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에 오갈 데 없는 사람이 더 많다. 회사 식당은 현장 시설이 24시간 가동되다 보니 관련 직원들은 송편이나 전류의 음식들을 식판 위에서 만날 수 있었다. 식당 옆 기숙사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며칠을 적막한 산 공기를 들이키며 외롭게 지내는 무리들이 있었다. 그나마 그들은 나은 축에 들었다. 옥계 시내 숙박 시설에는 추석다운 분위기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끼니를 간신히 해결해야 하는 이들도 있었다.
가을이 접어들기 전 현장 쪽은 시설을 보수할 일들이 생긴다. 작업이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두세 달을 훌쩍 넘길 때도 있다. 제법 삯이 세다 보니, 현장을 따라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여관에 장기투숙하며 출퇴근해도 남는 장사였다. 물론 혈혈단신이라면 어디서 자고 무엇을 뭐든 마음대로 결정하기 쉽겠지만 수완 아저씨는 다섯 살 아이를 데리고 다녀야 했다.
아저씨가 식당과 숙박업을 겸한 송월회관에 둥지를 튼 이유도 자신이 일하는 동안 아이를 돌봐 줄 사람이 필요했다. 하지만 아이랑 놀아 줄 정도로 여유가 있는 사람은 주변에 없었다. 가끔 회사 식당 메뉴가 지겨운 날 송월회관에 가 점심을 먹은 적이 있었는데, 안 보이던 꼬마가 주방 옆 의자에 앉아 생기를 잃은 눈빛으로 오고 가는 손님을 쳐다보거나, 혼자 물에 밥을 말아 김치 얹어 점심을 해결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때때로 명구가 등장해 (옥계근무일지 1-마음은 이미 고물 편 등장) 자기 동생이라며꼬마를 챙기기 시작했다. 조금씩 주인 몰래 반찬들을 가져다주며 씹는 것도 긴장되어 보이는 꼬마를 다독였다.
명구 자신도 추석 연휴 동안 시댁을 간 송월회관 주인 탓에 덩그런 회관 건물을 혼자 지켜야 했다. 치밀한 주인은 식당 쪽으로 향하는 문은 걸어 잠갔고 명구에게는 슈퍼에게 사 먹으라며 돈 몇 푼을 쥐어 준 것이 전부였다. 연휴 마지막 날이 당직 근무라 서울 슈퍼 앞 버스 정류장에 내렸다. 마침 끼닛거리를 사려던 명구랑 수완 아저씨, 그의 아들을 만나게 되었다.
- 누나, 우리랑 놀다 가요!
명구가 살갑게 명절 음식이 든 쇼핑백을 쥐고 흔들었다. 아마 전에서 배어 나온 기름 냄새가 솔솔, 순간 우리를 가족처럼 묶지 않았나 싶다. 신문을 펼쳐 놓고 음식들을 나눠 먹으며, 작업일지 확인 때문에 어쩌다 인사만 한 사이인 아저씨가 기거하는 방을 보게 되었다. 금방이라도 방을 빼고 달아날 것 같은 짐이 채워져 있는 배낭 하나가 전부였다. 그리고 유독 눈에 띈 것은 거울 위에 걸려있던 애기 짚신이었다.
- 아저씨가 직접 만드신 거예요?
갓난아기 발에 맞을 법한 아주 작은 사이즈인데, 마무리가 서툴러 짚이 여기저기 삐져나와 있어 산 것 같지는 않았다. 처음 아이를 만나러 갈 때, 무엇을 사 줘야 할지몰랐다고 한다. 급한 마음에 일하던 현장 가까이에 가을걷이가한창이라 벼를 이용해 신발을 만들었는데, 아이 엄마는 내던졌지만 수완 아저씨 아들은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더란다. 아장아장 기어가 짚신을 손에 움켜쥐는 아이를 보며 처음으로 지켜주고 싶은 소중한 무언가가 생긴 듯하여 얼굴이 달아올랐던 기억을 풀어놓았다.
- 아들 녀석이 짚신을 걸어 놓고 가면 덜 불안해해요. 일하는 현장이 험하거나 같이 지낼 곳이 마땅치 않을 때면 얼마간의 돈을 지불하고 지인에게 돌봄을 부탁할 때도 있어요. 어린 녀석이 울 법도 한데, 짚신을 만지작 거리며 잘 견뎌 주더라고요.
애기 짚신은 일을 찾아 떠돌 수밖에 없는 수완이 아저씨와 아들을 이어 주는 끈 같았다.아빠가 먼 길이라도 자신을 찾아올 거라는 마음에 단단히 매어져 있는,가느다랗지만 강하게 이어져 있는 끈! 아저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명구랑 어린 아들은 짚신을 내려 달라 한다. 이미 커 버린 발에 맞지 않은 데도 명구는 발가락 하나라도 넣어 보려 하고, 아저씨의 아들은 가슴에 끌어안고 배시시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