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야.”
“어?”
나는 휙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본다.
“너 말고 신마리.”
“아…… 미안.”
내 이름을 부른 것이 아니란 걸 알고는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책상 위에 펼쳐진 노트 위로 시선을 떨어뜨린다. 노트 위에 적힌, 내 글씨체지만 나도 알아볼 수 없는 글자들을 나는 가만히 보고만 있다. ……같은 반 아이들, 그들은 항상 나를 부른 적이 없단다. 공부, 얼굴, 성격 뭐 하나 빠지지 않는 신마리, 그 애를 부르는 거였다. 2학년 1학기 첫날부터 매번 그런 일을 당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면 자동으로 고개를 돌리게 된다. 지치지도 않고 말이다.
점심시간이 시작된 지 한참 지났지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점심시간 15분을 남겨두고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급식실로 슬금슬금 걸어간다.
2학년 2반 양마리. 너의 실수 하나도 내 잘못인 것 같은 자책감으로 충만한, 한때는 치악고 문예부 부원. 백일장 재결승 대회를 앞두고 스스로 포기 선언 이후 문예부 탈퇴. 아무도 관심은 없지만 재결승을 포기한 이유에 대해 스스로 함구. 근 일 년째 급식실에서 혼밥 적응 중.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아무런 색과 냄새와 모양도 없는 저래도 좋고 이래도 좋은 스스로 떨이 인생이라 여기는 나란 인간.
나처럼 혼자 먹고 있는 동성이가 보인다. 내가 앉은 위치에서 오른쪽 45도 각도에서 언제나 그는 발견된다. 나는 시금치 몇 가닥을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은 후 고개를 살짝 들었을 뿐인데 동성과 눈이 마주쳐버린다. 우리는 서로 못 볼 거라도 본 것마냥 헐레벌떡 고개를 숙인다.
2학년 3반 이동성. 편의점, 식당 근처에서 자주 출몰. 급식실 아주머니들의 변하지 않는 진상. 고구마 튀김 두 개를 더 받기 위해 급식실 아주머니와 삼십 분 대치한 사건 이후 그나마 조용하고 타인에게 피해는 주지 않는다는 이미지까지 삭제. 과자를 이불 속에 숨겨 두고 새벽마다 몰래 꺼내 먹는 버릇. 먹방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지만 확인된 적 없음. 스벅 케이크에 고춧가루 뿌려먹기, 김치는 돈까스 소스에 찍먹. 우유에 밥 말기, 냉동 튀김을 아이스크림처럼 혀로 녹여 먹는 음식에 있어 지극히 특이한 개취를 가진 뉴제너레이션.
나는 시금치를 조용히 씹어 넘기며 왼쪽으로 슬쩍 고개를 돌린다. 유가. 나의 왼쪽 45도 각도에 언제나 늘 그녀가 혼자 앉아 있다. 유가가 쌀밥을 입에 넣는다. 김치를 먹든 오징어를 씹든 닭다리를 뜯든 항상 모래를 씹고 있는 듯한 표정의 유가. 유가와는 절대 눈도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유가에게 나의 모든 것들이 수집당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시선처리에 주의를 기울이며 된장국을 떠 입에 넣는다.
2학년 1반 유가. 증거 수집력, 완벽한 논리력과 탁월한 설득력으로 단 한 편의 기사글로 선배들의 극심한 칭송을 얻은 입학 때는 이름 좀 날렸던 무서운 신입생. 1년 전, 신문방송 동아리 뉴스페이스에 기자로 면접도 없이 합격. 의뢰인들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중간에서 정보들을 수집하고 팔았다는 정황이 밝혀지며 뉴스페이스 원탑 기자에서 급격히 추락, 두 얼굴의 스파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배신의 아이콘으로 등극. 끝까지 사과를 거부하며 뉴스페이스 강제 탈퇴를 당하고 현재까지도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반응을 보이며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한 적 없는 정신 승리자의 최강. 기자 생활을 청산한 후에도 학교 내 이슈거리를 찾아다니며 끊임없이 재기를 노린다는 후설.
……사마귀. 내 바로 건너편 테이블에 사마귀가 혼자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면에 보이는 사마귀의 우울한 얼굴 때문인지 밥맛이 더 사라지는 것 같다.
2학년 5반 사마귀. 기숙사 방에서 사마귀를 몰래 키우다 별명이 사마귀가 된 본명은 이벌, 그러나 같은 반 아이들도 사마귀 본명을 잘 모름. 그와 공생하기 위해서는 방충망에 낀 하루살이도 죽이면 안되는 것이 절대 계명. 사마귀를 기숙사에서 반려충으로 키울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일인 시위 진행, 선배들의 심한 질책에도 불구하고 한 달 내내 시위를 멈추지 않은 무대포, 다행히 무산된 사마귀의 프로파간다. 노래 취향은 십여 년 전부터 오직 아이유 누님 것만 원띵. 아이유에게 자신의 첫사랑과 끝사랑을 모두 갖다 바친 순정남. 머리 위에 먹구름을 몰고 다니며 영어에 대한 심한 알레르기 반응. 이건 안비밀 사항으로 사마귀 친형은 3학년 전교 1등.
