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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이었다

by 김소금 Mar 31. 2025


그러니까 톳밥 한 그릇을 앞에 두고 결혼을 결심했던 순간을 떠올리면, 마음 한쪽이 시리다. 정원의 단단함과는 또 다른 쓸쓸함이었다. 시댁의 차가운 벽 앞에서 주저하기보다는, 요한과의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맞다고 여겼다. 그래서 이 결혼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환영받지 않는 자리에서 혼자 결정을 내리는 일은 얼마나 고독한가.  

  

이제 중요한 건, 그 선택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일이다.  

요한이 어떻게 정원의 편이 되어주고, 정원이 어떻게 스스로를 지켜내는지. 정원이 그저 불쌍한 캐릭터로 남지 않도록. 언젠가 이 선택이 "잘한 일이었다"라고 확신할 수 있도록.  


요한은 박사 학위를 가진 연구자였고, 정원은 학사 출신이지만 이름 있는 대학을 나왔다. 경제적으로는 오히려 요한보다 더 탄탄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나이도 한참 어렸다. 하지만 그 모든 조건을 갖추고도, 장길여에게는 여전히 모자란 며느리였다. 애초에 아들의 결혼 자체가 달갑지 않았다. 차라리 혼자 사는 게 낫다고 여겼다. 대통령의 딸이라 한들 그녀의 눈에 들었을까 싶을 정도로 시큰둥했다.


정원은 강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강한 사람도 외롭고, 서운할 수 있다.  

‘내가 선택한 결혼이니 후회하지 않을 거야.’  

몇 번이고 다짐했지만, 환영받지 못하는 며느리로서의 현실은 예상보다 더 날카롭게 마음을 베었다.  


시댁의 상황을 고려하면, 뭇사람들은 요한이 본가와 거리를 두기로 한 결정이 손해가 아니라고 할 것이다. 물리적으로도 그렇고, 여하튼 그것은 아내를 지키고 나아가 자신을 지키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사랑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현실이 있었고, 결혼을 결심했던 단단함은 점차 흔들렸다. 정원은 요한과 함께라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결혼이 현실이 되면서 그 믿음은 오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라는 엄마 그늘 아래 살면서 아들 양육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어머니의 고된 인생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딸답게 단단한 유대로 이어져 있었다. 요한 못지않게 곧잘 공부를 했지만, 엄마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았던 사라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물론 엄마의 반찬 공수며, 애정 어린 눈길을 독차지하는 것도 사라의 몫이었지만, 가까이에서 엄마의 병원 라이딩이며 온갖 치다꺼리를 감당해야 하는 것 또한 사라였다. 요한에 대한 사라의 분노가 언제부터 쌓인 것인지, 누구도 알 길이 없었다.  


첫인사를 위해 요한의 모교회에 들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을 뿐인데, 사라는 말 한마디 없이 동생 내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네가 우리 가족이라고? 누가 인정했는데?’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정원은 애써 모른 척했지만, 그 차가운 시선이 등 뒤까지 따라붙는 기분이었다. 이런 냉소는 낯설고도 서늘했다. 그리고 그 순간, 이런 생각이 스쳤다.  


‘내 아이들이 고모를 볼 일은 없겠구나.’

요한도 다르지 않았다. 그의 집안에서도, 아버지와 등을 진 고모는 가족 행사에 얼굴을 비춘 적이 없었다. 고모들과 가까웠던 정원에게는 생경한 일이었지만, 앞으로 닥칠 단절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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