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틀 포레스트> 촬영지 ‘혜원의 집’을 찾았다. 멀리서도 작고 아담한 집이 눈에 띄었다. 보슬보슬 내리던 비가 잠시 멈췄다. 다리를 건너 집으로 가는 길이 단정했다. 영화 속 그대로 혜원이 살던 집이 나타났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몸속 어딘가 숨어 있던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거실 한쪽에 난로가 놓여있고 그 옆으론 주방이 환하게 보였다. 작은 공간이어도 아기자기했다. 거실 옆 혜원의 방에 잠시 누웠다. 소나기가 쏟아졌다. 경쾌한 빗소리를 들으며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다.
혜원은 도시의 삶에 지쳐 시골 고향으로 내려왔다. 인스턴트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며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해서 임용고시를 준비했지만 합격하지 못했다. 시골집으로 돌아온 혜원은 남아있는 한 줌 쌀로 밥을 짓고 꽁꽁 언 배추를 뽑아 된장국을 끓여 허기를 채웠다. 잠시 머물다 가겠다는 시간이 길어졌다. 고모와 친구들의 도움을 받으며 농사도 지었다. 갑작스런 태풍으로 피해를 입으며 자연히 일어나는 것들을 그냥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모든 걸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조금씩 알게 되었다.
혜원은 시골에서 열심히 생활하지만 부모님 일을 돕는 친구 재하나 고향을 떠나본 적이 없는 은숙과 달리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방황했다. 자신이 있을 곳이 어디일까 고민했다. 그런 혜원의 모습을 보며 나의 마음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 사람들 모두 제 자리에서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데 나는 삶을 버거워하며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언제라도 옮겨갈 듯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부엌 옆 작은 방에 누우니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영화 속 장면과 나의 기억이 겹쳤다. 맛있는 음식과 엄마의 웃음, 뜨거운 햇살과 시원한 그늘에서 느꼈던 투명하고 상쾌한 느낌이 생각나니 마음이 밝아졌다. 영화 속 혜원이 시골집에 돌아온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시골집에는 자신을 떠난 엄마에 대한 기억도 있었지만 자연과 요리와 혜원을 사랑하는 엄마의 숲이 있었다.
혜원은 엄마를 떠올리며 요리를 했다. 친구들을 초대해서 삼색 시루떡을 만들고 막걸리를 만들어 찬바람을 안주삼아 마셨다, 봄꽃으로 파스타를 만들고 양배추 빈대떡, 양배추 달걀 샌드위치, 감자빵을 만들었다. 계절 따라 아카시아꽃 튀김과 오이 콩국수를 만들고 엄마의 크렘 브륄레로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스트레스 해소에 좋은 매운 떡볶이와 가을의 맛 밤조림, 겨울이 와야 진짜 맛있는 곶감까지 요리를 하며 위로를 받았다.
마음을 담은 요리는 약이 되고 힘이 된다. 한여름 더위를 뚫고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반기던 옥수수가 그랬고, 매콤한 양념에 감자 넣고 익혀 푸짐하게 먹었던 고등어조림이 그랬다. 햇감자가 나오는 초여름이 되면 어머니는 아버지를 위해 감자를 삶으셨고, 가을이면 도토리를 주워다 가루를 내고 묵을 쑤셨다. 꾹꾹 눌러 만들어다 주시는 모시떡과 쑥개떡에도 계절과 사랑이 묻어있었다.
혜원은 ‘엄마에게는 자연과 요리 그리고 나에 대한 사랑이 그만의 작은 숲이었듯 나도 나만의 작은 숲을 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너를 이곳에 심고 뿌리내리게 하고 싶었다. 힘들 때마다 이곳의 흙냄새와 바람과 햇볕을 기억한다면 언제든 다시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걸 믿는다.’는 엄마의 편지에 답장을 했다.
친구들은 혜원이 심어놓고 간 양파 싹을 옮겨 심으며 다시 집을 떠난 혜원이 아주심기를 준비하는 중 일거라고 했다. 아주심기는 뿌리가 약한 모종이 잘 자랄 수 있게 더 이상 옮겨 심지 않고 완전하게 심는다는 뜻이다. 봄이 되어 심어놓은 양파 알이 굵어졌다.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온 혜원은 단단하게 잘 자란 양파로 치즈를 얹은 양파그라탕을 만들었다. 그 고소한 향이 집안에 풍기는 듯 했다. 엄마의 말대로 혜원은 이곳의 흙과 바람과 햇볕으로부터 언제든 다시 털고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정해지지 않은 답을 찾아가는 과정도 자신의 숲을 만들어가는 과정임을 알게 된 것이다.
굵어졌던 빗줄기가 그쳤다. 혜원의 방을 나와 마당 입구에 세워놓은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아주심기를 마친 혜원의 단단해진 마음이 느껴졌다. 나도 이제 나만의 작은 숲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흙과 바람과 햇볕으로 위로받으며 일과 가족과 자연을 사랑하는 나의 숲에 아주심기를 해야겠다. 그 작은 숲이 힘들고 버거워도 단단한 뿌리가 그 마음을 지켜줄 것이다. 돌아가는 길에 텃밭에 들러 저장해 놓은 양파를 가져왔다. 속을 파고 고구마를 넣은 고소한 양파그라탕을 가족들에게 만들어주며 편안한 숨으로 나의 숲에 머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