앳된 여자가 마주편에 앉아 있었다. 가벼운 눈인사로 내게 아는 척을 했지만 짙은 화장 속에 감춰진 불안한 표정은 오늘 이 자리가 처음이라는 것을 말해 주었다. 도망갈 틈을 놓쳐 회식 3차 자리까지 끌려 온 나 역시도 조명이 희한하게 돌아가고 있는 룸의 분위기가 적응이 안 되었다.
서울이 집인 임원 딸과 같은 나이라, 외로움을 달래 드리는 대화상대가 내 역할이었지만 임원 옆에는 미모의 구릿빛 피부를 가진 여성이 마치 연인인 듯 익숙한 눈빛으로 임원의 술잔을 채워주고 있었다.
미주에게 데리러 오라는 문자를 찍으려 할 때마다 고차장은 내 옆으로 와 노래를 부르라는 둥, 술잔 비우라는 등등의 요구를 하며 취해 갔다. 회사에서는 정확한 목소리 톤이 확인 안 될 정도로 조용히 지내는 분이, 고래고래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 좀 놀라웠다. 그것보다 적지않은 나이에도 중년의 수줍음처럼 여자 직원들과 눈도 못 맞추는 분이 자꾸 손을 잡고 싶어 했다.
ㅡ 직장생활 힘들지? 원래 다 그런 거야. 좀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직장 상사로서 사회생활의 어려움을 공감해 주는 것은 고마우나 속마음은 '당신이 내 손 등을 그만 괴롭혔으면 좋겠다. 날카로운 바늘 끝이 찔러대는 것처럼 따갑고 아프다'라는 말이 입가를 맴돌았다.
급기야 배가 아프다는 핑계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간신히 불편한 손길을 밀쳐낼 수 있었다. 하지만 취기가 오른 사람의 자유롭다 못해 경계가 무너진 행동은 그 룸에서 용납이 되는 듯, 되돌아온 자리에는 앳된 그녀가 몹쓸 짓을 겪고 있었다.
이 룸 안에 있고 싶어 머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른 사회생활의 쓰나미가 휩쓸고 가도 저마다의 이유로 버텨야 하고, 만신창이가 될지언정 실패자가 되는 것은 더 두려웠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앳된 여자의 울먹이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원치 않는 손놀림으로 옷매무새를 휘젓는 것을 멈추게 해야 했다.
동료에게 도움을 요청하려 해도 모두 자신의 취기에 신이 나 이야기, 노래, 춤 등에 빠져 있었다.
그냥 외면하고 나가려고도 해 봤다. 미주가 거의 왔으니까 눈치 못 채게 빠져나오라고 문자까지 준 상태였다.
ㅡ 쨍그랑
술이 담긴 잔을 나도 모르게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뜨렸고 깨진 파편을 줍느라 손에 피가 흐르고서야 그 룸의 모든 것이 일시 정지되었다.
임원은 다쳤나며 걱정했고 나머지 직원들도 많이 취했으면 택시를 불러 주겠다고 했다. 고차장은 고의적인 방해라고 느꼈는지 내일 두고 보자는
눈빛을 쏘아붙이며 룸 청소 서비스를 불렀다.
대충 동여 멘 상처를 잡고 그 방을 나올 때 앳된 여자가 나를 부축하는 척 같이 나왔다. 조금 밝은 곳에서 본 그녀는 훨씬 더 어려 보였다.조명과 취객 열기로 결코 춥지 않은 곳인데도 계속 떨고 있었다.
ㅡ 괜찮을 거예요.
잔뜩 흐리다 못해 예기치 않은 번개가 우리를 가둬놓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도 모르게 앳된 여자의 작은 어깨를 다치지 않은 다른 손으로 다독였다.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데리러 온 미주는 상처 난 손을 보고 기겁을 했다. 숙소로 돌아오는 동안 세상 욕은 다 끌어다 분노를
분출했다. 더 이상 회식 3차 자리까지 데려가는 일은 없었다. 취하면 술판을 깨는 직원이라는 소문이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