그리고 저 멀리…… 식당 가장 끄트머리에 앉아 있는 혼.
2학년 7반 혼. 교실에서도 기숙사 방에서도 인간과는 일절 교류가 없으며 말을 할 때는 싸울 때가 유일함. 공부 하나는 기절할 만큼 잘하지만 그거 하나 믿고 눈에 뵈는 게 없이 행동. 자신에게 대가 없이 베푸는 모든 친절과 배려를 거절. 자신 역시 그 누구에게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얼어버린 심장을 가진 혼. 그의 곁에만 가도 체감 온도 급하강. 그의 얼굴을 잠시만 대면해도 뭔지 모를 거절감에 괴로워져 상대방이 먼저 알아서 혼을 피함. 순간이동을 할 수 있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채식을 하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음. 2학년 1학기 초, 7반 반장이 혼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다가갔지만 끝내 거절. 자신은 어떤 도움도 동정도 혐오한다며 제발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 두라며 오히려 반장에게 화를 냈다는 일화. 상처받은 7반 반장은 아직도 상담실을 다니며 마음 치료 중.
왕따들을 왕따시키는 혼. 혼은 그렇게 이곳에 있는 동성, 사마귀, 유가, 나와도 거리두기 중이다.
동성, 유가, 사마귀. 혼, 그리고 나까지 다섯 명이 식당에 와 있다는 말은 전교생이 밥을 다 먹었다는 말과 같다. 우리는 한 번도 말을 섞어 본 적이 없지만 늘 같은 시간에 정해진 위치에서 밥을 먹는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십 분도 안 돼서 식사가 끝난다. 그러나 내게는 지루하고 긴 시간이다. 식기를 반납하고 식수대 앞에서 물 한 모금으로 입가심을 한 후 식당을 나서려는데 동성이 내게로 다가와 쪽지를 건네주고 총알처럼 사라진다. 쪽지 안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면학관, 한 단어가 적혀있다. 무슨 일일까? 내가 뭐 잘못이라도 할 걸까? 침착하자.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사과하고 빌면 그만이다. 쪽지를 무시하면 일이 커질 것 같은 마음에 나는 면학관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면학관 앞에서 동성이가 서 있다. 인기척에 뒤들 돌아본다. 유가와 사마귀도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그 둘의 손에도 쪽지가 들려 있는 것을 보니 동성이가 그들에게도 쪽지를 건넨 모양이다. ……그렇게 면학관 정문 앞에서 동성, 유가, 사마귀, 나 우리는 처음으로 서로를 마주하고 서 있다. 동성이 숨 쉬기를 크게 여러 번 하다가 얘기를 꺼낸다.
“있잖아. 기왕 이렇게 된 거…… 우리 말이야…….”
유가가 정색한다.
“우……리? 함부로 엮지 말아줄래.”
“저기…… 불편하지만 않으면 밥은 같이 먹을래 앞으로? 한 테이블에서 말이야.”
유가와 사마귀는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다.
“싫어.”
“저……저기. 온다온다.”
“누구?”
“혼.”
“혼? 너 혼한테도 쪽지 보냈어?”
혼이 동성이의 쪽지에 반응을 하다니. 혼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말에 나도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우리 주변을 하이에나처럼 어슬렁거리는 혼. 혼은 우리를 한참을 노려보다가 휙 돌아서서 가버린다. 혼이 뿌리고 간 냉기에 우리 모두 잠시 먹먹해진다. 동성이 말을 잇는다.
“혼은…… 사실 같이 먹기 힘들거라 예상은 했어.”
한심한 듯 동성이를 쳐다보는 유가.
“저 인간은 스스로 따가 편하다고 한 애라고. 착각하지마 우리와는 다른 부류니까. 고립 속에 스스로 자신을 밀어 넣은 아이라고.”
“좀 비켜줄래.”
언제 이쪽으로 걸어온 것인지 뒤에 네스티가 서 있었다. 크고 또렷한 눈, 늘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선 네스티의 당당한 모습에 나는 벌써부터 기가 눌리는 것 같다.
“면학관 출입구가 너네들 모임이나 하라고 있는 건 아니잖아.”
길을 내주려고 오른쪽으로 비켜서려는 나를 사마귀가 가로막는다.
“네가 지나갈 자리는 충분히 있는 것 같은데.”
“이봐 사마귀, 여긴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통로야. 얘기를 할 거면 저쪽 화장실 구석에서 가서 하든가. 원래 사마귀들은 인간 눈에 띄지 않게 다니는 법이라고.”
“사마귀들도 너 같은 애들은 피한다는 거 아냐?”
