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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작부인 Dec 30. 2024

인생 친구

스위스의 한 동물학자가 발견한 임계 거리(Critical Distance)라는 개념이 있다. 임계 거리는 포식자 동물이나 사람이 이 거리 이내로 다가가면 동물들이 불안을 느끼고 달아나는 거리를 의미한다. 사람 역시 자신의 성격이나 사는 지역, 기질, 습관에 따라 자신만의 임계 거리로 상대를 대한다.


사회에서 만나는 가벼운 관계는 넓은 임계 거리가 적용되지만 가까운 친구가 되면 좀 더 가까운 임계 거리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상대에게 느낀 나의 임계 거리가 상대가 나에게 느낀 임계 거리와 다를 때 서로의 임계 거리를 조절할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고 상대의 불안에 한 발 더 들어설 용기가 필요할 때도 있다.      


30대에 아이를 낳고 키우며 다행히 서로의 거리가 안전하게 조절되어 마음을 열게 된 두 친구가 있다. 


아이들 키우며 만났던 엄마들은 나이, 직업, 성격, 관심사 등이 다양했다. 육아라는 공통의 관심사가 있었고 참여할 것이 많은 공동육아 덕분에 친해질 기회가 많았다. 두루두루 어울리다가도 삼삼오오 짝을 지어 차를 마시고 그때그때 시간이 맞는 가족들끼리 캠핑도 자주 다녔다. 

큰아이 5살 때부터 두 살, 네 살 터울의 세 아이를 같은 어린이집에 보냈으니 그 기간이 9년이었다. 아이들 키우는 어려움과 노고를 함께 나누며 정들고 사귐이 깊어졌던 엄마들이 여럿 있었다. 흡사 자매들처럼 시시콜콜히 집안일을 챙기고 먹을 것을 나누어 먹었다. 아이들을 서로 봐주고 주말에는 ‘엄마의 날’이라며 극장 나들이를 다니기도 했다. 


둘째 친구 엄마로 만난 까만콩은 우리 둘째와 셋째랑 성별과 나이가 같은 남매를 키운다. 어린이집에 둘째를 보내며 막내를 가졌을 때 그녀도 동생을 가졌고 놀이터에 꼬물이를 달고 다니며 오빠를 키웠다. 시골에 농사짓는 부모님이 계시고 어린이집 교사였던 그녀는 아이들도 편하게 대하고 나에게도 늘 편안했다. 

맞벌이 부부로 일하며 아이 둘을 키우면서도 마을 공동체 일도 마다하지 않는 그녀는 친구를 가까이 두고 사귀는 시간보다 함께 사는 사회에 자신의 역량을 더 발휘했다. 사람에게 집착하는 마음이 있는 나였지만 그런 그녀에게는 거리를 인정해줄 수 있었다. 그 거리는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안전한 거리가 되었고, 가끔 만나도 편하고 즐거운 거리가 되었다. 

중학생, 초등학생이 된 두 집의 남매는 서로 절친이 되었고, 막내들은 소울메이트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귀찮게 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편안한 친구가 되고 싶어 가급적 그녀의 고된 일상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만남의 호흡을 조절한다. 

아이들을 학업으로 내몰지 않고 스스로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마음도 비슷하고 자연에서 난 먹거리를 진심으로 좋아하며 기쁘게 나누는 것도 내 마음과 같은 그녀. 그녀의 마음은 자연을 닮아 있어 바쁜 내 마음을 어루만지고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게 한다. 나도 그렇게 그녀를 편하게 대하며 나를 만날 때 그녀의 마음도 쉴 수 있기를 소망한다.     


기타 모임으로 만난 토끼풀은 우리 아이들과 한 살씩 차이 나는 자매가 있다. 어린이집 소모임으로 기타와 책 모임을 같이 했다. 한 번 하겠다고 마음먹은 일은 정확하게 해내는 그녀는 성실했고 늘 부지런했다. 알뜰하게 살며 살뜰하게 대했고 마음을 내주는 걸 잘 알아차리고 고마워했다. 책을 통해 알아가는 작은 것들에 기뻐하고 다른 사람이 한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가 적절한 상황이 오면 그 말을 기억하며 지난 시간을 되새겼다. 

늘 바쁜 호흡으로 살던 나는 만나서 이야기하기를 좋아했지만, 토끼풀처럼 다른 사람이 한 말을 잘 듣고 기억하지는 못했다. 그런 내게 그녀는 늘 같은 모습으로 나를 대해 주었고 내가 한 말을 잘 기억했다가 다음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물어주었다. 그녀를 만날수록 점점 더 말이 많아지고 아주 미묘한 속마음까지 털어놓게 되는 나를 보며 그녀의 진심에 마음이 움직인 걸 느꼈다. 내 마음이 비로소 상대에게 진심으로 친구가 되어주고 싶어질 때까지 거리를 유지하며 나에게 집중해주었다. 


3년전 암 진단을 받고 충격에 빠져있을 때 토끼풀에게 큰 위로를 받았다. 그녀는 내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지 나의 올케에게 전화걸어 물어보고 함께 걷자고 연락해왔다. 


병가 내고 수술 날짜를 기다리며 혼자 하루 이만 보 이상 걸으며 체력을 기르고 있던 나에게 그녀는 연차를 쓰며 같이 길을 걸어주었다. 만나서 밥을 사주고 집 근처까지 걸어와 커피를 마시고 집 앞까지 데려다주고는 자기는 버스를 타고 돌아갔다. 자신의 어머니도 말기암 투병 중이어서 주말이면 어머니를 뵈러 부산에 다녀오느라 얼마 남지 않은 연차는 거의 바닥을 보였지만 쪼개고 쪼개서 여러 번 함께 걸었다.


내가 받은 위로는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는 재산이 되었다. 어머니를 곧 떠나보내야 하는 슬픈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고 아픈 어머니를 만나고 온 마음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 월요일 점심, 그녀가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골라 맛있는 점심을 먹고 동네 산을 오르며 수다를 떨었다. 우리 집 앞을 돌아 다시 버스 정류장에 데려다주며 그녀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그녀를 만나 마음을 털고 나면 세상이 다 가벼워졌다.     


미국의 시인인 랄프 왈도 애머슨은 ‘친구를 얻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완전한 친구가 되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알고 지내는 사이를 넘어 삶을 공유하고 위로하는 친구를 얻기 위해서는 상대에게도 그런 친구가 되어주어야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오랜 시간을 만나고도 여전히 먼 임계 거리에 있는 지인들도 있고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어도 상대가 원하는 친구가 되지 못한 채 그저 마음만 두고 있는 친구도 있다.


친구를 얻는 행운은 쉽게 오지 않는다. 마음을 열고 내가 먼저 친구가 되어줄 수 있을 때 나도 친구를 얻을 수 있다. 아름다운 자연과 같은 인생 친구는 삶을 풍요롭게 하는 소중한 인연이며 삶의 우여곡절을 이겨낼 인생의 에너지이다. 오늘도 나는 자연을 닮아가며 나의 임계 거리에도 안전한 인생 친구가 있음에 감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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