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수난시대 #5
* 본편은 박스 안의 내용도 실화입니다.
젊은 층, 미혼, 한국인, 여자.
사회에서 내가 지닌 타이틀이다. 죽었다 깨어나도 남자가 되어 볼 수 없고, 죽었다 깨어나도 돌고래가 되어볼 수 없는 나는 막 사회라는 바다에 잠수한 사회초년생이다. 죽었다 깨어나도 다람쥐가 되어볼 수 없듯이, 당신도 내가 되어 볼 수 없다. 나도 그렇다. 당신이 아무리 되어보려 해도 그럴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솔직한 경험을 들려주고 싶다. 그게 아무리 낯부끄러운 모습일지라도. 그렇게만 한다면, 어쩌면 당신도 내가 되어볼 수 있지 않을까.
- 당신이 내가 되어볼 수 있다면
언젠가 신뢰하는 이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다.
"여자가 아름다움을 무기로 써서 좋은 것을 누릴 수 있다면 누리는 거야."
당신은 그 말이 꽤 일리 있다 생각했다. 아름다움이란 기준 안에만 들어가면 그저 편하게 이득을 취하고 나쁠 게 하나도 없지 않은가. 오히려 그런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타이틀 안에서 안락하게 지낼 수 있다면 그렇게 살기를 선택하는 것이 편하고 좋은 게 아닐까.
그래서 당신은 처음 그 말을 듣었을 때 마음에 떠오른 찜찜한 기분을 건져내서 마음 한 켠에 숨겨진 장롱 깊은 곳에 찝찝한 마음을 처박아두었다.
사람들이 이쁘다고 말하는 것을 가지려고 외모를 가꾸고 기준에 맞으려 노력하던 나날 뒤로 꽤 알려진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가게 되었다. 인사팀에 속해서 협회에 소속된 단체의 월급을 정산해 주는 업무였다. 키가 크고 마른 남성분이 당신을 데리고 원 테이블로 가서 “앉아 계세요.”라고 말한 뒤 곧이어 당신 또래의, 아니 당신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여자분을 데리고 와서 말했다.
“이번에 서류 합격하신 건 두 분이세요. 우선 조금만 기다리시면 바로 면접 진행할 거예요.”
사이트에서 확인했을 때는 분명 지원자의 나이와 성별이 다양했는데, 어쩐지 맞은편의 여자가 당신보다 세련되고 귀여운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하다. 설마 나이나 외모 같은 기준으로 뽑은 건 아니겠지.
6대 1 면접장에는 다섯 아저씨와 할아버지, 한 분의 아주머니가 앉아계셨다. 모두 직책이 높아 보이는 단체별 수장으로 보였다. 면접에 대답을 하는 와중에 아주머니가 주위를 둘러보며 아저씨와 할아버지들을 향해 물었다.
"제가 물어야 되겠지요?"
물어? 뭘?
그녀의 말에 아저씨들이 입을 다문 채 시선은 당신을 향해 있다. 아주머니가 활짝 웃으며 당신에게 묻는다.
“애인 있어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신은 당황스럽다. 하지만 최대한 티 내지 않으며 없다고 말한다.
“사귈 생각은 있어요?”
이유 모를 불쾌한 질문들. 마치 이력서 란에 키, 체중, 신앙 란을 발견하고 놀라버린 것만 같은 기분. 면접이니까… 생각하면서 당신은 최대한 웃으며 답변하지만 아주머니의 “우리가 오래 일할 사람을 찾아서 그런 거예요.”라는 말이 어쩐지 변명처럼 느껴진다. 그럼 왜 남성분들이나 우리보다 나이대가 높은 여성분의 면접은 보지 않는 거지? 보니까 스물두 명이나 지원했던데?
‘면접을 다 보고 빌딩에서 나오는데 기분이 더럽다. 면접은 불합격이었다. ‘정말 불쾌한 경험이었어.’로 끝맺음 지으면 될 상황 앞에서 당신은 괜히 한번 의문하게 되었다.
설마 내가 상대보다 귀엽거나 세련되지 않아서 면접에서 불합격한 건 아니겠지…?
타이틀, 어떤 타이틀,
대체 그 타이틀이란 건 뭘까.
짧게 아르바이트를 할 생각으로 가게 된 전화 알바 면접장에는 사람이 바글거렸다. 어림잡아도 100명은 넘는 인원이 네 명씩 짝을 지어 부르는 소리에 따라 줄줄이 사탕처럼 면접장으로 들어갔다.
알바가 이렇게 핫할 일이야?
당신의 차례가 되자 줄지어 들어간 작은 방에는 남자 둘이 나란히 앉아 종이를 보고 있었다. 세련된 분위기를 풍기는 중년 남자는 유심히 종이를 들여다보더니 흔한 면접 질문을 몇 개 던지고 젊은 남자에게로 바통을 넘겼다. 젊은 남자는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찜한, 성은 찜. 찜찜한입니다."
