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아, 이야기를 만들어!
산촌유학을 하면 남는 건, 이야기청!
산촌유학을 오면 아이들은 일년을 살고, 이년을 살고, 삼년을 산다. 더 오래 살다가는 아이도 있다
아이는 산골마을에서 학교를 다니고, 놀고, 배우고, 여럿이 함께 살면서 올 때와 다른 모습으로 성장한다.
여행을 가면 드른 곳마다 사진을 찍으며 '남는 건 사진밖에 없어'라고 하듯 산촌유학을 하고 나면 남는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은 친구들과 함께 지내면서 생긴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야기는 쌓인다.
여럿이 모여 살다보니 서로 간에 많은 일이 일어나고, 일이 수습되고 나면 이야기가 남는다. 남은 이야기는 우리끼리 두고두고 나누는 '이야기꺼리'가 된다. 이야기는 자신이 원하는 원하지 않든 , 의지에 관계없이 관계속에서 생겨나고, 이야기는 남아 우리의 뇌리에 차곡차곡 쌓여 저장된다.
그건 혼자만 겪은 특별한 경험으로 자신만 가지고 있는 이야기일 수 있고 아니면 주변을 포함한 관계 속에서 얽히고 풀리고 매듭지어진 우리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아이의 성향에 따라 이야기는 풍성하고 많아질 수 있다.
태풍이 불고 비가 억수로 오고난 뒷날 불어난 계곡물은 무섭게 출렁이며 흐른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얼른 시선을 거둔다. 물이 불어나고 황토색 탁한 물이 빠른 속도로 출렁이는 내려가는 계곡은 아이들에게 구경거리이고 호기심 넘치는 장면이다. 학교에 다녀와서 가방을 던져놓고 계곡에 들어가는 건 안된다는 말만 듣고 바로 달려간다. 몇 명의 아이들은 같이 돌을 던지고 나뭇가지를 던지고 떠내려오는 물건들이 어떤게 있나 보고 와선 자신이 본 것이 어마어마 했다고 이야기 한다.
행동형이면서 관계형인 아이의 주변에는 늘 이야기가 넘쳐난다. 일이 많이 생겨서 그 일을 해결하느라 가끔 힘들어 보일 때도 있지만 그 만큼 남는 이야기가 많고 자기를 돌아볼 기회도 많다. 다툼이나 갈등이 많은 부분을 차지할 땐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로 보여 돌봄이 힘들지만 문제해결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고 친구의 마음도 돌아 보다보면 어느새 마음은 눈부시게 성장해 있다.
'이까지만'의 줏대를 가진 아이는 이야기가 적다.
조용하고 수줍음을 타는 아이는 주어진 범위 안에서, 남을 덜 침범하고 나도 덜 침범받으며 지내고 싶어한다. 선을 그어놓고 '이까지만' 이라고 자신의 줏대를 갖고 있으니 최대한 선을 넘지 않으며 지낸다. 가능한 끼여들지 않고 주로 관찰자가 되고, 가능한 일을 만들지 않는다.
아예 관계하지 않고 살 순 없으니 항상 자잘한 일은 있기 마련이니 완전히 피해 갈 순 없다. 유학생활 속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일상, 같이 지내면서 오가는 말과 행동, 센터 프로그램이나 활동에 참여하면서 일어나는 자연스런 교류로 이야기는 생겨난다.
역동적인 아이에 비해 이야기는 적지만 '이까지만'의 아이에겐 최선이었을 거다.
농가(유학생이 사는 집)의 방에는 2~3명의 아이가 같이 산다. 그림 그리기 좋아하는 여분이는 늘 방에 있을 때면 그림을 그린다. 장난치던 아이가 넘어지면서 책상에 앉아버려 그림이 엉망이 되었다. 여분이는 울기만 하고 나머지 아이들은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고 섰다가 여분이에게 사과를 했다. 여분이는 화가 안 풀려서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냥 거기서 이야기는 더 진행하지 않고 멈췄다. 그 뒤로 여분이는 방해받고 싶지 않을 때 먼저 말을 한다. "밖에 나가서 놀아" 라고 한다.
혼자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피어나는 이야기꽃
한달 반 넘게 장마가 계속 된 적이 있다. 5월에서 6월로 넘어갈 즈음, 텃밭 모종들이 뿌리를 내리려고 물이 가장 많이 필요한 때 였다. 야생 풀들도 잎이 말라서 오그라 들 정도의 가뭄이 계속 되어 모두 걱정을 하고 있었다. 마을에서도 식수로 쓸 물이 부족하니 밭에 물 주지 마라며 이장님의 방송이 나왔다. 심각했다. 우리는 밥때마다 나오는 물, 쌀씻은 물, 채소씻은 물, 설거지물을 통 한개에 모으기로 했다. 모아진 물을 텃밭에 옮겨 부었다. 평소 버려지던 물을 그 때만큼 귀하게 여기며 쓸모있게 썼던 적은 없다. 가뭄을 끝내는 비가 쏟아졌을 때 같이 기뻐했다. 같은 마음이어서 참 좋았다.
