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하나 외롭지 않은 가을, 그 정취를 즐기는 것은 꽤 괜찮은 일이다. 가을엔 유독 이런저런 행사가 많다. 적당한 기온과 기분 좋게 부는 바람이 축제를 열기에 안성맞춤이다. 그중에 수공예품 마켓을 여는 축제에 들러보는 일처럼 가을과 잘 어울리는 나들이는 없을 것이다.
이글루 같은 천막들이 나란한 골목 사이에는 질 좋은 버터로 굽고 있는 쿠키와 사장님 본인이 반해서 공수해온 원두를 로스팅 하는 냄새가 가득하다.
유기농 토마토와 딸기로 만든 잼을 작은 병에 담아 파는 젊은 부부, 점성술과 매칭 한 액막이 팔찌를 매듭지어 걸어놓는 히피 머리 청년, 손뜨개로 만든 가방이 알록달록 정다운 상점의 사장님은 뜨개질에 여념 없고 그 옆으로 천연염색한 천으로 만든 부들부들한 앞치마들이 정갈하게 걸려있었다. 아로마 향이 가득한 수제비누는 막대사탕 색깔이라 한 입 베어 물고 싶게 생겼다.
어느 한 군데라도 그냥 지나치고 싶지 않아 이곳저곳을 찝쩍거리다 원두커피를 핸드드립을 해주는 카페 의자에 앉았다. 호빵처럼 부푸는 원두향이 나는 바람을 맞으며 한없이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블랙커피 한 모금을 삼키며 가을 오후에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단지 사람의 손이 많이 간 물건들과 음식들을 비싸다 않고 사들일 수 있다면 더욱 행복할 것이겠지만 그러지 못하는 주머니 사정이 아쉬울 뿐이었다.
입구에서 구경했던 손뜨개 케이프를 다시 보러 걸음을 옮겼다. 네크라인이 늘어난 티셔츠에 걸치면 예쁠 것 같았다. 사장님은 여전히 뜨개질에 여념이 없으셨다.
“이거 한번 봐도 될까요?”
“그럼요? 걸쳐보셔도 돼요. 여기 거울도 있어요.”
아담한 체구에 작은 얼굴, 말할 때마다 젓가락으로 찍은 것만큼 들어가는 보조개, 반달눈을 하고 말하는 여사장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분명 내 기억 속 어디엔가 있는 사람이었다.
“저,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그녀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 ***에요. 기억하세요?”
“세상에.”
우리는 서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만난 사이였다. 그리고 30년 만에 아무 연고도 없는 도시에서 다시 만났다. 우린 둘 다 어쩌다 만나지 않게 되었는지를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좋은 추억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우리는 과제를 받느라 앞뒤로 줄서서 수다를 떨던 소녀들 같았고, 숙제를 제출하고 나서 다시 만난 시점이 바로 오늘이었다. 그때 우리는 서로에게 “할 수 있다”라며 응원했었다. 그 응원 덕에 나이에 맞지 않게 용기를 낸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아마 우리는 결혼을 하면서 만나지 않게 되었을 거다. 의정부에 사는 그녀와 서울에 사는 나는 어쩌다 큰맘 먹고 중간 즈음에서 만났었고 전화로 안부를 묻다가 서서히 연락을 하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그즈음부터 우리는 이 소소하고 말랑한 만남을 지속 할 수 없을 만큼 치열한 삶을 살아내야 했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나는 살면서 가끔씩 그녀를 생각했었다. 좋은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었노라고 했다.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진심으로 반가운 포옹을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서로에게 “남은 인생을 즐기라”라고 응원을 하며 헤어졌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그녀를 향해 다시 한 번 돌아봤다. 어쩌면 다시 볼 수 없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예전에 우리가 기억도 안 나는 이유 때문에 헤어진 것처럼 지금은 우리가 다시 만나야 할 명분 역시 너무 희미하기만 하다. 그녀나 나나, 서로 말하지 않아도 그런 인생사의 이치쯤은 너무 잘 알만큼 나이 먹었다. 하지만 이 순간부터 그녀를 또 다른 모습으로 오래토록 기억 할것임은 분명하다.
하늘에 마켓임을 알리는 총 천연색 플래그가 펄럭이고 있었다. 마치 이 가을에는 지나가는 마음은 붙잡지 말고 담아야 할 마음만 남겨두라는 듯이 성글게 얽은 매듭들과 작은 주머니들이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