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는 운동장 관중석에서 고개를 떨구고 서 있었다. 체육수업이 이미 시작어 학생들은 구령에 맞춰 체조를 하는 중이었다. 제 발로는 절대 수업에 합류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떤 활동에도 참여하지 않는 A였다. 보다 못한 체육 교사가 줄넘기라도 가져오라고 하자 그거라도 챙겨온 것이 최근 들어 보인 놀라운 변화였다.
하늘은 맑고 햇살은 눈부신 가을날. A와 나란히 관중석에 앉았다.
“우리 솔직하게 이야기해볼까? 그동안 선생님이 살펴보니 A가 줄넘기도 할 수 있고 다른 활동도 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
A는 묵묵히 듣기만 할 뿐 답을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너를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대한 것 알고 있지? 책을 펴지 않거나 수업에 참여하지 않아도 예외로 해준 거 말이야. 지금처럼 너를 아무것도 안 하는 학생이라고 다르게 대해주는 것을 원하니?”
“아니요.”
이야기를 듣던 A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9월에 만난 A는 한눈에 보아도 특이한 학생이었다. 복직한 5학년 교실에 가 보니 한 아이가 수업시간에 책도 없이 앉아있었다. 묻는 말에도 묵묵부답이었다. 아이를 관찰했다. 급식실에서 A는 친구들과 신나게 이야기했다. 그 모습이 신기해 옆자리에 앉아 한마디씩 해가며 편하게 대해보았다
그래도 A에게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수업시간에 흥미 있는 이야기에만 귀를 기울이고 영상을 보여주면 잠시 집중하는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A가 영어 수업에 가지 않고 교실에 남아있는 것이었다. 이유를 물어도 대답이 없어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음에는 가자고 권유했지만, 그다음 수업에도 가지 않았다. 계속 빠지는 것을 그냥 둘 수 없어 대화를 시도했다. A와의 대화는 일방적이고 지루했다. 분명 이유가 있어 가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A의 생각을 알 수가 없어 교실에 있는 것을 허락할 수가 없다고 이야기했다. A로부터 어떤 말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다음 수업에는 꼭 가야 한다고 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시간에도 A는 교실에 남아있었다. 불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A를 보는 내 마음도 불편했다. 세 번이나 수업에 빠지게 하는 건 담임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이유를 말해줄 수 없다면 이제는 부모님에게 알려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 말을 하는데 10분이 흘렀다. 다시 10분이 흐르고 A가 다가왔다. A가 입을 여는데 또 10분이 걸렸다. A는 눈물을 흘리며 이유를 말했다. B에게 지우개를 빌리려고 뒤를 돌아보는데 영어 선생님이 소리치며 혼내셨고 선생님에게 또 혼날까 봐 수업에 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평소 B와는 말이 많았다.
이 말을 하는 게 그렇게나 힘들었을까. 마음을 싸매고 상황을 피하려고만 하는 A. 그런 아이를 어르고 달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내 기운도 다 빠지는 것 같았다. 속을 풀어놓고 눈물을 흘리는 아이에게 용기 내서 말해줘서 고맙다고 등을 두드려 주었다. 영어 선생님에게 A의 마음을 전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도 하면서.
그늘진 관중석에 찬바람이 살랑 불어왔다. 따스한 햇볕이 비추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 A와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제 선생님이 묻는 말에는 소리 내서 대답하는 거야. 알았지?”
“네”
생각보다 커진 A의 목소리가 반가웠다.
“그래, A는 할 수 있어. 선생님은 목소리만 들어도 기쁘다. 우리 반이나 학년에 그리고 학교에 A처럼 행동하는 학생이 있을까?”
“아니요.”
“그래. 그럼 A는 앞으로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요?”
“아니요.”
“하고 싶은 마음도 있구나. 그럼 지금은 왜 수업에 참여하지 않는 걸까?”
“도와주면 할 수 있는데 그냥 하면 못해요.”
