을 찾아, 가득 찬 뱃속임에도 괜히 컵라면에 물을 부어봅니다. 더 이상 파리와 하루살이들의 천국이 아닌 손님들로 가득 찬 나의 천국을 기대하면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