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 1
구내식당 점심 메뉴가 미역국이다. 문제는 소고기 미역국이 아니라 담백하게 끓여진 조개 미역국이다. 고강도 노동의 현장 직원들이 많은 회사라 점심에 풍성한 고기반찬, 고기가 들어간 국은 필수인데 오늘은 게시판 메뉴 설명과 다르게
조개 미역국이다. 조개 미역국은 같은 팀의 신대리님이 좋아하는 메뉴다. 어떻게 알았냐면 점심 먹으러 가기 전부터 오늘 메뉴는 자신을 위한 것이라며 자랑하셨다. 평소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과 관련짓는 서사를 부여해 '허풍신대리'로 통하는 분이라 그의 말을 귀담아듣는 사람은 없었다.
상황 2
문서수발함에 제법 묵직한 것이 들어 있었다. 항만과 본관을 회사 버스로 오고 가며 하루에 한 번 중요한 결재 서류나 경비 처리된 현금을 찾아오는 것이 내 업무의 일부인데 오늘은 손바닥보다 조금 큰 박스에 수신인을 신대리로 명시한 박스가 들어 있었다. 전달하자마자 아이처럼 뛰며 좋아하더니, 금세 사라졌다 나타나 자꾸 손목이 돋보이는 팔 들어 흔드는 제스처를 했다. 시계였다.
상황 3
사내 교육이 있어 회사 소강당에 대리급 이하 직원들이 모였다. 총무부터 현장 파트 부서까지
자리가 지정되어 있었는데, 신대리는 자기 자리 놔두고 계속 서성인다. 심지어 잠깐 쉬는 타임에 음료수 자판기로 부리나케 가더니 '우당탕(캔음료ㅡ떨어질 때 소리로 직원들끼리 쓰는 은어)'을 뽑아오더니 특정한 자리를 가리키며 놓아 달란다. 먼저 일이 있어 교육에서 빠져나온 터라 그 자리에 누가 앉았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뭐지? 계속 '사랑의 우체부'가 되어가는 이 느낌은
상황 4
회사 내 여고 동창회가 있는데, 오늘 자리에는 선배님들이 같이 근무하는 부서 직원들이 찬조 출연해 밥값을 내단다. 젊은 직원들 대부분이 객지 생활 중이라 기숙사나 회사 인근 숙소에서 지내다 보니 별별 모임을 통해 화합의 자리를 자주 갖는다. 그런데 부르지도 않은 신대리가 떡하니 나타났다. 꼭 내가 불러온 것처럼 변죽 좋게 말하고 나를 향해 씩 웃더니 옆에 앉았다. 이 즈음되면 신대리를 들뜨게 하는 인물이 좁혀진다. 여고 동창생이라고 해 봤자 탈탈 털어 나 빼고 다섯 명이다. 그런데 도무지 감이 안 온다. 사내 동아리 활동도 겹치는 분들이라 친목을 도모하는 것인지 연인과 한번 더 보기 위해 위장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상황 5
딱 걸렸다. 조개 미역국이 또 나왔다. 스산한 산새 기운이 현장까지 치밀고 내려와 정말이지 뜨끈하고 고기가 송송 떠다니는 국물이 간절한 날이었음에도 야근으로 구내염이 도져 입가가 불편했던 신대리님을 위한 조개 미역국이 또 나왔다. 혼자만 두 그릇 먹고 아픈 거 다 낫겠다며 아이처럼 그 흰 얼굴에 홍조가 오를 정도로 설레는 모습은 누가 봐도 사랑 웅덩이에서 푹 빠져 있는 그림이었다.
신대리님의 연인은 총무부 소속 영양사 언니로 밝혀졌다. 여고 동창 한참 선배님인 데다 일처리가 똑 부러져 영양사 일 외에도 깜짝 등장하는 슈퍼우먼이었다. 허풍신대리를 조금 더 인간세상에 적응시키느라 헤어졌다 만났다를 반복하는 극약처방도 서슴지 않았는데 결국에는 결혼했다. 첫 아이 이름도 당시 인기 있는 여자 배우이름으로 짓고 출산하고도 회사를 다녔다. 승진이 더딘 신대리가 낙향하면서 사랑꾼 면모가 퇴색했을지언정 간간이 동창 모임을 통해 들려온 얘기로는 둘째도 낳고 잘 살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