“아…… 몰랐네. 인생 포기한 애들끼리 모여서 자조 모임 좀 한다는데 내가 많이 실례를 하게 되었어.”
네스티와 사마귀 둘 다 조금의 양보도 없을 것 같았다. 네스티와는 애초부터 엮이지 않는 게 좋다. 이제 곧 수업이 시작될 거였다. 나는 사마귀를 옆으로 밀쳐냈다.
“미안. 비켜줄게.”
“양마리, 넌 할 줄 아는 게 미안하다는 말밖에 없는 것 같더라. 1학년 때나 지금이나 바뀐 게 없구나.”
네스티가 내 얼굴 가까이와 속삭인다.
“난 네가 왜 그러는지 알아. 먼저 져주고 포기하면 사람들이 널 덜 미워할까봐 그러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면학관 쪽으로 걸어오는 안선배의 모습이 보인다. 네스티 앞에서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내 모습을 안선배는 똑바로 보았을 것이다. 안선배는 나를 외면하며 방향을 틀어 체육관 쪽으로 걸어간다. ……기어이 네스티는 우리가 서 있는 통로 한 가운데로 당당히 걸어 나갔다. 우습지만 네스티의 말처럼 내가 무엇을 잘못한 것도 아닌데 괜히 동성, 유가, 사마귀에게 미안해졌다.
“넌 우리가 그냥 조용히 비켜주면 되는 일이었다고 생각해?”
사마귀가 내게 물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어.”
사마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휙 등을 돌려 교실 쪽으로 가버린다. 5교시 시작종이 울렸고 동성, 유가, 사마귀, 나도 교실로 뛰어 들어갔다. 수업시간 내내 안선배의 무표정한 얼굴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5교시 이동수업이 끝나고 교실로 돌아왔을 때 사물함이 있는 교실 뒤편에 아이들이 구경거리가 난 듯 몰려 있었다. 불꽃을 튀기며 서로 대치하고 있는 네스티와 혼이 보였다. 네스티의 목소리가 너무 컸기에 어떤 상황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이동수업이 끝나고 교실을 나가던 참에 네스티의 책상을 혼이 잘못 건드려 책상 위에 있던 캐논 카메라가 바닥에 떨어진 것 같았다. 네스티의 책상 밑에 카메라가 무참히 산산조각이 나 있다.
“너 이게 얼만지 알아? 오 백이야.”
“…….”
“네가 무슨 수로 갚을 건데?”
네스티는 치밀어오르는 분노에 어찌할 바를 모르며 몸을 제대로 가누지를 못할 지경이었다. 혼을 노려보는 네스티의 흰자위가 희번덕거린다.
“말해 어서! 불우이웃이니까 좀 봐줘야 하는 거야?”
“고맙다 걱정해줘서.”
혼 역시 주먹을 쥔 채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네스티를 건드리는 날엔 학부모에게까지 일이 퍼져나갈 것이 뻔했기 때문에 혼은 힘겹게 참고 있었다.
“네 가정형편을 들먹이며 이 상황을 빠져나가려고 한다면 어림도 없는 줄 알아. 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룡샘이 결혼이라도 하면 모를까…….”
주변에 있던 애들이 네스티의 말에 폭소를 터뜨린다.
“학기 중에 편의점 알바를 해서라도 갚아야 될거야.”
……나도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구경만 하고 있던 나는 네스티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그 말 진심이니?”
“뭐?”
“말룡샘이 결혼하면 그거 안 갚아도 되니?”
“얘 오늘 점심에 먹은 시금치가 어떻게 됐나보네.”
“아니. 나 지금 지극히 정상이야.”
키가 큰 네스티가 나를 위에서 흘겨본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지만 나는 두 주먹을 꽉 쥔다. 그녀의 뜨거운 콧김을 이마에 느끼며 나는 다시 또박또박 얘기한다.
“말룡샘이 결혼하면 그거 안 갚아도 되니?”
어이없다는 듯 웃는 네스티.
“그래. 말룡샘이 결혼하면 안 갚아도 돼…… 근데 말이야. 세 달의 시간을 줄게. 만약 그 때까지 말룡샘이 결혼 안 하면 네가 이 가격의 두 배를 갚아야 할 거야. 그래도 되겠어?”
“좋아. 그렇게 할게. 두 배로 갚을게.”
그곳에 있던 모든 애들이 야유를 보낸다.
“네스티 오늘 간식은 네가 편의점에서 쏘는 거지?”
“불쌍한 애들로 재테크질 좀 그만해.”
“네스티가 이긴다에 만원.”
“나도!”
“양마리에 걸 사람?”
“됐거든 이런 사기꾼!”
얼굴이 화끈거렸다. 벌거벗겨진 채 아이들 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만 좀 해 너희들!”
애들한테 둘러싸인 나를 보며 사마귀가 소리를 질렀다. 사마귀 옆에 유가도 서 있었다.
“둘이 사귀나 봐. 양이랑 사마귀라니.”
