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소혜 Oct 18. 2024

당신의 손길은 따갑고 아프다

앳된 여자가 마주편에 앉아 있었다. 가벼운 눈인사로 내게 아는 척을 했지만 짙은 화장 속에 감춰진 불안한 표정은 오늘 이 자리가 처음이라는 것을 말해 주었다. 도망갈 틈을 놓쳐 회식 3차 자리까지 끌려 온 나 역시도 조명이 희한하게 돌아가고 있는 룸의 분위기가 적응이 안 되었다.


서울이 집인 임원 딸과 같은 나이라, 외로움을 달래 드리는 대화상대가 내 역할이었지만 임원 옆에는 미모의 구릿빛 피부가진 여성이 마치 연인인 듯 익숙한 눈빛으로 임원의 술잔을 채워주고 있었다.


미주에게 데리러 오라는 문자를 찍으려 할 때마다 고차장은 내 옆으로 와 노래를 부르라는 둥, 술잔 비우라는 등등의 요구를 하며 취해 갔다. 회사에서는 정확한 목소리 톤이 확인 안 될 정도로 조용히 지내는 분이, 고래고래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 좀 놀라웠다. 그것보다 적지 않은 나이에도 중년의 수줍음처럼 여자 직원들과 눈도 못 맞추는 분이 자꾸 손을 잡고 싶어 했다.


ㅡ 직장생활 힘들지? 원래 다 그런 거야. 좀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직장 상사로서 사회생활의 어려움을 공감해 주는 것은 고마우나 속마음은 '당신이 내 손 등을 그만 괴롭혔으면 좋겠다. 날카로운 바늘 끝이 찔러대는 것처럼 따갑고 아프다'라는 말이 입가를 맴돌았다.


급기야 배아프다는 핑계로 화장실 다녀오겠다며 간신히 불편한 손길을 밀쳐낼 수 있었다. 하지만 취기가 오른 사람의 자유롭다 못해 경계가 무너진 행동은 그 룸에서 용납이 되는 듯, 되돌아온 자리에는 앳된 그녀가 몹쓸 짓을 겪고 있었다.


이 룸 안에 있고 싶어 머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른 사회생활의 쓰나미가 휩쓸고 가도 저마다의 이유로 버텨야 하고, 만신창이가 될지언정 실패자가 되는 것은 더 두려웠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앳된 여자의 울먹이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원치 않손놀림으로 옷매무새를 휘젓는 것을 멈추게 해야 했다.


동료에게 도움을 요청하려 해도 모두 자신의 취기에 신이 나 이야기, 노래, 춤 등에 빠져 있었다.

그냥 외면하고 나려고도 해 봤다. 미주가 거의 왔으니까 눈치 못 채게 빠져나오라고 문자까지 준 상태였다.


ㅡ 쨍그랑


술이 담긴 잔을 나도 모르게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뜨렸고 깨진 파편을 줍느라 손에 피가 흐르고서야 그 룸의 모든 것이 일시 정지되었다.


임원은 다쳤나며 걱정했고 나머지 직원들도 많이 취했으면  택시를 불러 주겠다고 했다. 고차장은 고의적인 방해라고 느꼈는지 내일 두고 보자는

눈빛을 쏘아붙이며  룸 청소 서비스를 불렀다.


대충 동여 멘 상처를 잡고 그 방을 나올 때 앳된 여자가 나를 부축하는 척 같이 나왔다. 조금 밝은 곳에서 본 그녀는 훨씬 더 어려 보였다. 조명과 취객 열기로 결코 춥지 않은 곳인데도 계속 떨고 있었다.


ㅡ 괜찮을 거예요.


잔뜩 흐리다 못해 예기치 않은 번개가 우리를 가둬놓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도 모르게 앳된 여자의 작은 어깨를 다치지 않은 다른 손으로 다독였다.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데리러 온 미주는 상처 난 손을 보고 기겁을 했다. 숙소로 돌아오는 동안 세상 욕은 다 끌어다 분노를

분출했다. 더 이상 회식 3차 자리까지 데려가는 일은 없었다. 취하면 술판을 깨는 직원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이전 08화 오갈 데가 없는 사람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