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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 율 Oct 22. 2023

억새밭에서

반지하 파라다이스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 감정을 뒤로한 채 각자의 발걸음을 옮겼던 날. 부슬비만 말없이 어깨를 적실뿐, 영화 같은 반전은 없었다. 그저 시간만 하염없이 흐를 뿐이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이도에게서 온 뜻밖의 연락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넌 눈이 좋아? 지금 답하기 어려우면 나중에 답해도 좋아, 연락 기다리고 있을게"


쨍쨍한 햇살이 내리쬐는 8월 초, 후덥지근한 날씨에도 이도는 이미 겨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도는 봄을 가장 좋아하지 않았던가?' 전화가 끊긴 뒤, 이도가 던진 질문을 천천히 곱씹어 보았다. 무엇이든 익숙해질 때쯤 변하는 것이 인생이라고 흔히 얘기하지만, 방금 받은 질문은 도저히 갈피를 종잡을 수 없었다. 그간 생긴 시간의 공백만큼 이도에게 일어난 변화의 맥락을 전혀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쉽사리 답변을 할 수 없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갑작스러운 연락이었고 예상 밖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흐르는 시간에 온전히 몸을 맡겼다.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들 속에서 억지로 물결의 방향을 틀고 싶진 않았다. 그 결과가 어떤지는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또 시간이 흘러 이젠 가을이 저물고 있는 억새밭에 서있다. 단지 흔들리는 억새의 풍경이 머릿속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다들 큰 이유 없이 마음에 끌려 찾게 되는 장소가 있기 마련인데 나에게는 억새밭이 그러하였다. 늦가을의 억새밭은 이미 억새가 듬성듬성 밀려 있었다. 억새들이 아직 밀리지 않은 곳으로 발걸음을 천천히 옮긴다.


키보다 큰 억새들 사이에 바람이 일자, 억새들이 쏴아아아- 파도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노을이 드리우기 전 선선한 태양빛이 주위를 감싼다. 눈을 감자, 늦가을의 풍경 속에서 여름이 느껴진다. 파도가 이는 모래사장. 햇살을 맞아 황금빛 모래알들이 반짝거린다. 그와 함께 일렁이는 여러 가지 기억들 속에서 이도가 했던 질문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다. 마침내 이도의 눈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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