신마리가 유가를 향해 쏘아붙인다.
“유가, 너도 아까 얘네들이랑 같이 있었지? 설마 같은 편? ……아 맞다. 네가 편이 어딨었다고. 얘네들한테 붙어 있다 얘깃거리 있으면 게시판에 한 번 올려보려는 심산이겠지.”
“잘 아네. 다음번엔 후배들한테 붙어서 꼰대질이나 하고 다니는 네 얘기를 써 볼거니까 기대해라.”
“누가? 내가? 웃기지마. 망상이 있으면 치료를 받아야지 왜 학교를 다니냐?”
네스티는 녹음기를 틀어 내 코앞에 들이밀었다.
“조용히 해 다들! 양마리, 다시 한 번 말해줄래?”
나는 또박또박 다시 말해주었다.
“네 말이 번복될 수 없다는 걸 명심해.”
네스티는 녹음기를 들고 사라졌다. ……멀찍이 떨어져서 모든 걸 보고 있던 혼. 혼이 한심스럽다는 듯이 내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양마리. 고맙다는 말을 들으려고 이런 짓을 했다면 미안한데 어쩌지. 난 남의 일에 참견하는 너 같은 인간이 제일 싫어.”
쾅! 문을 부서뜨릴 것처럼 닫아버리고 혼은 교실을 나간다.
7교시 후 저녁도 거르고 나는 등나무 벤치에 혼자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깜깜한 절벽……이 눈앞에 서 있었다. 걸어갈 수도 뛰어갈 수도 날아갈 수도 없는 길이 나를 가로 막고 있는 것 같았다.
“양마리.”
눈을 떴을 땐 사마귀, 동성, 유가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사마귀는 나보다 더 얼굴이 어두워보였다.
“양마리. 너 설마…… 혼 좋아하냐?”
동성이 고개를 끄덕인다.
“다 각자 끌리는 매력 포인트가 다른 법이니까. 좋아할 수도 있지. 나는 이해해.”
유가가 동성의 말에 덧붙인다.
“사랑의 피학적 스타일.”
“그런 거 아니야. 그냥…… 그러고 싶었어.”
네스티의 입에서 포기, 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내 속에 뭔가가 건드려진 것 같았다. 나는 내 속에 남아 있는 실낱같은 뭔가를 붙잡고 싶다. 그래서 보여주고 싶다.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니라고. 아직은. 동성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뗀다.
“미안한데 아까 같이 점심 먹자고 한 거 취소할게.”
사마귀가 깊은 숨을 내쉰다.
“나 공부해야 하는데…… 이런 골치 아프게 생겼군.”
“너한테 도와달라고 한 적 없어.”
“나도 너를 도와주겠다고 말 한 적은 없는데 말야…… 네스티 그 인간이 학교 안에서 설치고 다니는 게 재수가 없어서 말이지.”
“고마워 마리야. 그럼 나는 이만…….”
가려는 동성이를 유가가 붙잡는다.
“어차피 너 우리랑 같이 있어서 찍혔어. 이게 다 네가 쪽지를 건네준 탓이란 걸 기억하라고. 그리고 난 전혀 불가능한 건 아니라고 봐. 말룡샘이 사랑에 빠져있다는 증거가 있거든. 우리 학교 샘 중에 한 분이야.”
유가가 내게 묻는다.
“너. 말해봐. 이말년…… 거기서 읽은거지?”
주간 이말년. 이제는 알아주는 언론사에서 뉴스 앵커를 맡고 있는 우리 학교 출신 이말년 선배를 기리며 만들어진 화장실 바닥, 주차장 구석, 복도 끝 청소 도구함 사이 사이에 거의 던지다시피 내버려진 가끔 지나다니는 학생들에게 주워다 읽혀지는 발행인도 편집인도 기자도 알 수 없는 교내 비공식 간행물. 읽는 이로 하여금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탄탄한 논리력과 참신하고 어렵지 않은 내용으로 쉬지 않고 단번에 끝까지 읽어내려갈 수 있다.
한 달 전, 주간 이말년에 실렸던 기사가 있다. 제목은 말룡 그가 사랑에 빠졌다는 증거. 에이포만한 용지 끄트머리에 실린 그 기사에 아무도 시간을 들여 읽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 기사를 꽤 흥미 있게 읽었다. 이말년의 논조는 이러했다. 말룡샘. 그의 변화가 시작되었는데 그 증거로 차가운 논리와 직설 화법으로 점철된 그의 수업이 예전과는 달리 감정적으로 변했으며, 수업 중간중간 과거 이야기를 잘 꺼내고, 이전엔 벌점을 메겼을 수업시간에 조는 아이들에게까지 용서와 배려를 베푼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의 변화는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대표적인 모습으로 자아의 방어막이 허물어지면서 세상에 대한 지극히 이타적인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일시적으로 생기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이말년은 말하고 있었다. 또한 그의 곁에서 자주 심부름을 해주는 어느 학생의 제보에 의하면 말룡샘 폰에 저장된 전화번호 목록 중에 S로 시작되는 사람이 있으며 이니셜 앞에 하트표가 있다는 것이다. S로 시작되는 이름 끝에 치악고 선생님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우리 학교 선생님이 분명하다고 학생은 주장하고 있었다. 치악고 선생님 중 미혼인 여자 선생님, 그리고 S로 시작되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도서관 사서, 서율리아 그녀 밖에 없다.
