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도시에서 만난 내 여동생
린은 자주 웃었다. 생글생글 웃었다. 어색함을 무마하거나 예의를 차리거나 친절을 가장하는 웃음이 아니라 그저 기뻐서, 즐거워서, 신이 나서, 재미있어서, 기분이 한껏 좋아서 웃었다. 린이 웃는 모습은 예뻤다.
나는 린을 좋아했다. 그보다 린이 나를 먼저 좋아했다. 어쩌다 떠나게 된 긴 여행, 그 첫 도시에서 여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한국에서 짊어지고 온 일에 파묻혀 적응할 엄두도 못 내던 나를 좋아했다. 태국어를 한 마디도 못하고, 그리 사교적이지도 않고, 한국에서도 힘든 마감을 낯선 땅에서 하느라 당황하고 쩔쩔매고 있던 나를 좋아했다.
내가 커피를 사러 가려고 숙소의 방을 나서면 활짝 웃으면서 팔꿈치에 매달리듯 붙어 태국어로 “어디 가?”라고 물었다. 자기 먹을 점심을 사러 나가면서 “언니도 뭐 사다 줄까?”라고 물었다. 가끔 숙소 정원에서 일을 하고 있으면 의자를 붙이고 앉아 “뭐 해?”라고 물었다. 내 노트북과 휴대전화, 번역하고 있던 책을 신기해 하고 재미있어 했다. 마감에 신경이 곤두선 내가 좀 쌀쌀맞게 대해도 옆에 붙어 앉아 끊임없이 재잘재잘 말을 이어갔다.
높은 발성의 쉽고 분명한 발음. 나는 서툰 태국어를 모두 린에게 배웠다. 그렇다고 린이 자리를 잡고 앉아 태국어를 가르쳐 준 것은 아니다. 이 신기하고 낯선 이방인에게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던 린은 인내심 있게 단어를 반복했고 내가 “응?”이라는 반응을 보일 때마다 머리를 쥐어짜서 손짓과 몸짓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인터넷을 검색하며 뜻을 알려 주었다. 내가 린의 앳되고 귀여운 말투를 따라 태국어를 조금 하면 “와, 잘해.”라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린은 내게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했다. 몇 가지 말을 가르쳐 주면 “나는 머리가 나빠서 다 잊어버릴 거야.”라고 자조하듯 말했지만 린은 귀가 좋았다. 태국 사람에게는 어렵고 긴 한국어 발음을 또박또박 정확하게 따라 했다. 태국어는 린의 모국어가 아니었다. 타이야이족이었던 린은 아주 어렸을 때 미얀마에서 태국으로 넘어왔다고 했다. 린은 자기가 어릴 때 살던 산골의 집을 그림으로 그려서 보여 주었다. 땅에서 한 칸 올려 판자로 지은 나무집, 부엌은 나무집의 아래 야외에 있었고 마당에서는 닭을 키웠다고 했다.
이민자의 신분으로 태국에 온 린은 학교에 제대로 다니지 못했지만 태국어를 유창하게 배웠고, 렉 아저씨네 숙소에서 청소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한 달 동안 거의 매일 출근하며 받는 돈은 당시 환율로 채 20만 원이 안 되었다. 매일 들고 나는 손님들의 방을 청소하고 설거지를 하고 마당에 물을 뿌리고 공용 화장실과 공용 공간을 쓸고 닦으면서도 린은 항상 즐거워 보였다. 처음에는 내가 린의 처지를 가여워하고, 린은 내 처지를 동경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것들은 전혀 상관없어졌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매일 얼굴을 마주했고,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웃었고, 기회가 될 때마다 서로와 무언가를 나누려고 애썼다는 점이다.
그 무렵 아침마다 딸랏 빠뚜 치앙마이(치앙마이 게이트 시장)에서 밥과 반찬과 생선 튀김을 사다가 아침으로 먹었다. 우리는 밥을 안 먹고 출근한다는 린에게 함께 아침을 먹자고 권하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반찬이 있으니 밥만 1인분 더 사면 될 일이었다. 그 당시 시장에서 카우니야오 찰밥을 20바트 어치 사면 셋이 배가 터지도록 먹을 수 있었다. 린은 항상 생선 튀김의 살은 우리한테 양보하고는 지느러미를 떼어먹으며 이게 맛있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그 말이 진심이었는지, 염치를 차린 사양이었는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몇 차례 우리와 함께 아침을 먹고 나면 린은 출근하는 길에 시장에 들러 삼 인분의 아침거리를 사 왔다. 온갖 채소와 버섯을 사 와 태국식 라면을 끓여주기도 했다. 여러 가지 재료를 넣은 태국식 라면은 곧 우리 셋만의 의식이 되었다. 특히 아침부터 비가 오는 날이면 신이 나서 휴대용 냄비를 꺼내다가 라면을 끓이고는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라면을 먹었다. 라면에 타이야이식 팟깟떵(마치 우리나라 잘 익은 갓김치와 맛이 흡사하다)을 곁들이고 매운 태국 소스를 얹어 먹는 법도 모두 린한테 배웠다.
매일 아침 수다를 떨면서 밥을 먹고 나면 셋이서 가위바위보를 해서 설거지를 했다. 숙소 주인장 아저씨는 그러면 너희가 린의 일을 빼앗는 거라고 조금 잔소리를 했지만 웃으면서 넘겼다. 내 태국어 실력은 좀처럼 늘지 않았지만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린과는 어떻게든 엉터리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을 때는 그냥 서로를 보고 깔깔 웃었다. 나이 차가 많이 나고, 언어도 통하지 않고, 공통점 같은 건 전혀 없었지만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어쩌면 가족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주 오랜만에 만나도 매일 만난 것처럼 친근하고, 가끔씩 떠올리면 마음 한편이 아련하면서도 그리운 사람을 가족이라고 칭한다면. 내가 치앙마이를 마음의 고향처럼 여기게 된 것은 그곳에 린이 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