일상에서 많은 일이 무수하게 일어난다. 일상은 혼자가 아니고 관계이다. 관계는 같이 사는 친구, 이모와 아저씨, 마을어른, 마을친구,학교선생님, 개, 고양이, 자연 등이 다양하다. 관계 안에서 서로 주고 받으면 많은 일이 일어난다.
이야기 생성은 '일상 다반사'
독자들이 상상도 못 할 일이 일어날 때도 있다. 빨래널 때 일어나는 일, 화장실 사용에 관한 일처럼.
재밌고 즐겁고 신나는 일과 슬프고 아쉽고 힘들고 다투어서 화나는 일 등 살다보면 꼭 좋고 신나는 일만 없듯 우리에게도 여러가지 일이 일어난다. 하지만 일이 일어나고 서로 이야기하고 매듭짓는 과정을 거치면서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이야기는 우리 머릿속에 저장되고, 각자에게 역사가 된다.
우리가 남긴 이야기 청
매실청이나 유자청을 담글때 분량의 설탕과 매실, 설탕과 유자를 번갈아가며 켜켜히 쌓으며 설탕에 재워 기다린다. 하루 이틀 지나면 유리병 속 매실과 유자는 설탕과 맞닿으면서 변한다. 색깔이 변하고 모양이 변하고 액이 흘러나와 설탕이 녹으면서 점점 숙성되면서 달콤한 청으로 변한다.
시간이 흐르면 아이들에게 이야기가 차곡차곡 쌓이고 이야기와 함께 성장한다.
쌓인 이야기는 어떤 순간, 어떤 단어 하나, 갑작스런 상황에서 튀어나온다. 이야기가 튀어나오는 순간 눈이 마주치고 손뼉을 쳐 진다. 맞장구 치며 깔깔대며 웃고 나자빠지기도 한다.
자전거, 그 때 세발자전거, 대바우에서 물놀이, 소나기와 번개, 천둥 쳤을 때, 그 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다. 그 이야기 시점에 함께 있었던 아이도 있고 이야기 속의 단어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면 모두의 이야기가 되고 자기가 겪은 것처럼 즐거워하면 말하고 듣는다.
봄에 나물 캐서 초밥해먹고, 전 구워먹고 여름엔 물놀이하고 소나기에 두들겨 맞고, 마당에 놓인 평상에 누워 별구경하며 별의별 이야기 했잖아
가을엔 감따러 참새미길가고, 감깎아서 곶감 만들어 놨더니 어느 녀석이 빼먹어서 화가 났고, 메기 잡아다 이모에게 매운탕 끓여달라 해서 먹고, 느티나무 낙엽이 운동장에 쌓이면 던지고 몸 묻고 놀았지.
겨울엔 계곡 얼음위에서 썰매타고 꼬챙이 주워다 얼음 깨고 얼음 깨다 발등찍고 마당에 불피워 고구마 구워먹고 ,,,,
우리 아이들은 서로 얼굴 맞대고 추억할 거리가 많고 나눌 이야기는 차고 넘친다.
같이 살면서 생긴 살아있는 이야기가 가득하고 이야기는 서로를 이어주는 설탕이 되어 각각 가지고 있는 맛과향이 흘러나오게 한다. 그 맛과 향은 숙성과정을 거치면서 진한 맛과 향을 가진 이야기 청이 된다.
나는 아이들이 더 진한 맛과 향을 가진 이야기청을 만들기 바란다. 그래서 유학하는 동안 자기 이야기를 많이 만들었으면 한다. 이제 나는 어른이 되어 나의 이야기를 돌아보고 꺼내본다. 나의 이야기가 없는 시절이 있다. 이야기는 있으되 그 이야기 속에 내가 없다. 씁쓸했다. 그 때 무얼 하고 있었을까? 감정도 있고 하고 싶은 것도 있고 친구도 있었을 텐데 왜 나는 그 이야기에 없을까? 나는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듯 하다.
어릴 적 저장해 둔 꺼낼 먹을 '이야기양식'이 많은 어른은 나이가 들어서도 또 다른 관계와 이야기를 만들면서 행복하게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 건강하고 행복하려면 산촌유학을 하는 지금, 여기, 당장 자신이 녹아 들어있는 많은 이야기를 갖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