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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이 Jun 03. 2022

가전은 맥시멈, 살림은 미니멀

전업주부의 이유 있는 가치소비

 한동안 미니멀리즘에 푹 빠진 적이 있다. 매일 집안 곳곳을 뒤져 봉투 가득 버렸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가입해 미니멀을 실천하는 사람들 노하우도 참고하고 단톡방을 만들어 매일매일 버리기 인증도 했다. 진심이었다. 한 달 정도 집안의 모든 수납공간을 뒤져 싹 버리고 나니 정말 가벼웠다. 텅 빈 서랍도 생기고 굳이 필요 없는 가구도 생겼다. 재미있는 점은 낮에 열심히 비워놓고 저녁에는 다시 쇼핑하는데 열을 올렸다. '냄비 뚜껑을 정리하려면 선반이 필요하겠군' , '빈 공간에 화분을 놓으면 예쁘겠는데' 이런 식이었다. 정리를 핑계로 비운 곳을 다시 채우기 위해 새로운 물건들을 계속 샀다. 그렇게 버리고 채우고를 반복하다 보니 결국 집 상태는 비슷해졌다. 어느 순간 버리는 일에도 열정이 한풀 꺾였다. 그리고 나만의 미니멀을 새롭게 정의했다. 나만의 가치를 기준으로 '들인 비용 대비 만족도와 활용도가 높다면 미니멀한 소비'라고. 


미니멀 소비 = 투자 비용 < 만족도와 활용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꼭 필요로 하는 물건이지만 나에게 필요 없다면 굳이 사지 않을 수 있는 결단, 반대로 대다수가 사용하지 않는 물건이지만 나에게 꼭 필요하다면 과감히 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에게 의미 있는 소비의 기준을 공유해보려고 한다.      


가치소비 1. 가전은 맥시멈 하게     


 우리 집에는 살림을 돕는 3대 이모님 중 두 분이 계신다. 식기세척기와 로봇청소기다. 거기에 최근 새로운 이모님으로 떠오르는 음식물처리기도 있다. 모두 나의 일손을 덜어주는 든든한 가전들이다. 딸들은 어려서부터 엄마의 집안일을 살뜰히 돕는다는데 나는 조금 달랐다. 집안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우리 엄마는 그런 날 보고 자주 말씀하셨다.      


“너 그래서 나중에 결혼하면 어떻게 살래?”

“엄마, 난 공부 열심히 해서 돈 많이 벌면 아줌마 쓸 거야.”      


 얼마나 엄청난 꿈이었는지 그때는 몰랐다. 현실은 가사도우미를 쓸 만큼 돈을 많이 벌기는커녕 전업주부가 되었으니 앞날은 알 수 없다. 전에도 말했지만 살림이 정말 싫다. 그렇다고 안 할 수는 없으니 과감히 소비하기로 했다. 전업주부에 식구도 셋 밖에 안되는데 무슨 식기세척기에 로봇청소기까지 들이느냐며 친정엄마에게 핀잔을 좀 듣긴 했다. 아줌마를 쓰는 것보다는 저렴하지 않으냐며 받아쳤다. 장담컨대 식기세척기, 로봇청소기, 음식물처리기는 우리 집의 평화를 지키는데 큰 몫을 하고 있다.      


 저녁식사 후 쌓인 설거지를 보면 화가 났다. 빨리 정리하고 쉬어야 하는데 아이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밥알을 세고 앉아있다. 참다못해 결국 소리를 지른다. 사실 아이한테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남편에게 화가 났다. 아침, 저녁 꼬박꼬박 집에서 밥을 먹으면서도 설거지 한 번을 도와주지 않는 남편에게 내심 불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 남편이 팔을 걷고 설거지를 해줄 때도 있었다. 그런데 왜 남편은 꼼꼼히 설거지를 하지 못하는 것인지. 남아있는 얼룩, 대충 쌓아놓은 그릇이 마음에 들지 않아 몰래 다시 설거지를 하곤 했다. 주말 내내 집밥을 해 먹고 마지막 설거지를 마치며 돌아서던 어느 날,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참으며 나는 결심했다. 아이와 남편에게 화를 낼 것이 아니라 식기세척기를 사야겠다.      


“혹시 앞으로도 설거지를 도와줄 생각이 없다면 식기세척기 좀 사줄래?”      


 씩씩거리며 설거지를 하는 나를 보며 내심 눈치가 보였는지 남편은 조용히 카드를 내밀었다. 행여 마음이 바뀔까 그 자리에서 바로 식기세척기를 주문했다.        