그즈음 나도 말룡샘의 수업을 들으며 뭔가 그가 변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는데 혼자 창밖을 보며 웃는다던가. 어렸을 적 이야기를 너무 자주 한다던가, 표정이 다소 부드러워졌다던가, 좀 깔끔해지신 것 같다던가…… 하는 그의 변화가 연애를 하거나 사랑에 빠져서인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어쨌든 기사가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유가도 아마 그것을 읽은 모양이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사마귀가 묻는다.
“너네들 그 종이 쪼가리를 믿는 거냐?”
유가가 사마귀를 향해 입을 연다.
“넌 믿지 말던가. 아는 사람만 아는 거니까. 양마리. 얘 호구 같아 보여도 다…… 계산을 한 거였다 본다. 맞지?”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적어도 확률이 영 프로는 아니야.”
고개를 떨구는 사마귀.
“하…… 영프로…… 그래서 체육 선생님…… 어떻게 할 건데? 너희…… 사랑이 장난인 줄 아냐?”
“…….”
“네가 뭐라고 말룡샘을 사랑에 빠지게 만들 거냐고!”
“…….”
“그게 무슨 장난인 줄 알아? 사랑이 장난인 줄 아냐고!”
“사마귀…… 너 정말 힘들구나.”
동성이가 사마귀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사마귀는 오랫동안 짝사랑 중이다. 전교생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의 사랑은 일편단심이다. 반응이 없어도 한 번도 갈아타 본 적이 없는 그의 순수한 사랑을 주변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사마귀의 기숙사 온 방 안에는 그녀의 사진으로 도배가 되어 있으니까.
“……사랑 쉬운 거 아니다.”
나는 사마귀, 동성, 유가를 끌고 상담실 복도로 데려갔다. 그곳에 도착해 복도에 걸린 게시판을 가리켰다.
“저거.”
게시판에 붙어 있는 공고문. ‘저녁 7시부터 9시 집단상담 진행, 주제 사랑의 기술. 집단상담원 5명 모집. 선착순 마감.’
“사랑의 기술? 이게 뭐?”
“사마귀…… 네 말대로 사랑이 장난이 아니라면 제대로 한 번 배워보려고.”
“이걸 같이 하자는 건 아니지?”
“같이 하자.”
“나는 이런 거 절대 안 믿어. 마음을 알아준다 뭐 어쩐다 하는 거. 우리 엄마가 그랬는데 사람 마음 누구랑 함부로 나누는 거 아니라고 했어. 사람 인생 함부로 조언해주는 것도 아니고 조언을 받는 것도 아니라고. 그렇지 않아? 말해봐. 응? 안 그래? 근데 말야…….”
“왜?”
“……거기 가면 간식은 주는 거야?”
저녁 7시. 우리는 각자 담임샘의 허락 하에 저녁 자율학습실 대신 상담실에 들어섰다.
“어서와요.”
상담실에 들어서자 수남샘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수남샘은 지병이 있던 남편을 일찍 떠나보내고 작년 수남샘의 딸이 대학에 들어갔다는 말이 있다. 길고 풍성한 머리가 늘 하나로 단정하게 묶여 있고 피부 미용에 엄청난 돈을 들이는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얼굴은 주름 하나 없고 광이 날만큼 반질거린다. 식단은 철저하게 관리하고 커피와 설탕은 스무 살 때부터 입에 데지도 않았을 만큼 건강하고 몸에 군살 하나 없다. 오십을 넘겼다고 하지만 외모로 봤을 땐 도무지 나이가 가늠이 되지 않아 보면 뭔가 섬뜩한 면이 있다.
집단에 참여한 사람은 사마귀, 유가, 동성, 나 그리고 1학년 도정이였다. 가끔 급식실에서 혼자 점심을 먹는 도정이를 본 적이 있다. 집단에 모인 우리들은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 모두 친구가 없다는 점이었다.
상담실에 의자를 동그랗게 배열한 후 우리 모두 앉고 싶은 자리에 앉았다. 간식으로는 초콜렛이 잔뜩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다. 간단한 자기 소개 후 드디어 집단이 시작되었다. 수남샘이 입을 열었다.
“사랑하기 위해선 사랑의 기술이 필요해요. 어른도 학생들도 다 마찬가지에요. 우리는 다 외로운 섬이죠.”
사마귀가 입을 열었다.
