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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율 Nov 29. 2023

언제나 어려운 그것은.

인생의 선택과도 같은 짐 싸기.




D-2. 당장 내일모레가 출국인데, 캐리어 두 개가 큰 입을 벌리고 나를 쳐다보고 있다.

짐을 싸겠다며 D-5에 꺼내놓은 커다란 캐리어 두 개.



저거 언제 다 싸지?



여행 준비의 가장 큰 관문.

호텔이며 항공권이며 알아보는 것도 귀찮지만,

물리적 행동이 필수적으로 따라야 하는(즉, 몸을 움직여야 하는) 짐 싸기는 더. 더. 더. 귀찮다.


게다가 나 하나만을 위해 캐리어 하나 달랑 싸는 게 아니다. 두 아이를 위한 각종 짐들에, “만에 하나”라는 조건이 붙으면 더. 더. 더. 머리가 아파온다.








과거의 나는,

3일 전 비행기표를 끊고 전날 후다닥 배낭 하나 메고 떠났던 자칭 프로(?) 여행러였다.(사람들이 자꾸 나를 중국인으로 착각한다는 건 여전히 혼자만의 비밀이다). 아이가 한 명일 때도 그 바쁜 회사를 다니며 주말이면 아이와 함께 전국을 돌아다닐 만큼 짐 싸기에는 이력이 붙은 나였다.


전날 짐 싸기 따위는 내게 식은 죽 먹기였었는데,

아이가 둘이나 생기고부터는,

그토록 여행을 좋아하던 나였음에도,

“짐 싸는 게 힘들어서 여행 못 다니겠다” 가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아. 짐 싸기 싫다.


여행이 결정되고 나면 시간 단위로 계획을 짜고

아이들과의 예측 불가한 여행의 불확실성을 방지하기 위해 플랜 A, B, C를 준비해 놓는 인간임에도 가방 싸기만큼은 무한히 귀찮은 건 왜일까?







이제, 짐 싸기를 시작해 본다.

어이없지만, 미루는 게 먼저다.



1. 미룬다. 미룰 수 있을 만큼

  (단, 현지에서 절대 조달할 수 없는, 아니 없으면 출국조차 안 되는 꼭 필요한 여권 신청, 국제면허증등만큼은 미리 해둔다)


정신적으로는 괴롭지만 우선은 미룬다. 왜냐고 물으신다면, 하기 싫어서. 대신 마음의 안정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물건은 핸드폰에 그때그때 적어두고, 커다란 바구니를 하나 마련해서 생각나는 대로 거기에 넣어둔다.

장기 여행이나 한 달 살기 같은 경우, 여행 스케줄이 일찍 정해지기 마련이고 이런 소소한(?) 준비들이 쌓이면 정작 여행가방을 챙길 때 생각보다 추가로 챙겨야 할 품목들이 많지 않다. (다만 감이 없어서 막 넣어두다 보면 빼는 것과의 전쟁이 되기도 한다) 나의 경우 여행 일주일 전에 가방을 챙기고 그 외 일주일간은 추가로 생각나는 물건들을 넣는 편인데, 아이가 둘이 되고 일상이 피곤하니 가끔 전날 챙기기도 한다.




2. 본격적으로 캐리어에 짐 담기.

(미리 준비해 둔 물건들이 많다면 생각보다 금방이다)


캐리어를 꺼내오고, 열어서 펼쳐놓은 후에

그동안 바구니에 쌓아두었던 짐들 중 꼭 넣어야 할 것들의 우선순위를 정해 그 물건들부터 담는다.

캐리어의 바닥이 평평한 쪽에는 파우치에 담은 옷들과 신발, 모자, 수영복 등 의복류를, 캐리어의 겉모양을 그대로 반영한 울퉁불퉁한 쪽에는 사이사이에 잘 담기는 약, 화장품, 아이들 장난감, 약간의 한식 등을 담는다.

(평평한 쪽에 옷을 담는 커다란 파우치를 넣어야 공간 낭비가 없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서는 그저 쓸어 담아 버리고 싶지만,

캐리어 하나당 23kg 무게는 순식간에 초과하므로

욕심과 함께 짐들을 걷어내야 한다.


그렇게 넣다 보면 가방이 차고, 이때 짐의 무게를 재본 후 남아있는 물건들을 무게에 따라 더 담거나 버린다. 무게가 초과하였다면 남은 짐은 미련 없이 한국에 두고 와야 하는데, 이게 꼭 우리네 인생 같다. 쓸모없는데도 욕심에 바리바리 가져가고 싶고, 그러나 막상 현지에서는 하나도 쓰지 않아 버리지도 못하고 가져오지도 못하게 되는 것들.


어차피 우리네 인생도 여행인데 무얼 그리 많이 이고 지고 사나 싶다. 없어도 다 살아지는데. 조금만 불편하면 되는데, 그 불편함 없이 살자고 너무 많은 걸 지고 사는 건 아닌지. 언제나 그렇듯, 여행과 함께 나의 욕심도 조금은 더 걷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다.





3. “만에 하나”를 위한 고민

ㅡ 마지막은 여행의 우선순위 정하기


가끔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을 가거나 친구와의 모임을 위해 나름 단정히 꾸민 듯(?) 보일만한 옷을 가져갈지 말지 고민해야 한다.

아이 둘을 데리고 어디 특별한 곳을 갈까 싶지만은 그래도 역시 그 “만에 하나“가 따라붙는다. 아이 없이 가는 여행이라면 우선 짐부터 많지 않아 내 옷 하나 넣는데 큰 부담은 없었다. 혹은 현지에서 이동이 자유로우므로 가서 사는 것 따위 무섭지 않았다. 아이가 둘인 지금은 아이들 물건부터 챙겨놓고(여기엔 아이들이 한 달간 읽을 몇 권의 책과 도착하자마자 놀 스케치북, 크레용 따위도 포함이다.), 남은 공간에 내 물건을 넣어야 하는데 그게 여의치 않은 경우가 많다.


또한 내가 읽을 책을 넣을지, 전자책을 넣을지, 핸드폰 앱으로 대신 읽을지, 아이들을 위한 책을 넣을지,  몇 권 넣을지, 무게가 넘는다면 대신 무엇을 뺄지. 결정해야하는 것들과의 싸움이다.


인생에서 우선순위를 정해야 하는 것처럼, 여행에서도 전자책의 편의성을 우선할 것인지 손에 닿는 감촉과 같은 나의 감성을 우선시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만에 하나” 아쉬울까 봐 책을 담기로 했다면, 그 무게만큼 아이의 책이라던가 옷가지라던가 다른 짐을 덜어내야 한다.


결국, 무언가를 넣는다면 무언가를 빼야 하는 등가교환의 시간이 발생한다. 물론 여기서의 비교 가치는 가격이 아니라 효용과 감성인 경우가 많지만.


나의 감성이 이겼다.

나는 옷가지들을 걷어내고 아이들의 책과 나의 책을 담았다. 자주 빨면 되지 뭐. 이번 여행은 꾸미지 않고 드러누워 좀 더 나답게 지내다 올 거 같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짐싸기인데 내 인생같다. 미루고 미루다 닥쳐서야 허겁지겁 하고마는. 우선순위 정하기

앞에서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망설이고 또 망설이는.


인생 뭐 있나.

여행도 뭐 있나.

편하게 지내고 오지 뭐.


내 삶도 그렇게 좀 편해져야 할 텐데.





사진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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