 로봇청소기는 또 어떤가. 물걸레질은커녕 청소기라도 제대로 돌리면 다행이었다. 정리는 좋아하지만 청소를 싫어하는 나는 매일 바닥만 대충 치워놓고 '청소기를 돌려야 하는데, 물걸레질을 해야 되는데' 하며 하루 이틀 미루기 일쑤였다. 돌돌이를 곁에 두고 청소기 대신 수시로 밀어댔다. 정리를 잘해두었기 때문에 언뜻 보면 깨끗해 보였지만 사실은 아니라는 걸 나만 알고 있었다. 결혼 5주년을 맞아 결혼기념일 선물을 사주겠다는 남편에게 고급 명품백이나 화려한 주얼리 대신 로봇청소기를 사달라고 했다. 물걸레질도 같이 되는 걸로. 중소기업에서 나온 30만 원대 로봇청소기 링크를 보여주자 남편은 잠시 망설이더니 결제를 했다. 매일 아침 아이를 등원시키며 버튼만 눌러두고 돌아오면 청소가 끝나 있으니 그 어떤 선물보다 가치가 있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마지막은 음식물처리기였다. 외출을 싫어하는 아이 탓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일은 정말 큰 일이었다. 엄마 껌딱지인 아이를 두고 나갔다 오는 일은 꿈도 꿀 수 없었고 아이와 함께 나가자니 아이를 설득하는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오랫동안 가정 보육하다 보니 더 그랬다. 등 하원 길에 가지고 나가 버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퇴근 한 남편에게 혹은 출근하는 남편에게 음식물 쓰레기를 버려달라고 하기 미안했다. 그렇다고 자발적으로 버려줄 남편도 아니었다. 고심 끝에 음식물처리기를 샀다. 앞에 것들과 비슷한 이유에서다.      


 그때 사들인 가전 덕분에 지금 노트북을 켜고 글을 쓰고 있으니 기회비용을 생각하면 훨씬 남는 장사였다.    


가치소비 2. 의외로 없는 것     


 소파가 없다. 신혼집은 방 2칸짜리 18평 아파트였는데 거실이 꽤 컸다. 덕분에 3인용 소파를 두고 썼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난 후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아이가 소파를 잡고 아슬아슬하게 서거나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심장이 철렁했다. 어느 날 기저귀를 벗겨놓은 틈에 아이가 패브릭 소파에 소변 실수를 했다. 이때다 싶어 처분했다. 이후 평수를 넓혀 두 번 더 이사했지만 소파는 사지 않았다. 덕분에 거실을 넓게 쓸 수 있어 아이용 미끄럼틀이나 정글짐 같은 것을 설치하고 놀 수 있었다. 책장도 거실에 둘 수 있어 아이가 책을 꺼내보기에도 좋았다. TV를 볼 때면 바닥에 앉아야 하는 것이 좀 불편했지만 자주 보지 않으니 괜찮았다. 그랬던 아이가 7살쯤 되니 이제 슬슬 소파가 그립다. 그런데 주말에 늘어져 있을 남편을 생각하니 여전히 꼭 사야 할 물건은 아닌 듯하다.     


 건조기도 없다. 빨래가 쌓이는 게 싫어서 매일 빨래를 한다. 하루는 옷, 하루는 수건. 그러니 양이 많지 않다. 빨래 건조대 하나를 두고 매일 널고 갠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빨래를 돌려놓고 아이 등원시키고 돌아와 빨래를 널어두는 것이 나의 하루 시작이다. 거실 한쪽 햇볕이 가장 잘 드는 곳에 건조대를 두고 지금 막 세탁기에서 꺼내 온 빨래를 널어둔다. 그리고 식탁에 앉아 커피를 한 모금 마실 때면 집안 가득 퍼지는 섬유유연제 냄새가 커피 향보다 진하다. 거실 뷰를 포기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렇게 멋진 뷰는 아니라 괜찮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점점 더 편하게 살림하고 싶은 내 마음을 귀신같이 알고 유혹하는 가전들이 차고 넘친다. 잠깐 이성을 놓으면 쉽게 미니멀과 멀어진다. 하지만 미니멀이면 어떻고, 맥시멀이면 또 어떻나. 남들이 말하는 기준이 아닌 나만의 가치를 가지고 소비한다면 우리는 분명 모두 현명한 소비자다. 



*사진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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