“선생님 저는 그것을 3살 때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유가는 사마귀를 대단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3살…… 나보다 1년 빠르네.”
“이곳에서 우리는 외로운 섬을 연결시키는 가장 완벽한 방법을 연습할 거예요. 규칙은 간단해요. 절대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 것. 다른 사람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것.”
집단이 진행될수록 실내가 점점 뜨거워졌다. 창문을 열어야 할 만큼 상담실은 대화의 열기로 달아올랐다. 그러나 집단상담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듣는 내내 불편하고 힘들고 짜증나고…… 모든 감정들이 뒤엉켜 올라왔다. 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내면의 소용돌이로 집단상담은 힘든 노동이 아닐 수 없었다. 가장 적극적이었던 사람은 상담 같은 건 절대 믿지 않는다고 했던 동성이었다.
“집에서는 적어도 두 시간 동안 천천히 음식을 즐길 수가 있었는데 여기 기숙사에 와서는 그런 것을 전혀 할 수 없다는 것이 저로서는 정말 막막하고 죽고 싶고…… 제가 좋아하는 시간에 제가 좋아하는 음식을 제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조합해서…… 음미하는 것은 저에게 너무 중요해요. 단순히 음식 자체를 먹는 것과는 다른 의미에요. 전혀 다른 의미죠.”
도정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동성이 계속 말을 이어간다.
“저는 사실 많이 먹지는 않습니다. 물만 먹어도 살이 찌는 타입이라…….”
듣고 있던 유가가 한마디 한다.
“선생님. 동의가 안되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일단 다 듣고 얘기해 줄래요?”
“저는 그저 먹는 것을 즐기고 좋아하는 것 뿐입니다. 단지 사람들이 잘 먹지 않는 조합으로 먹는 것에 행복을 느끼는 사람일 뿐이에요. 그런 차이를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해요. ……특히 저희 아버지가 그랬습니다…….”
동성이의 눈이 발갛게 물이든다.
“음식에는 조합이 있다는 말을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저에게 조합은 건강이나 맛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 그때마다 입에 당기는 것, 새롭고 재밌는 것,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을 연결해 이전과는 다른 맛을 찾는 것이니까요. 사람들은 제가 먹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돌렸습니다. 아버지 역시 그랬어요. 음식을 그렇게 함부로 헤집고 네 마음대로 장난을 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고, 꼭 그렇게 튀게 행동을 해야만 하는 거냐고…… 노력을 안 해 본 건 아니에요. 근데 고쳐지지 않았어요. 어떤 날은 화가 난 아버지께서 냉장고에 숨겨 두었던 모든 음식을 꺼내 제 방에 내동댕이 치셨습니다…….”
“아버지에게 무슨 말을 듣고 싶었나요?”
“힘들지…… 밖에서 아버지를 닮은 사람만 봐도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아요.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에요. 무서운 선생님을 보면 저절로 책상 밑으로 숨고 싶어요.”
사마귀가 답답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여기 너희 아버지는 없으니까 안심해 동성아.”
동성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그것을 꼭 토요일 아침에 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꼭 토요일 아침에 해야 하는 겁니다. 다른 시간에는 그것은 의미가 없어요…… 꼭 그래야만 합니다. 꼭이요. 아버지는 항상 새벽만큼은 좀 참으라고…… 근데 저는 새벽이 가장 좋거든요. 새벽이 가장 평화롭고 포근하거든요. 새벽에 일어나 만찬을 즐기고 있는 저를 기다리셨다가 주무시지도 않고…… 그때부터 폭격이 시작되는 거예요…… 새벽에 그러고 있는 너를 보면 누가 좋아하겠느냐, 적어도 사람들이 움직이고 생활하는 시간대를 지켜 살라고 그래야 어른이 돼도 기본은 하며 사는 거라고. 기숙사에서 새벽마다 그러는 너를 누가 좋아하겠느냐…… 그런 날이면 하루 종일 밖에 나가지도 않고 은둔합니다. 모두 저만 쳐다보는 것 같고 길을 걷다가 갑자기 눈물을 쏟습니다…….”
왜 나는 동성의 얘기를 들으며 동성이 보다는 동성이 아버지의 마음이 더 이해가 가는 걸까. 여기 모인 사람 모두 나와 같은 마음일 듯 했지만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용기를 내어 말을 꺼낸 사람은 사마귀였다.
“후우…… 좀 답답하다고 해야 할까요. 앞으로 어려운 일이 얼마나 많은데 군대도 가야 하고 대학도 가야하고 결혼도 해야하고 돈도 벌어야 하는데 이런 것으로 울고 있는 사람이 대체 뭐 하나라도 제대로 해나갈 수 있을지…… 어쨌거나 심신 미약 모든 게 심신 미약의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수남샘이 동성이를 보며 걱정스러운 듯 묻는다.
“동성이 표정이 안 좋은 것 같은데 할 말 있어요?”
