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43 댓글 4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용서받지 못한 자

by 김소금 Mar 29. 2025


속을 게워내느라 목에서 피가 나올 만큼 입덧이 심하던 어느 날, 시골에서 반찬이 도착했다.


뚜껑을 열자 온통 고춧가루 범벅이었다. 정원은 한동안 멍하니 반찬을 내려다보았다.  

"나도 입덧 심할 때 저거 묵고 버텼다. 묵어봐라, 속이 좀 나을 끼다."


정원은 굳이 먹지 않았다. 그렇지만 좋은 마음으로 보내주신 거라 생각하려 애썼다. 그날도 여지없이 속을 게워냈다. 미음 한 숟가락도 삼키기 어려운 고통 속에서, 그 반찬들은 결국 서운함으로 남았다.  


임신성 당뇨 판정을 받았을 때는 혈당 조절이 필수였다. 친정엄마는 현미밥과 신선한 채소, 소고기를 가득 챙겨 보내주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장 권사는 짧게 한마디를 던졌다.  

"그래. 느그 엄마가 고생이 많네."


‘느그 엄마.’

그 말이 귀에 박혀 며칠 동안 맴돌았다.  


며칠 뒤, 시어머니가 ‘잘 챙겨 먹으라’며 보낸 택배를 열어보았다.


장아찌

누룽지

그리고 피클.


혈당을 생각하면 차마 손댈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장 여사의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은 남편 요한의 마음에도 깊은 생채기를 냈다.  


어머니 생신을 맞아 용돈을 보냈을 때였다. 다음 날,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니가 하도 조카를 안 챙기길래, 도원이한테 삼촌이 주는 용돈이라 캤다. 그런 줄 알아라."


말문이 막혔다. 아들에게서 받은 돈을 손자에게 건넨 것도 모자라, 꼭 그렇게까지 말해야 했을까.  


그러나 다른 걸 다 차치하고서라도,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말이 있었다.

윤이 아팠을 때였다. 정원의 마음이 가장 부서져 있던 순간,

시어머니는 담담하게 말했다.

"니들이 뭐 잘못해서 아가 아픈 거 아이가?”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원은 무너졌다. 모든 걸 참고 이해하려 했지만, 이 말만큼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이들이 입원하고 아플 때, 딸기 하나 사 먹으라고 용돈을 보낸 적 없는 시어머니였다. 때마다 삼계탕이며 소고기를 사 들고 온 건 정원의 친정 부모님이었고.


시간이 흘러 윤의 심장에 난 작은 구멍은 기적처럼 닫혔다. 하지만 정원의 가슴에 난 상처는 닫히지 않았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버릇처럼 주기도문을 읊었다. 용서해야 한다고, 미워하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마음이 쉬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정원은 친정엄마와 함께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무를 썰던 엄마가 문득 말했다.  

"나도 네 친할머니가 보내준 반찬 앞에서 한숨을 쉬곤 했지. 그런데 말이야,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게 다 사랑이었더라."

정원은 그 말을 곱씹으며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토하는 며느리에게 입맛이 돌 거라며 보내준 고춧가루 범벅 반찬들, 혈당을 생각하지 않은 택배, 마음을 후벼 파는 말들.  


어쩌면 그것들이 모두 시어머니 나름의 방식이었을까. 너무 서툴고, 너무 거칠고, 너무 엉뚱해서 가늠할 수 없는 사랑의 형태였을까.


아직 용서할 준비는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기억을 되짚어볼 수 있게 되었다. 그 반추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할 준비는 되어 있었다.


그것이 용서로 가는 길의 시작이라면, 정원은 아주 천천히라도 걸어가 보고 싶었다.



이전 07화 상처에 소금 뿌리기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