진심을 말하는 A의 목소리에 걱정으로 가득했던 내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A는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옷소매로 눈물을 닦아주며 A에게 물었다.
“친구들 앞에서 못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싫어?”
“네”
“그랬구나. 이제 A의 마음이 이해가 돼요. 그런데 우리 반 친구들이나 선생님이 A를 많이 배려하고 잘 지내도록 도와주고 있는데 알고 있어?”
“네”
A는 나를 바라보며 전보다는 조금 커진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은 이번이 A가 용기를 낼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새로운 학년이 되면 또 낯선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나 어려울 수 있으니까 한번 도전해보는 게 어떨까? 선생님이 도와줄게.”
“네”
A의 대답과 함께 체육수업이 끝났다. A와의 대화가 믿어지지 않았다. 불과 지난주까지만 해도 수업시간에 묻는 말에는 고개만 저었던 A였다. 어렵게 입을 열었던 이번 주 영어 수업에 관한 대화로 A의 마음에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A는 다시 영어 수업에 갔다. 그리고 체육 시간에 줄넘기를 챙겨가 체조부터 함께 했다. 처음 줄넘기를 시도할 때 곁에서 용기를 주었더니 목표했던 다섯 개를 해내서 ‘별도장’ 다섯 개를 받았다. 이후로도 A는 용기가 필요할 때마다 멈추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나는 손으로 응원을 하며 눈을 크게 뜨고 에너지를 보내주었다. A가 피구를 하러 들어가 코트에 서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땐 ‘정말 꿈인가?’ 싶었다.
11월에는 A의 짝을 긍정적이고 활기찬 여자아이로 정해주고 모둠 활동을 했다. A의 짝은 A에게 책을 펴게 하고 A의 활약을 알려 추가로 모둠점수를 받으며 모둠을 잘 이끌었다. A의 변화를 볼 때마다 친구들에게 알리며 ‘별도장’을 주었다. ‘별도장’은 A에게 상처를 덮어준 밴드같은 것이었으리라.
2학기의 반절쯤 되는 11월 10일, 빼빼로 데이 전날이기도 했던 그 날, 우리 반은 그동안 받았던 ‘별도장’을 합산해 ‘팝콘이 있는 교실 영화관’을 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A는 우리 반 친구들 모두에게 나눠 줄 빼빼로와 나에게 줄 큼지막한 선물을 가져왔다. 핸드폰에는 A 어머니에게서 문자가 와있었다.
“A가 친구들과 선생님께 빼빼로를 주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친구들이 자기를 많이 도와줘서 고맙고 선생님도 자기를 많이 신경 써줘서 감사하다고요.”
‘김영란법’이 무섭다지만 이런 마음으로 주는 선물을 안 받을 수는 없었다.
‘잡아갈 테면 잡아가라지.’
“선생님이 이 선물 받으면 법에 걸리는데 A가 주는 선물이라 그래도 받고 싶구나. A가 ‘사랑해요.’ 하면서 주면 받을게.”
그랬더니 A가 말했다.
“사랑해요.”
영화가 시작되고 나는 맨 뒷줄 책상 위의 A 옆에 앉아 A 손에 들린 빼빼로와 팝콘을 뺏어 먹으며 말했다.
“A야, 선물 준비해줘서 고마워. 나도 사랑해.”
마음을 풀어준 A에게 고마웠다. 굳게 닫힌 마음을 여는 데는 많은 힘과 노력이 필요하다. 누군가의 닫힌 마음에 잠시라도 닿을 기회를 얻는 건 행운을 얻었기 때문이리라. 상대가 남겨둔 구멍 하나를 찾아내는 행운 말이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여겨질 때는 내가 열어둔 구멍이 너무 좁은지 살펴보아야 한다. 마음을 닫고 지낸 시간만큼 외롭고 힘들다는 것을 A를 보며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자주 구멍을 열어 속마음을 말해보자. 우리가 더 행복할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