“방금 사마귀가 이그젝끌리 저의 아버지 같았어서요.”
당황하는 사마귀.
“아버지처럼 말해서 진짜 미안한데…… 근데 너 갑자기 영어는 왜 쓰냐? 너 영어 잘한다고 나한테 지금…….”
사마귀는 점점 자기 통제력을 잃어가는 것 같았다.
“아직 제 얘기 안 끝났습니다.”
동성은 우리의 반응이 어떻든 상관없이 자신의 얘기를 끝까지 할 작정인 듯했다. 사마귀와 유가가 무섭게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곳에 함께 오자고 한 것을 대해 깊이 반성했다.
“사실 그렇습니다. 바람에도 여러 종류가 있어요. 일요일에 부는 바람과 월요일에 부는 바람은 분명 다른 감촉과 색을 가져요. 그래서 일요일엔 무조건 창을 열어 놓고 있는 거예요. 얼어 죽던 말던요. 사람들은 그 차이를 이해하지 못해요. 일요일 그때 맞는 바람은 저에겐 그 무엇보다 더 소중한 거라는 거예요. 그 바람 속엔 모든 것들이 다 들어 있으니까요. 제가 원하는 따뜻함. 편안함…….”
무슨 맥락에서 바람 얘기가 나온 건지를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머리가 약간 아파왔다. 유가는 외계어를 듣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고 사마귀는 아예 동성이 쪽을 보지도 않았다. ……우리 모두 외로운 섬에서 탈출하기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아마 우리 중에 가장 힘든 사람은 수남샘이 아닐까. 수남샘은 애써 담담하게 우리의 얼굴을 살피며 꼿꼿한 자세를 한결같이 유지한다. 수남샘이 유가에게 할 말이 없냐고 묻는다. 유가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흥미로운 얘기라고 생각되지만…… 성적에 대한 압박감, 수면 부족, 친구들과의 갈등 이런 것들이 더 심한 스트레스로 느낀다는 보고를 읽은 적이 있어서요. 다른 사람에게 딱히 관심을 얻을 수는 없는 주제라 제게는 큰 의미도 없고…… 딱히 구미가 당긴다고는 할 수 없어서…….”
심기가 불편한 사마귀가 다시 한마디 한다.
“야, 너는 동성이 얘기가 가십으로 보이냐?”
우리는 동성이의 얘기를 듣는 게 아니라 각자 자신의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수남샘이 그런 나를 보며 할 얘기가 있는지 물었다.
“음…… 뭐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저도 위로 뭔가 부드러운 것이 흘러내려갈 때 말할 수 없는 안도와 위로를 경험할 때가 있어서 조금은 이해가 되기는 합니다만…….”
“다만?”
“다만 꼭 음식이 아니더라고 본인을 위로해줄 수 있는 것들이 있을 것 같은데 예를 들면 줄넘기, 걷기, 배드민턴, 수영…… 몸을 움직일 때 나오는 호르몬 중에 세로토닌이라고……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하는데 그걸 좀 이용해보는 거죠. 뇌를 그런 식으로 자극시키면서 어쨌든 그런 패턴에서 빨리 빠져나올 수 있도록…….”
유가가 한마디한다.
“야, 돌려서 그만 말해. 그냥 그만 먹고 운동하라는 거잖아.”
수남샘이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그만, 그만.”
집단 내내 조용히 듣고만 있던 도정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먼저 선배님들 제 얘기 들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드립니다. 그게…… 제 취미는 지하철 타기에요. 저는 지하철에 앉아 그곳에 몸을 맡긴 채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는 상태를 집보다 더욱 편하게 느껴요. 그래서 주말마다 새벽에 나가 밤 12시까지 전철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죠. 3호선은 할머니 집앞 마루 같아요. 9호선은 용을 탄 것 같죠. 2호선은 피아노 건반 위를 달리는 것 같아요. 전철 역 안으로 들어설 때 전철이 내는 소리도 역마다 달라요. 역마다 다른 음악이 들립니다. 지루할 틈이 없어요. 전철에서 먹고 자고 공부하고 노래하고 꿈꾸고 관찰하고 울고…… 그렇게 하고 집에 돌아오면 모든 게 감사해요. 아마 그런 비슷한 것이 아닐까…… 동성 선배의 음식에 대한 애정을 저는 그런 식으로 이해해보았어요. 타인은 잘 모르는 자신에게만 있는 그런 소중한 시간들이 있는 법이니까요…….”
동성이가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정아.”
“네. 선배.”
“너 초코하임 좋아해?”
“아…… 그게…….”
“내 기숙사 옷장에 과자 있어 내일 너희 교실에 가져다 줄게. 너 먹어.”
“아니에요. 선배.”
“괜찮아 너 줄게.”
“아, 선배 그게 아니라 저 사실…… 화이트맛 밖에 안 먹어요.”
수남샘이 말한다.
“방금 도정이가 한 게 뭐라고 생각해요?”
