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 뭘 가져가나요?

아무것도 가져가고 싶지 않지만, 나를 포함해서

by 와리

내게 가장 이상적인 여행이란 어디에나 메고 다닐 수 있는 작은 배낭 하나에 모든 물건을 다 챙겨 넣고, 그 배낭을 메고는 언제까지고, 어디까지고 걷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행 짐을 싸는 데 있어 원칙은 다음과 같다. 짐을 싸고 풀고 정리하는 데 가능한 한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을 것. 언제든 가방만 집어 들면 훌쩍 움직일 수 있을 것. 필요한 것이 가득 든 그 가방을 메고 오래 걸을 수 있을 것.

이 궁극의 짐 가방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자기 성찰과 숙고가 필요하다. 이 짐 가방에 무엇을 넣는가는 내가 ‘살아갈’ 수 있는 가장 최소한의 필요조건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낭에 대해 넣는 물건 하나하나에 대해 이것이 정말 내게 필요한 것인지, 어떤 쓸모가 있는지, 즐거움을 주는 것인지 숙고를 거듭한다.

우선 생애 첫 여행부터 빠지지 않고 갖고 다니는 글 쓰기 도구가 있다. 이 도구는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 차례 변화를 맞이했는데, 첫 여행에서는 대학 노트와 펜이었다. 무지 수첩에 만년필에 잉크를 챙겨 갔던 여행도 있었다. 그 무렵에는 여행을 계획하는 순간 그 여행에 걸맞은 공책을 한 권 고르는 것이 여행 전 나만의 의식이었다. 작은 수첩일 때도 있었고, 예쁜 공책일 때도 있었고, A4 지를 여러 번 접은 종이 조각일 때도 있었다. 그 가장 앞장에 이번 여행의 제목과 내 마음가짐을 적고 그 후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시간이 날 때마다, 여행 기분에 젖고 싶을 때마다 그 공책을 펴고는 여행지의 지도를 그리기도 하고, 언어를 공부하기도 하고, 가서 먹고 싶은 음식 목록을 작성해서 적어 두기도 했다. 그리고 여행에 가서는, 여행의 팔 할인 걷기와 기다리기에서 기다리는 일을 할 때마다 공책을 펴서는 머릿속에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들을 적는다. 방금 먹은 국수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내 앞에 앉은 사람의 표정을 상세하게 묘사하여 쓰기도 한다. 바람의 냄새를 분석하기도 하고 여행의 불편함에 대해 온갖 불평불만을 쏟아내기도 하다. 미리 그려놓은 지도에 내가 찾은 나만의 장소를 표시해 두기도 하고 오늘 하루 사용한 경비를 계산하여 한국에서 쓸 법한 하루의 경비와 비교해 보기도 한다. 다만 공책 하나와 연필 하나뿐이지만 그 공책을 펴는 순간, 여행의 순간들이 나라는 전환 장치를 통해 나만의 무언가로 변환되어 2차 창작된다. 내게 있어 여행의 기억은 단순한 셀피 사진보다 이 공책에 훨씬 오래 남는다. 그 공책에는 그곳의 내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책과 음악과 카메라. 요령이 없던 시절에는 평소에 읽기 어려운 책들을 어떻게든 여행 중에 읽어내리라 결심하고 안 그래도 무거운 짐 사이에 책을 욱여넣었다. 이때 조심해야 할 것은 여행지의 분위기에 걸맞은 책들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터득한 이치는 바닷가에는 역사나 인문 서적, 순수 소설은 잘 어울리지 않는다. 의외로 자기 계발서류가 바다에 어울린다. 그리고 물론 미스터리와 판타지물. 보라카이에서는 김영도 작가의 <눈물을 마시는 새>를 완독했었다. (맞다. 그 두꺼운 책 4권을 다 들고 갔었다.) 런던의 감옥처럼 어두컴컴하고 좁은 방에서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문장 하나하나가 몸에 스미는 듯했다. 치앙마이에서는 유독 일본 미스터리 소설을 많이 읽었다. 와카타케 나나미라든가, 미츠다 신조라든가, 미치오 슈스케라든가. 그러고 보면 다 좋아하는 작가가 되었다.

그다음 세면도구, 의약품, 화장품 분야는 여행자의 성향과 효율이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범주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칫솔 하나면 어디든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인데, 실은 이건 과장한 것이고 치약과 선크림 정도는 챙긴다. 그리고 나의 나약한 장을 위한 비상약과 손톱깎이가 있다. 맞다. 손톱이 길게 자랄 만큼 여행은 오래 해야 하니까. 그다음 또 사람마다 편차가 큰 범주는 옷일 것이다. 옷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가방이 몇 개가 있어도 모자랄 테지만, 나는 특수 상황에서 입는 옷(비옷이나 수영복) 외에는 이틀 정도의 여분 옷만 챙긴다. 그래야 여행지에 가서 그 장소의 날씨와 분위기에 어울리는 옷을 사 입을 수 있으니! 목표는 가능한 한 내 국적을 아무도 짐작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주위에서 나를 나로 인지하지 못할 때 찾아오는 자유 같은 게 있다. 아무도 나를 눈치재지 못하고 내게 신경 쓰지 않는 장소에서,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풀려나 온전히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자유다.

짐에는 가능한 한 집과 일상의 것들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오로지 여행을 위한 도구만을 담을 것.
여행지가 내게 줄 것들을 위한 여백을 만들 것.
내게 “필요”한 모든 것들은 집에 남겨 두고, 집에서의 삶의 방식마저 내려놓고, 가능한 한 백지의 상태가 될 것.
내가 삶에 세운 틀과 기준과 기대를 다 놓아두고, 오히려 때려 부수고, 그 해방감 속에서 다시 생각해 볼 것.
그런 다음 낯선 곳에서 무엇이 내게 올지,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받아들일 것.
그러니까 여행을 하는 것이다. 나 자신을 무너뜨리고 다시 짓는 여정을 통해 진짜 나를 향해 조금씩 나아가는, 혹은 진짜 나를 조금씩 쌓아가는 초특급 집중 수련 코스니까. 게다가 재미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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