찜찜한 대리는 훈훈한 외모에 어리광 짙은 미소를 가지고 있었다. 한때 당신의 이상형이 연예인 진구였음에도 그는 절로 당신 입에서 “진구 엄청 닮았네.”를 되뇌게 만들었다.
되겠어? 사람이 그렇게 많았는데..
면접은 안 붙었겠거니 생각했다. 다른 알바 자리나 찾아봐야지 생각하고 있는데 문자가 울렸다.
축하드립니다… 면접 합격… 0월 0일 출근장소…….
업무를 소개 하고 함께 점심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찜대리가 당신을 바라보며 말한다.
“모다씨는 제가 무조건 뽑아야 한다고 부장님에게 밀어붙였어요.”
…
“아. 그렇군요.”
아르바이트에 뽑힌 여섯 명 중에서 찜대리가 관리하는 팀에 소속된 이는 당신, 혜정 언니, 미진이 셋이었다. 팀에는 인수인계 후 그만두실 당신 또래의 여성분 두 분과 남자 두 분이 더 있었다. 들어보니 남자 두 분은 고향 친구인데 부장님과 대화를 하다가 말이 잘 맞아서 일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한 명은 사냥을 하시는 분이었고, 한 명은 성우 준비생이었다. 다들 무언가를 준비하는 시절 이곳에 모이게 되었다고 했다. 혜정 언니는 모델 준비를 하다 잠시 돈을 벌 겸, 미진이는 유럽 여행을 하러 휴학던 중에 오게 되었다고 했다.
아 그렇군요 하고 나서 파스타를 먹던 도중 혜정 언니가 너도나도 궁금해하던 질문을 찜대리에게 던졌다.
“면접 보러 갔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진짜 깜짝 놀랐어요. 사람이 그렇게 많았는데, 우리가 뽑힌 이유가 뭐예요?”
우리에게 무언가 특별한 점이 있나?
당신도 궁금하던 참이었다. 당신, 혜정언니와 미진은 기대되고 궁금한 눈으로 찜대리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찜대리가 우물쩍거리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당신은 아주 잠시 오래전 신뢰하던 이가 했던 말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일주일 간 인수인계를 받아보니 하는 일은 단순했다. 기업에 전화해 금융 상품을 정해진 스크립트대로 읽으며 홍보하는 일이었다. 관심을 보이면 좋고 아니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실적과도 크게 관련이 없는 일. 하루에 백통이면 충분했다. 전화를 하지 않는 시간에는 뭘 해도 크게 터치하지 않았다.
일주일 간 인수인계를 끝낸 팀의 두 여성 분과 송별회 겸 회식 자리에서, 오늘로 마지막인 여성 분이 찜대리에게 물었다.
“대리님, 그런데 왜 모다씨한테는 메일 안 줬어요?”
그렇다. 찜 대리는 모든 팀 사람에게 송별회 장소 메일 주었으면서 당신에게만 주지 않았다. 아무리 메일함을 뒤져봐도 없었다. 찜대리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대답했다.
“오. 제가 안 보냈어요? 이런 실수를. 그럼 제가 점심 살게요.”
갑자기 내뱉은 찜대리의 말에 당신은 어쩐지 수작질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남자친구가 있느냐는 질문에 당신이 활짝 웃으며 있다고 말하자, 찜대리는 자기가 먼저 사준다고 한 그 점심을 사지 않았다. 당신은 자꾸만 기분이 이상하다. 자꾸만, 언젠가 좋아하고 신뢰하는 이에게 들었던 그 말이, 찝찝한 기분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사실은. 인수인계를 해주고 가신 분도 당신이 보기에는 이뻤다. 당신도 지금까지 사회의 미라는 기준에 부합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던가. 종종 당신이 좋아하는 걸 버릴 정도로 말이다. 혜정언니와 미진이도 언젠가 들었던 말처럼,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타이틀을 자꾸만 떠올리게 만들었다. 왜 우리 팀만 이렇게 많은 회식을 하고, 소고기를 얻어먹거나, 볼링을 치거나, 괜히 수다 떨려고 찜대리가 찾아오거나 할까. 다른 팀이 보기에도 우리 팀은 여유롭고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널널해서 불만인 게 아니라 그냥. 당신이 더는 장롱에 처박아둔 찝찝함을 숨길 수가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만약 성실하기만 하고, 아무나 해도 되는 일이라면, 어떤 타이틀로 거저 받은 것은 특혜인 게 아닌가? 불합리한 거 아닌가? 그것이 외모든, 능력이든, 재산이든, 성적이든, 성격이든.
하지만 세상은 원래 그래.
어떤 직업은 정말로 그에 부합한 노력이 필요하고, 지혜나 지식이 필요하니까. 마치 노력으로 시험에 합격하여 얻어내듯이 이렇다 할 어떤 조건으로 남들보다 더 좋은 것을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누군가는 말한다.