수남샘의 눈을 슬금슬금 피하는 질문에 약한 유가, 동성이, 사마귀, 나.
“외로운 섬을 연결시키는 유일한 방법. 공감.”
……이제야 희미한 빛줄기가 보이는 것 같았다. 오늘 하루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오늘 들었던 생각이나 느낌을 종이에 적어줘요. 후기를 보고 다음번 애들이 올 수 있도록. 여러분 모두 수고했어요.”
집단상담이 끝난 후 수남샘은 개인 상담이 있다며 옆방으로 자리를 옮기셨다. 우리는 남은 시간 동안 테이블에 앉아 집단상담 후기를 작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상담실로 누군가 들어왔다. 혼! 혼은 우리를 본 척도 하지 않고 개인 상담실로 들어가 버린다. 쌩한 찬바람이 이곳까지 불어오는 것 같다. 사마귀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혼…… 제 상담받네?”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유가.
“치악고에서 가장 외로운 섬이잖아.”
외로운 섬…….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양마리, 뭘 좀 찾았어?”
율리아샘과 말룡샘의 외로운 섬을 연결시키기 위해서 그들의 유사점을 찾는 것이 필요했다. 그들이 서로 같은 것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줘서 서로에 대한 호감의 정도를 높이는 것이 지금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일 것 같았다. 아무리 다르게 보이는 사람도 분명 한가지의 유사점이 있게 마련이니까.
“너희들 말룡샘 율리아샘 두 분에 대해서 아는 거 좀 다 말해봐.”
유가가 아이패드를 꺼냈다. 일곱 번의 잠금장치를 해제시키고는 그녀만이 접근 가능한 치악고 초특급비밀 정보들을 꺼내 올린다.
‘송말룡, 41세, 취미 운동 특기 운동. 주말엔 아침 운동 후 구청 안에서 점심 먹기가 인생 낙. 구청 최애 메뉴는 4900원짜리 불백. 독서는 수능 이후로 중단. 박치, 음치, 몸치를 다 갖고 있는 재능인 그러나 내적 댄스는 가능. 1년 전 길고양이 구조 후 집에서 키우다 발작증상 보여 입양자에게 넘김. 길고양이 그리움 깊어져 우울증 앓음. 지금은 호전되었으나 고양이만 보면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짐. 은퇴 후 동물 보호단체 봉사활동 계획 있음. 좋아하는 음식 냉동 삼겹살, 자취 14년 차, 마지막 연애 언제인지 본인도 기억 못함. 아무도 모르지만 10년 전 유튜버로 활동.’
‘서율리아. 33세, 도서관 사서, 책사랑이 지독함. 집에 책만 일천 권. 아침마다 그릭요거트에 과일, 아몬드 얹어 먹는 습관을 10년 간 유지 중. 동물 털 알레르기, 길에서 비둘기만 마주쳐도 기겁. 몸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고 평생에 운동은 숨쉬기 운동으로 만족. 청결, 정리정돈, 인테리어에 관심 많고 쇼핑은 거의 샤워, 청소 용품만. 좋아하는 음식 삽겹살 빼고 다. 마지막 연애 2년 전, 2달 전 유튜버로 짧게 활동한 이력.’
나는 동성이에게 물었다.
“동성아, 이 둘의 공통점이 뭐라고 생각하니?”
동성이 골몰히 생각하다 입을 연다.
“사……람?”
“후우…….”
“이 두분은 여기서 만난 게 기적인 것 같은데. 아, 있네 있어.”
“뭐?”
“유튜브…… 두 분 다 유튜버였네. 동영상 삭제하지 않았다면 어딘가 떠돌아다니고 있을 것 같은데.”
“언제?”
“말룡샘은 십년 전, 율리아샘은 두달 전. 근데 그건 왜?”
“수남샘이 그랬잖아. 외로운 섬을 연결하는 유일한 방법이 공감이라고. 유튜브 영상에서 두 분의 닮은 점을 찾아내자. 그것을 서로 공유할 수 있게 해서 외로운 섬들에 대화의 물고를 트게 하는 거지…… 어때?”
잘 모르겠다는 듯 유가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샘들 채널 이름 알아?”
“몰라. 검색해봐야지.”
“64억 7000만 개 중에서?”
“운이 좋으면 얻어걸릴 수도 있잖아. 그리고 우리에겐 먹방 유튜버가 있다고. 구독자들한테 좀 도와달라고 하면 안 될까? 안 그러냐 동성아.”
동성이가 퉁명스레 대답한다.
“먹방 안 한지가 백만 년 전이다.”
“몇 명이야 구독자?”
“2명.”
“와. 2명이나 돼?”
“엄마랑 동생.”
“살려보자!”
“싫어.”
교실로 가려는 동성이를 사마귀가 붙잡는다.
“야. 새로운 걸 시도해봐. 너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 지 한번 들어보라고.”
“안 해…… 난 절대 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