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매가 육아도 함께 하니 얼마나 좋아요?"
"서로 의지도 되고 덜 힘들 것 같아요!"
공동육아를 하고 있는 쌍둥이 언니와 내가 자주 듣게 되는 말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
혼자보다는 둘이 낫다는 말이 있듯이 육아에서도 이 말은 통한다.
공동육아에 대해 글을 쓰게 되면서 멘토 작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공동 육아하면서 힘들고 어려웠던 점도 글로 써주세요."
어려운 점...
당연히 많고도 많다.
몇 편의 글을 쓰며 꺼내기가 두려워 힘든 것은 애써 외면해왔다.
공동육아의 장점만을 인식해야 글쓰기도 육아도 지속 가능할 것 같아서였다.
그렇지만 한번 써보고자 한다.
공동육아를 하고 있는, 하고자 하는 누군가에게 공감과 도움이 되는 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최대한 유쾌하게 자판을 두드려보겠다.
그런데,
초고를 쓰면서 한 편의 글로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쓸 내용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함께 육아하는 것의 소중함과 가치를 기록하고 싶은 마음으로 시작한 주제였다.
쓰다 보니 공동육아의 어려움과 힘듦이 왜 이렇게 많은 것일까?
더구나 정제된 표현을 쓰고 싶은데 문장까지 구구절절하다.
이걸 어째야 하나? 1차 멘붕이 온다.
이 주제로 매거진을 따로 발행할지 잠시 고민하다 조금씩 나누어 써보기로 했다.
힘들다고 어렵다고 적어놓은 것들이 나누어 쓰다 보면 좋은 점으로 바뀌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첫 번째 어려움에 대하여
일보 전진 이보 후퇴
우선 나보다는 쌍둥이 언니가 힘들었을 부분을 떠올려 적어보았다.
아이의 성장을 함께하며 일보 전진해서 기뻐했던 순간도 잠시, 바로 이보 후퇴하게 되는 순간을 겪게 된다.
쌍둥이 언니가 조카 S와 부단히 노력해 한 발 나아간 성장이 금세 원래로 돌아가곤 했다. 그때 내가 느낀 미안함과 공든 탑이 무너져내려 허무해했던 쌍둥이 언니의 모습이 교차된다.
그건 나였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그 첫 번째 에피소드는 이렇다.
이종사촌인 조카 S와 딸 J는 7개월 차이가 난다.
어렸을 때 한두 달의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인지 육아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안다.
조카 S가 이유식을 하게 되면서 젖병과 공갈젖꼭지를 힘들게 뗐을 때, 딸 J는 분유를 먹였기에 아직 젖병과 공갈젖꼭지를 사용하고 있었다.
둘의 이 미묘한 단계의 차이는 S가 젖병과 공갈젖꼭지를 떼는데 난관이 되었다.
S는 J를 보며 자신도 분유를 먹겠다고 울며 떼를 썼고, 눈 깜짝할 사이에 J의 공갈젖꼭지는 S의 입에 물려있었다. 그러면 자신의 것을 뺏긴 J가 울기 시작한다.
공동육아를 하고 있으므로 계속해서 반복되는 상황이 생기게 되었다.
결국엔 조카 S의 눈앞에서 세상의 전부인 소중한 공갈젖꼭지를 잘라 보이며 이제는 정말 작별해야 함을 알린다. 그때 서럽게 울던 S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기만 하다.
다섯 살이 된 조카 S는 지금도 네 살 J와의 놀이 역할극에서도 응애응애를 외치며 언제나 동생 역을 맡고, J는 선생님이나 엄마 역할을 맡는다. 이 모습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하지만 역지사지의 마음도 느껴볼 수 있으니 좋게 해석하고 싶다.
퇴화라고까지 표현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아기인데도 더 아기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고 해야 할까?
언니인 S는 안되고 동생 J에게만 허용되는 상황, 동생이라 안되고 언니는 되는 상황의 연속에서 아이들은 더 혼란스럽고 서러웠을 것이다.
커가면서 아이들이 대화가 통하고 설명하면 수용하는 법을 배웠기에 어렸을 때보다는 이런 상황의 빈도가 낮아졌다.
공동육아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돌아보니 함께 아이를 키우며 나와 J가 혜택 받은 사람이라는 걸 느끼며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
쌍둥이 언니가 먼저 겪은 시행착오를 비교적 덜 겪으며 육아를 한 것이다.
J는 무엇이든 일찍 시작하고 일찍 뗐다.
쌍둥이 언니가 말하길 자신이 먼저 맨땅에 헤딩을 해보고 경험을 공유해주니 얼마나 좋냐며 나에게 복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인정하는 부분이지만 이런 점을 고려해 전략적으로 임신을 한 건 결코 아니었음을 밝힌다.
아이를 키우며 기억에서 잊히기 전에 쌍둥이 언니에게 깨알 육아팁을 전수받고, 육아용품을 물려받아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많이 되고 있다.
이럴 때는 7개월의 차이란 정말 작은 것으로 바뀌어 공동육아의 장점으로 작용한다.
앞으로 한 발 딛었다가 뒤로 두 발 물러나는 춤사위처럼 즐기면 될 것을.
(몸치라서 어려웠을까?)
육아라는 무대 한가운데에서는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긴장되는 첫 무대라도 옆에 함께 서 있는 동료가 힘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육아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쌍둥이 언니, 남편, 형부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대에 함께 선 동료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공동육아의 춤사위가 조금씩 편안해지고 있다.
한 동작 씩 맞추어 가면 된다.
비록 지켜보는 관중이 답답할지라도.
응원해주리라 믿는다.
* 힘든 점 1개를 쓰고 99개가 남은 느낌이다.
다 쓰면 아무도 공동육아 안 할 것 같아 한두 편 정도 더 쓰고 훈훈하게 마무리해야겠다.
(다음 편에 계속...)