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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수 May 14. 2024

나는 왜 글만 썼나?

교육혐오, 교실에서 나는 심장이 뛰는 일을 하고 있었나?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는 하루입니다. 


배철현 교수님의 '자기치유를 위한 글쓰기' 첫 강을 들은 후부터 나는 나의 삶에 다시 물음표를 던졌습니다. 나는 과연 글 쓰는 작가, 인정받는 작가가 되는 것이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인가? 나는 누구이고 여기는 지금 어디이며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뜨거운 마음으로 글쓰기에 끌렸고 평소 너무 듣고 싶던 교수님의 수업이라 가장 바쁜 달임에도 주저 없이 신청했었습니다. 첫 강의의 여운이 끝나기 전에 나는 교수님이 내어주는 과제 '당신의 심장이 뛰는 일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지금 심장이 뛰는 일을 하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마주했고, 글을 쓰면서 한 번, 교수님의 답글을 받고 한 번, 두 번 격함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컥했습니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뜨겁게 했을까 돌아보았어요. 아직 치유받지 못한 아프고 슬픈 자아가 나를 뜨겁게 했을까요? 잠시 그런 생각에 빠지기도 했지만, 교수님의 손글씨가 자꾸만 아른거립니다. 나를 보지도 않으시고, 나를 알지도 못하시는 교수님께서 나의 첫 번째 과제글을 보시고 써 주신 열 줄 문장이 내내 나를 흔들고 있었습니다. 


나는 글을 쓰며 가슴이 뛰고, 교수님의 글쓰기 수업을 만나 심장이 뛴다고 다소 장문의 글을 써서 제출했는데, 교수님은 나의 글쓰기를 누군가를 감동시키는 글쓰기를 하고 있다고 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이야기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글쓰기에 아이들을 쓰지 않습니다. 내 안에 금기도 많을뿐더러, 검열이 많은 교사의 글쓰기에 아이들을 자주 언급하는 것은 문제가 될 소지도 많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봉인된 입을 가지고 살아왔던 오래 길들여진 선생이었던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희망의 존재를 일깨워주고, 희망의 싹을 피우라고 격려하는 일이 얼마나 가슴이 뛰는지요!' 그렇게 시작되는 교수님의 답글을 받고 나는 아팠습니다. 하루가 지난 오늘은 어제보다 더 아픕니다. 많은 이유를 덧붙이며 나는 아이들에게 희망을 노래하는 교사가 되지 못해 왔습니다. 아이들에게 주목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잘 나가는 옆반 선생님을 시샘했고, 직무상 말할 뿐인 관리자의 한 마디를 기억했고, 나날이 드세어 가는 학부모들의 입김을 혐오했고, 표를 의식하고 유권자이자 소비자인 학부모만을 의식하는 교육계를 통탄했습니다. 아이들을 많이 바라보고, 아이들과 함께 뜨겁게 달리면 되는 데 그것을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개별 교사의 노력으로 어림없는 교육의 곪아 터진 문제들은 작지 않습니다. 학생이 죽어도, 교사가 죽어도 이기적인 사회는 꿈쩍도 하지 않죠. 얼마전 혁신교육 forward에서 강민정 의원이 하는 말씀 물론 지당했어요. '이제는 교사가 나서야 하고, 당사자가 아닌 중견교사들이 나서야 하며, 교사의 봉인된 정치기본권은 해제되어야 한다.'  교사의 정치기본권이 교육문제의 핵심인 것도 맞고,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바라보고 각자의 자리에서 심장이 뛰는 일을 하면 되는 것도 맞습니다. 딱 하나의 답만 주어졌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외적 문제와 내적 문제로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나는 두 가지의 문제를 모두 심장에 담지 않았습니다. 외적인 문제는 교원단체가 할 일로 회비만 납부하고 말았고, 내적인 문제는 외적인 문제가 해결이 안 되니 기운이 빠져 무관심했습니다. 아이들을 바라보며 아이들 등 뒤의 이제는 고객님이 되어버린 학부모를 의식했고, 교원단체일은 애초에 나의 일도 아니라며 벽장 속 깊이 보관했죠.


혐오가 난무하는 세상입니다. 내 안에도 혐오가 또아리를 틀고 무관심이라는 새끼를 쳤네요. 자신이 머무는 그곳에서 모두가 스스로를 혐오합니다. 전혀 다른 세상만 꿈 꿉니다. 나도 교육을 혐오했고 멋져 보이는 작가를 꿈꿨어요. 그래서 더욱 열심히 글을 썼던 것 같아요. 혐오할 일들이 난무해 보이는 교육 언저리에 있지 않고 싶었고, 작가님이라며 존경받고 고상해 보이는 그런 작가가 되고 싶었나 봅니다. 


'당신은 당신이 있는 그곳, 학교에서 교실에서 가슴 뛰는 일을 하고 있습니까?' 교수님의 손글씨는 꿈틀거리며 나에게 그렇게 묻습니다. 처음에는 글쓰기를 칭찬하는 문장만 보고 싶었는데, 자꾸만 다른 문장 다른 단어가 나를 칩니다. 아이들, 희망, 아이들의 글쓰기, 아이들의 뛰어놀기! 그런 단어들이 자꾸 살아 꿈틀거리며 나를 흔들었어요. 단 한 문장도 예사롭게 쓰시는 법이 없는 배철현 교수님의 책을 읽다 보니 교수님의 손글씨도 단 한 단어, 한 문장도 그냥 넘어가지지 않습니다. 그냥 쓰셨는데 나는 그렇게 읽고 있는지도 몰라요. 진실로 교수님께서 무심코  그런 단어들을 쓰셨을지도 모르지만, 단어와 문장들은 나에게 날아와 그렇게 나를 흔들고 있었습니다. '아'라고 썼는데 '어'라고 읽는다는 옛말 하나 틀리지 않네요. 


많은 것이 무너진 교육의 실태가 무겁습니다. 그러나 힘없는 일개 담임은 뾰족한 수도 없고, 다른 좋은 방법도 모르겠어요. 늘 가던 경수도로 1번 국도를 지나, 늘 가는 교정의 오솔길을 지나며 오늘은 행복해 보겠습니다. 아이들과 심장 뜨거운 하루를 위하여 행복해 보겠습니다. 


'희망의 싹을 피우라고 격려하는 일이 얼마나 가슴이 뛰는지요!'


내 안에 이 문장이 또아리를 틀었으니까요. 


절묘하게도 어제 전화 한 통을 받았어요. 작긴 하지만 교원단체의 일을 맡아 글을 써 달라는 것입니다. 혐오로 좌절했던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러 힘껏 뛰쳐나가야겠어요. 감사합니다. 


#성찰 #자아 #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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