세상이 원래 그래서 나도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그렇게 쉬운 길로, 거저 얻는 것들 뒤에 오는 찝찝함은 어떻게 해야 할까. 노력으로 얻은 특혜나 특별 취급도 사실 같은 게 아닐까. 어떤 직업은 어떤 특정 능력이 필요하니까 그 노력을 해서 직업을 얻었는데 직업 외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들도, 특별 대우도 사실은 거저 얻은 것은 아닐까?
사실. 사실.
그게 무엇이든. 실력, 돈, 성격 그 모든 타이틀이 만약 언제까지나 누구보다 높아지고 낮아지기를 결정한다면 우리는 결코 경험하지 못하지 아닐까. 우리가 겪어보지 못한 빛나는 삶을?
빛나는 삶이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있지. 나는 이런 부분이 너무도 약했어. 나는 오래도록 결핍을 안고 상대를 판단했어. 쉽지 않았어. 언제나 나보다 대단한 사람이 있고 내가 낮아지는 게 괴로웠어. 그런데 있지. 행복은 그런 게 아니더라. 아름답다고 일컫어지는 것을 쫓으며 정말 아름다운 걸 놓치면 안 돼. 너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고 약한 부분을 내가 도울 수 있다면 힘 내 볼게. 나의 약한 부분도 너의 강인함으로 이끌어줘. 강요가 아닌 사랑으로 말이야.
누군가를 미워하고 괴로워하기보다 우리 모두가 동등하다는 생각으로 아끼고 사랑하고 있어. 너도 그렇다는 걸 알아.
우리 서로를 미워하기보단 사랑하려 노력하자. 우리는 그저 서로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사랑하며 아끼는 마음을 배워나가자. 그러면 언젠가 우리가 삶을 돌아볼 때 우리의 기억과 마음이 모두 향긋하여도 아름답지 않을까. 난 그 풍요로운 삶에 너와 함께 나아가려 해-
만약 언제까지나 세상이 말하는 기준과 조건에 대해 귀 기울이고, 이득을 취하려고만 한다면.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을 쫓느라 진정으로 아름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건 아닐까.
무언가가 많거나 적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고, 차별받은 타이틀을 얻어 남보다 낫고, 낫기 때문에 더 좋은 것을 얻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모두 어떤 조건으로 남보다 낫거나 낮다는 평가를 받아본 경험이 있다. 그리고 모두 알겠지만 그건 꽤나 불쾌한 경험이다.
사회가 그렇다고 해서 나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
난 여자, 외모란 타이틀에 갇혀 있었다. 그 밖에서 나를 가둔 타이틀이 너무도 다양하다. 실력, 능력. 재산, 재능, 나이...
어떤 이론에 근거하거나 경험에 의거해서 누군가 이렇다거나 저렇다고 히더라도, 듣는 새에 맞는 것도 같아 또다시 너를, 나를, 우리를 아프게 하는 편견의 길로 들어서더라고, 그렇더라도
적어도 난 믿는다.
만약 있는 그대로 모든 타이틀이 존중받고, 서로 사랑하고 섬길 수 있다면 그런 타이틀이 가진 수많은 의미들도 사라지고 우리는 아름답다고 일컫어지는 것을 쫓지 않게 될 거라고. 진정으로 값지고 아름다운 것을 마음에 품게 될 거라고. 타이틀이 빛을 잃는 순간은 바로 사랑일 거라고. 사랑 앞에서 시선도 슬픔도 모두 의미를 잃고 제 모습으로 드러나 치유될 거라고. 빛을 잃은 조건들은 조건으로만 존재하고, 진정 마음이 흡족하고 행복해지는 곳에서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다만 서로를 사랑하며 아름다움을 노래하자고. 특권도 슬픔도 괴로움도 무력해지는 그 기쁨 속에서 너를, 나를, 우리를.
기준에 맞지 않는 것을 업신여기고, 나보다 지식이나 돈이나 능력이 없는 사람을 업신여기고, 약하고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사람을 아래로 보는 삶에서 빠져나오자. 타이틀로만 존재하면 될 것이 당신을 옭아 매 괴로움으로 아파지기 전에 걸어 나와 네가 나를 끌어주고 내가 너를 끌어주자. 더 큰 사랑으로, 기쁨으로 빠져나오자. 사랑 앞에서 무의미해지는 그것들을 놓아두고.
세상이 그렇다고 나까지 그럴 필요 없다. 사랑 안에 속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걸음걸음은 누군가의 것이 아닌 나의 발걸음으로부터 시작되니까.
나는 당신도 한번 생각해 주기를 바란다. 타이틀. 왜 어떤 타이틀을 더 좋다고 여겨져 좋은 취급을 받고, 어떤 타이틀을 나쁘다고 취급을 받아 무시당하는지.
타이틀. 우리 앞을 가로막은 어떤 타이틀.
당신의 타이틀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