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풍경을 만나러 여기까지 온 거야
눈을 뜨니 벌써 날이 밝아 있었다. 서둘러 숙소를 나선다. 우기의 끝자락인 10월, 막 동이 튼 치앙마이의 아침 공기가 서늘하고 상쾌하다.
부지런한 할머니들은 벌써부터 집 앞 골목의 나뭇잎을 쓸고 있고 수건을 머리에 둘러맨 아저씨는 편의점 앞 하수구를 청소하고 있다. 시장이 가까워질수록 이른 시간이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오토바이와 차와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난다. 이 시간은 시장을 보러 오는 사람보다 이미 볼 일을 다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이 더 많을 때다. 더 어둡던 시간에 켜졌을 불빛들이 아직도 환하다.
가장 먼저 좋아하는 반찬 가게로 향한다. 십몇 년 전 처음으로 치앙마이에 왔을 때부터 찾던 곳이다. 아니나 다를까 한 무리의 사람들이 가게 앞에 서 있다. 손이 빠르고 요령 있는 주인장은 십 년 전에는 아직 앳된 기색을 보이는 소녀였는데, 어느새 차분한 관록을 몸이 익힌 여인이 되어 있었다. 분위기가 달라졌지만 얼굴은 나이를 먹지 않은 듯 그대로다. 어떤 반찬을 고를지 손님이 잠깐 고민하는 동안 여유 있게 기다리지만, 일단 주문이 끝나면 각 반찬을 바나나 잎사귀에 척척 싼 다음 봉지에 담고 빠른 속도로 계산을 한다. 줄 같은 것도 없고 사람들이 그저 웅성웅성 모여 각자의 주문을 할 뿐. 주인장은 손님이 온 순서를 대략 파악하고 있다가 질서 있게 주문을 받고 물건을 내주고 계산을 한다. 제때 나서지 못하고 그저 얌전히 서서 기다리고 있는 외국인에게도 눈을 마주치며 주문을 받는다. 발음에 자신이 없으니 손짓으로 주문한다.
사실 이름은 몰라도 상관없다. 눈앞의 대접에 담긴 수십 가지 종류의 반찬에서 모양과 향이 마음에 드는 것을 가리키기만 하면 된다. 내가 주문한 반찬은 땀 마크아와 노마이 카이. 두 가지 모두 보통 태국 음식점에서는 잘 팔지 않는, 북부 음식 전문점에서만 찾을 수 있는 란나 전통 반찬들이다. 땀 마크아는 구운 가지를 절구에 찧어 양념한 반찬으로 삶은 달걀을 곁들여 먹는다. 노마이 카이는 죽순을 채 썰어 달걀과 함께 노랗게 볶은 것이다. 바나나 잎으로 세모난 모양으로 싸 주는 반찬 값은 하나에 20밧.
이제 물고기 튀김을 사러 간다. 십몇 년 전에 우리가 단골로 찾던 할머니네 생선 튀김 집은 지금은 없어졌다. 그때도 나이가 많았던 할머니는 아주 조그만 가판에서 오로지 생선 튀김만 파셨는데, 우리가 올 때마다 가장 방금 튀긴 큰 생선을 골라 주셨다. 그 할머니네 단골이 된 덕분에 다른 가게의 생선 튀김은 한 번도 먹어 보지 못했다.
항상 갓 쪄낸 밥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단골 밥집은 일찍 장사를 마치셨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주인아주머니는 우리가 코로나를 지나고 몇 년 만에 다시 이곳을 찾았을 때도 우리의 얼굴을 기억할 만큼 눈썰미가 좋았다. 그동안 훌쩍 큰 아이를 선보이고 서로 못 본 세월의 안부를 나누던 순간은 제법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 밥집 대신 시장 입구에 자리 잡은 체격이 좋은 아저씨에게 찰밥을 1인분 산다. “하 밧!” 아저씨가 목청 좋게 소리친다. 우리나라 삼각김밥보다 조금 더 큰 찰밥 한 덩이가 5밧이다.
한 차례 사람이 빠져 여유가 생긴 골목 사이로 주황색 가사를 입은 스님들이 맨발로 걸어 다닌다. 어느 가게에서는 동자승 두 명 앞에 신발을 벗고 무릎을 꿇고 앉은 할머니가 공양을 바친다. 그 순간만은 동자승은 어린아이가 아니라 축복을 내리는 부처님 대신이다. 다음 순간 자리에서 일어난 할머니는 마치 손자를 챙기듯 이미 가득 찬 공양통에서 음식을 꺼내 봉지에 덜어 담아주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가게 앞에서, 집 앞에서, 길가에서 신발을 벗고 공손히 무릎을 꿇고 앉아 공양을 바치고 축복을 받는다. 아침의 치앙마이에서 일상적일 만큼 흔한 이 풍경에는 어딘가 숭고한 데가 있다. 특히 노상에서 신발을 벗은 다음 그곳에서 바로 무릎을 꿇고 앉는 모습에 마음이 울린다. 이 단순한 동작에 이토록 큰 의미가 담겨 있다. 의식적으로 나 자신을 그만큼 낮추는 행위.
반찬과 밥을 넣은 봉지를 휘두르며 신이 나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다. 방금 집 앞에서 스님에게 축복을 받고 일어난 할머니가 돌아서다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마치 방금 받은 축복을 나에게도 나누어 주겠다는 듯이.
나는 이런 순간을 마주하기 위해 여기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