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주제를 암시하는 중요 이름이면서 단 한번만 등장하는...
센나야 광장에서 그리보예도바 운하를 따라 K 다리를 향해 간다. 그리보예도바 운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여러 운하 중에서도 아주 특이한 형태를 갖고 있다. 꼬불꼬불 도심을 휘젓고 다닌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북방의 베네치아라는 별명 답게 수많은 운하들이 있고, 유람선도 많이 돌아 다닌다. 운하와 강들마다 유람선에서 보이는 풍경이 제각각인데, 그리보예도바 운하의 경우는 서민적인 풍경을 볼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서민 얘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지금 센나야 광장에는 장사하는 중앙아시아 사람들이 매우 많다. 그 옛날 러시아 시골 사람들이 상경하여 머물던 곳을 이제는 중앙아시아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다. 재래 시장의 고기, 야채, 과일 가게는 거의 중앙아시아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들이 샤베르마라고 하는 인스턴트 음식을 만들어 파는데, 센나야 광장 주변에 샤베르마 가게가 굉장히 많다. 지금은 러시아 서민 음식이 되다시피 하였고, 싸고 맛있고 양도 많으니 꼭 맛보기를 바란다. 또한 K 다리로 이동하는 길에 픠시키라는 도너츠 가게가 있다. 이것은 소련 시대부터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러시아 서민 음식이다. 매우 쫄깃쫄깃 하고 가격도 저렴하다. 픠시키는 달달한 밀크커피와 함께 먹으면 환상의 궁합이다.
운하가 꼬불꼬불하기 때문에 그에 따라 나 있는 강변길도 꼬불꼬불하다. 우리는 투어 내내 곧은 길도 걷고 굽은 길도 걷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라스콜리니코프가 방황하던 길이며, 도스토옙스키가 고민하며 걷던 길이기도 하다. 꼬불꼬불한 길이란 우여곡절이 있는 길을 암시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길 바란다.
K 다리는 현재의 코쿠슈킨 다리로 추정된다. 코쿠슈킨 다리는 그리보예도바 운하 위에 놓인 크지 않은 철제 다리로 바실리 코쿠슈킨이라는 상인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명칭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은 바로 이 다리를 언급하면서 시작된다.
소설의 첫 대목을 보자.
"찌는 듯이 무더운 7월 초의 어느 날 해질 무렵, S골목의 하숙집에서 살고 있던 한 청년이 자신의 작은 방에서 거리로 나와, 왠지 망설이는 듯한 모습으로 K다리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 죄와 벌, 홍대화 번역, 열린책들
너무 아름다운 문장이다. 홍대화 선생이 문학적으로 번역을 잘 하였다. 하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살고 있는 필자로서는 이 문장으로 인해 독자들이 소설의 상황을 오해할 것 같아 부연 설명을 해본다. 먼저 상트페테르부르크 7월은 매우 덥기는 하지만 '찌는 듯이 무덥지'는 않다. 날씨가 습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해질 무렵이라고 했는데, 7월 초는 백야기간으로서 해가 12시 쯤에 진다. 그래서 필자는 처음 이 대목을 읽으며 라스콜리니코프가 잠이 오지 않아 한밤중에 밖으로 나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주인공이 거리로 나온 것은 전당포로 가기 위함이고, 전당포는 7시에 문을 닫는다. 따라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백야를 염두에 둔다면 '해질 무렵'이 아니라 '저녁 무렵'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7월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저녁 7시는 해가 지지는 않지만, 이 때 저녁밥은 먹지 않겠는가? 소설 내용 자체가 매우 우울하고, 이 소설로 만든 영화도 주로 밤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사건들이 다 캄캄한 밤에 일어난 것으로 오해하는데, 죄와 벌은 백야에 일어난 이야기라는 점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어쨌든, 위 문장을 통해 바로 알 수 있는 것은 주인공이 S 골목에 살고 있다는 것과 7월 초의 어느 날 저녁에 K다리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소설의 첫 문장은 소설 전체의 주제를 암시한다. '작은 방'은 무언가에 의해 통제되고 억압받는, 즉 자유가 제한되는 상황을 상징한다. '방에서 거리로 나와'라는 말은 자유를 향한 첫걸음을 암시한다. '망설이는 듯한 모습'에서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인공의 심리를 나타낸다. 'K다리'는 새로운 시작을 위해 건너야만 하는 매개체라 할 수 있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인간이 위대한 것은 그의 삶이 하나의 징검다리요, 결코 어떠한 목적도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하나의 과도이자 하나의 몰락이라는 데 있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박진환 번역, 신원문화사
라스콜리니코프도 초인도 모두 건너가는 존재이다. 한 번 건넌 이상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다. 라스콜리니코프도 초인도 자유를 위해 다리를 건넌 셈인데, 건넌다는 것이 라스콜리니코프에게는 무엇일까? 라스콜리니코프는 범행 동기를 숭고한 대의로 포장하고 있기 때문에, 라스콜리니코프의 현재 심리 상태만 본다면 니체의 초인과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과연 라스콜리니코프는 다리를 건너서 자유를 얻었을까? 재미있는 것은, 소설 맨 처음에 언급된 K다리는 이후 소설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K다리는 소설 전체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노어로 죄는 프레스투플례니에 преступление 이다. 페레 пере 와 스투피찌 ступить 가 합쳐진 것이다. 이는 건너서 나아가다, 즉 넘어선다는 뜻이다. 한국에서도 흔히 잘못된 행동을 했을 대 '선을 넘었다' 라는 말을 쓴다. 노어에서도 죄란 돌이킬 수 없는 어떤 한계를 넘는 행동으로 보는 것 같다. 실제로 라스콜리니코프와 소냐의 대화 중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당신도 그렇게 했잖아? 당신도 선을 넘은 거야... 넘어설 수 있었던 거지. 당신은 자기 몸에 손을 댔고, 스스로...인생을 망쳐 버렸어."
여기서 '선을 넘은 거야' 노어 표현이 페레스투피치 переступить 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당신도 죄를 지은 거야' 라고 의역할 수 있을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가난한 법대생이며 현재 휴학중이다. 학비는 커녕 월세도 못내고 있다. 몇달째 월세가 밀려서 주인 아주머니를 만날 때 마다 월세 독촉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다. 그는 과외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다. 그는 현실과 이상 속에서 괴로워 한다. 그는 자신의 가난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이 세상에 가난과 불행이 존재하는 이유를 부조리한 사회 탓으로 돌린다. 부조리한 부분을 척결하면 단번에 가난이 해결될 것이라 믿는다. 마음만 먹으면 자신이 이 부조리를 척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푸리에가 주장한 '공상적 사회주의' 사상이 나타난다. 소수가 부를 독점해서는 안되고, 공동체가 부를 공평하게 나누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상이다. 이는 마르크스 공산주의 사상 이전에 유행하던 프랑스의 사회주의로서, 도스토옙스키 자신이 이 사상에 심취하여 반란 혐의로 체포된 후 시베리아 유형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 사상을 이렇게 죄와 벌 주인공에게 투영한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기로 마음먹는다.
결론적으로 K다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는 것은 선을 넘는 행동을 할 것이다, 즉 범죄를 저지를 것이다 라는 암시인 것이다. 이렇게 K다리는 소설 첫 대목에서 자기의 역할을 다하고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